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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종교와 개독교

수치스런 한국 교회 ② ‘해방 후 한국교회의 역사왜곡’

수치스런 한국 교회 역사 ‘해방 후 한국교회의 역사왜곡’
광복 후 교회, 친일파 득세하고 역사 날조하고
[민족문제연구소] 최덕성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 2005년 9월 20일


광복과 더불어 신앙과 종교의 자유가 찾아왔으나 일제라는 이족의 물리적인 힘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일제의 잔재를 그대로 방치하는 자유로 변모했다.

우상숭배를 행하고 비인도적 행위와 민족배신을 행한 전력을 참회하지 않아도 그것을 탓하지도, 간섭하지도 않는 자유로 탈바꿈했다. 참회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을 추방하는 자유로, 일제 치하에서 생존의 지혜를 터득한 자들이 신속히 기회주의적으로 변신하는 자유로 바뀌었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불의한 정치권력에 유착하는 자유로, 과거사 청산 부재를 일체 문제 삼지 않는 자유로 전락했다. 교회의 역사를 친일파 시각으로 기술, 편찬하고 친일파 인사들의 과거사를 강변하는 왜곡된 역사 기술의 자유로 탈바꿈했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는 간혹 용서를 받아야 할 자가 용서하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를 용서하는 모순을 연출하는 경우가 있다. 용서를 베풀어야 할 자가 도리어 용서받는 자리에 서는 수가 있다. 광복 후의 한국교회가 그러했다.

우상숭배를 비롯한 여러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도리어 재판석에 앉았다. 친일파 교회 지도자들은 스스로 반성하고 자숙해야 할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참회고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독선, 분리주의, 신성파라고 비난하고 폄하했다.

조국 해방과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자신들에 대한 면죄부로 삼았다.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일방적으로 자신을 용서했다. 과거사 청산 방법을 논했다. 남들도 자신처럼 자기를 용서했다. 자신이 자기를 용서한 것처럼 타인도 자기를 용서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용서한 것같이 남도 나의 죄를 문제 삼지 말라”고 했다.


1. 과거사 청산 거부, 참회고백 거부

한국교회사가 김양선 목사는 장로교 총회가 세 차례나 신사참배의 죄를 참회하기로 결정했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사실과 다르다. 손명걸은 총회가 신사참배 취소를 세 번씩이나 결정하고 참회를 했는데도 고신계 인사들이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거듭 시비를 거는 것은 독존적 자기 영광에 도취된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제33회(1947) 총회가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취소 결의를 했고, 진정한 참회가 없다고 하여 제34회(1948) 총회가 다시 취소 결정을 했고, 참회의 날까지 정하여 선언했으나, 그래도 만족하지 않은 탓으로 제38회 총회(1954)에서 세 번째로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반복적인 취소에도 ‘순결주의자들’은 만족하지 않고 결국 비극적인 분열을 초래했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는 옳은 게 단 한 가지도 없다. 첫 두 번의 ‘취소 결정’이 있었다는 것과 ‘참회의 날’을 선포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장로교 제33회, 제34회 총회는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기로 결정한 바 없다. 참회의 날을 갖기로 결의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선포하지도, 시행한 바도 없다. 신사참배 ‘취소성명서’라는 해괴한 것은 채택, 발표한 것은 제39회 총회(1954, 안동)였다.

박형룡 박사는 평북노회 교역자 수양회에서 출옥성도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두 달 간의 자숙 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홍택기 목사는 “해외로 도피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사람의 고생은 마찬가지였다”는 말로 거부했다. 해방 뒤 출옥성도 중심으로 일어난 회개운동은 친일파 인사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반민족행위조사특별위원회에 연행된 목사는 장로교의 정인과, 전필순, 김길창, 김동만, 전인선, 감리교의 양주삼, 정춘수 등이었다. 그들마저도 모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친일파 목사 가운데 교회의 질서에 따라 공적으로 참회고백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교회는 광복 후 친일파 인사들이 교회를 장악하도록 허용한 것과 참회고백을 하지 않는 것을 용인한 것과 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 재판석에 앉아 자신들을 용서한 것을 묵과한 것을 공적으로 참회해야 한다.


2. 고려신학교 추천 불허

출옥성도들이 세운 고려신학교(1946)는 개혁신학을 표방하고 출범했다. 이 그룹에 대한 친일파 인사들의 적대감은 극에 달했다. 그것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는데, 총회가 목사후보생을 고려신학교에 추천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노회가 신학생을 그 학교에 추천하는 것을 장로교 총회가 가로막았다.

광복 후에도 참회고백은 하지 않은 채 한국교회의 주도권을 쥔 친일파 인사들은 조선신학교를 교단의 목회자 양성기관으로 신속히 인준했다. 이 학교는 역사적인 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허물기 위해 설립된 학교이다.

한국장로교회장로회신학교, 평양신학교, 조선신학교, 동북신학교, 고베중앙신학교, 일본기독신학교 등 여러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을 목사로 안수했다. 신학생 졸업창구 일원화나 단일 신학교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

이 점을 고려하면 고려신학교가 교단 직영신학교는 아니지만 과거사와 관련하여 설립된 학교이며,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을 회복, 선전, 강화하기 위해 설립된 기존의 신학교이므로 그 학교에 신학생을 추천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도 가능했다. 추천을 금한 것은 출옥성도들에 대한 그들의 반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3. 한부선 선교사 해벌

장로교 총회는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제명시킨 한부선 선교사를 해벌(解罰)한다는 결정을 했다. 1950년에 경남노회 문제를 해결하도록 선출한 위원회를 통해 해벌 통문(通文)을 보냈다. 신사참배를 시행하기로 한 총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평양노회가 결의했고, 총회가 그 보고를 받음으로써 확정했던 제명처분을 해벌한다고 알렸다.

한부선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펼치다가 투옥되어 포로 교환의 일원으로 아프리카를 거쳐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1947년에 한국에 귀환하여 고려신학교의 실천신학 교수로 봉사했다. 그가 제33회 총회(1947, 제2차 남부총회)에 참석하자 서기가 그를 알아보고 호명했다. 이 때 그는 조용히 일어서서 “나는 이 총회의 회원이 아닙니다”고 답했다. “나는 치리를 받고 있는 자입니다” 말한 것으로도 알려진다.

한부선이 총회에 참석한 것이나 총회원석에 승석한 것은 새로 조직된 총회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그 총회에 소속되는 것을 불긍(不肯)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양선이 지적한대로 “아무리 왜정시대의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봉천노회가 정식으로 한부선 선교사의 제명처분을 단행했고, 총회는 노회의 보고에 의하여 그의 이름을 회원명부에서 삭제했던 것이니 만큼 그의 이름을 총대 명부에 재록(再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절차를 밟았어야 했다” 교회가 잘못을 뉘우치거나 참회고백을 하지 않고 오히려 해벌을 통보한 것은 언어도단이다. 친일파 역사인식과 교권주의적 발상이 낳은 해프닝이었다.


4. 메이첸파 매도

한국장로교회는 ‘아메리카장로교’라는 이름을 가진 메이첸파와 선교협력관계를 맺었다. 1937년에 이를 결의하고 노회 수의(隨意)를 거쳐 1938년에 보고를 받음으로써 공적으로 체결되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펼치던 한부선은 메이첸파 선교사였다. 광복 후에 재건된 한국장로교회는 1943년에 해체된 교단을 계승한다고 표명했다. 그렇다면 이 교단과 메이첸파와의 선교협력 관계는 유효하다. 이러한 이유로 메이첸파 선교사 한부선은 광복 후에 재건된 장로교 총회 임원회에 참석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친일파 인사들은 고려신학교가 한부선을 실천신학 교수로 초빙한 것과 관련하여 고려신학교와 함께 메이첸파를 분리주의와 동일시하고 폄하했다. 친일파 인사들은 장로교회가 고백하던 정통신앙과 출옥성도들의 신앙노선에 대한 극단의 시기와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러한 적대감은 급기야 출옥성도들 중심의 고신파(고려신학파)를 제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브래들리 롱필드(Bradley Longfield)를 포함한 여러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오늘날 미국장로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정체성을 잃은 원인이 당시의 미국교회가 메이첸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5. 경남노회 제거, 제1차 장로교 분열

장로교 총회(1951)는 기존의 경남노회를 제쳐두고 경남지역 친일파 인사들이 만든 ‘경남노회’라는 이름을 가진 불법단체를 받아들였다. 장로교 원리상 기존 노회의 동의 없이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거나 분할, 합병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런데도 총회는 합법적인 기존의 노회가 동의하지 않는 노회 통폐합을 인정했고, ‘경남노회’라는 불법단체를 받아들였다.

약 150개 교회들로 구성된 기존의 합법적인 경남노회를 제거했다. 장로교회의 치리회 질서를 위반한 정치폭력이었다. 출옥성도들에 대한 친일파의 극심한 배타적 발상과 적대감을 드러냈다.

반민특위 중심의 대한민국의 과거사 청산 노력은 ‘기독교 정권’ 이승만 정부의 방해로 실패했다. 한국장로교가 정치폭력으로 신앙의 정통, 민족 정통성을 가진 고신파를 제거한 사건은 그것보다 더 심했다.

총회는 경남노회를 제거한 뒤에 지역마다 교회의 분열을 조장했다. 파당을 만들어 기존의 경남노회의 발전을 방해했다. 교회당 명도 소송을 세상법정에 제기하고, 성도들을 이간질 했다. 총회파 문창교회는 고신파 문창교회를 상대로 교회당 쟁탈을 위한 소송을 제기했고, 송상석 목사는 이에 응소(應訴)했다. 교회의 재산은 교인 ‘총유’(總有)라는 판결을 받았다.

친일파 인사들과 한국교회사가들은 한국장로교회 제1차 분열의 책임을 고신파에 돌린다. 그 사건을 강자의 논리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분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친일파가 주도하는 총회파에 있다.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는 통념은 이 사건에 해당되지 않는다.

고신파 출옥성도들은 교회의 과거사를 공적으로 참회하고 함께 하나의 장로교회로 재출발하고자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느 누구를 심판하고 정죄하거나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승리의 영광을 과시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사가들은 출옥성도들이 참회고백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독선적’인 발상을 가지고 형제를 ‘정죄’한 것으로 단정했다. 자기 의를 높이고, 자기의 공로를 뽐내기 위해 형제를 정죄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김양선은 “출옥성도의 독선주의와 교권주의자의 세속적 야망”이 장로교 제1차 분열을 가져온 것으로 기술한다.

김광수는 ‘출옥성도들의 독선적 신앙 고조’란 제목 아래에서 제36회 속회총회는 “출옥성도들을 여지없이 정죄하였다. 그러나 고신계열의 출옥성도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선신앙을 과시하면서 경남법통노회를 조직하였다”고 서술한다. 이것은 모두 역사왜곡이다.

‘독선적’이라는 용어는 신도군국주의 일제와 친일파 인사들이 순수한 한국교회 신앙인들에 대해 즐겨 사용하던 용어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항쟁자들에 대한 일제 취조문, 예심종결서 등은 이들이 ‘독선적 신앙’을 가졌고, 성경을 ‘독선적’으로 해석하면서 국체변혁(國體變革)을 도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양지방법원 검사가 작성한 신사참배거부운동자 ‘21명 예심종결서’는 이 같은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한상동, 이기선, 주남선을 비롯한 수진수난자들의 신앙이 ‘독선적’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사가들과 친일파 인사들은 광복 후에도 일제의 시각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아왔다. 그들의 역사평가 기준은 정당하고 타당한 외침을 그릇된 것으로 보는 일제의 시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정죄’, ‘독선’, ‘심판권 행사’, ‘율법주의’, ‘바리새주의’는 가치중립적인 용어가 아니다. 가치판단에는 기준이 있기 마련이다. 한국교회는 과거사 청산 문제, 고신파의 행보에 대한 역사평가를 하면서 진리성, 성경, 신앙고백, 교회의 규범을 기준 삼아 하지 않는다. 친일파의 당파적 시각으로, 힘의 논리로 파악한다.

그 결과로 출옥성도들의 과거사 청산, 참회고백의 필요성, 진정한 개혁교회의 재건에 대한 언급을 ‘독선신앙’을 가지고 형제를 ‘정죄’한 것으로 단정한다. 이러한 오류는 재판을 받아야 할 자가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자신을 판단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사 청산의 실패는 역사왜곡을 가져왔다.


6. 취소성명서 사건

장로교 총회(1954)가 고신파를 제거한 뒤에 과거사 청산 문제를 다루었지만 총회의 상층부를 차지한 친일파 인사들이 “누가 누구를 시벌하랴?”고 외치면서 방해하는 바람에 참회고백은 실패하고 말았다.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한 과거의 결의를 취소한다는 내용이 담긴 성명서 하나를 채택하는 것으로 종결지었다. 신사참배만 언급했지 ‘일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친일에 열성적이었던 일과 천인공노할 범죄와 행악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총회가 신사참배 결정을 취소한다고 하는 성명서를 채택한 것은 과거사를 단지 행정상의 실수(mistake)로만 여긴 결과이다. 성경, 신앙고백, 치리규범, 양심에 따르지 않았다. 단지 정치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한국교회가 일제치하에서 저지른 범죄와 행악은 행정상의 실수가 아니라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참회고백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이다. 과거의 결의를 단지 취소하기로 한 것은 죄상가죄(罪上加罪)이다. 다수보다 진리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한 판단이다.

‘취소성명서’는 신사참배를 한 것이 강압 때문이었다는 것을 강조하여 성명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법리적으로 말하자면 강압에 의한 범죄는 그 책임이 가해자에게만 있다. 이러한 시각은 친일파교회사관을 가진 한국교회사가들이 한계상황론, 삼엄한 공기론, 불가피론 등을 내세우면서 교회가 강압 정치의 피해자였고, 박해를 이기지 못해 친일행각을 한 것이며, 따라서 참회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취소성명서’는 일본기독교단이 1967년 부활절에 발표한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과 흡사하다. 이 고백문은 과거의 잘못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섭리로 돌림으로써 고백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의 섭리란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명제이다.

우리들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자가 자기의 행위를 하나님의 섭리로 돌리는 것은 사악한 발상이다. 일본기독교단이 자신의 행악을 하나님의 섭리로 돌려 자신의 황도기독교 정체성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을 표명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7. 주기철 목사복권 사건

예장통합 서울동노회가 주도한 ‘주기철 목사 복권’ 행사는 과거사 청산의 실패가 낳은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며, 한국교회의 삐뚤어진 역사인식과 친일파 전통에 대한 극명한 증거이다. 그것은 주기철을 중세기적 미신의 대상으로, 교권주의의 꼭두각시로 이용한 행사였다. 그를 떠받들고 있던 교회사적 의의의 버팀목을 빼 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은 (1)죽은 자를 교회의 치리(성자, 복자, 순교자 추대 등)의 대상으로 삼는 로마가톨릭교회관을 반영했다. (2)목사직을 작위로 보는 시각을 반영했다. (3)복권은 과거의 면직이 유효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면직한 것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보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4)평양노회가 면직시킨 것을 서울동노회가 복권시키는 것은 치리회의 질서에 어긋난다. (5)이 사건은 순교자를 상품화하여 자파의 정통성 확보와 위상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삼은 해프닝이다.

그 무렵 프랑스가톨릭교회는 나치치하에서 유태인 학살에 침묵했던 죄를 참회했고, 일본의 여러 교단들과 기독교 학교들은 한국교회에 가한 과거의 잘못에 대해 양심선언을 했다(졸저, <일본기독교의 양심선언>(2000)을 보라). 주기철 목사복권 사건은 철면피한 한국교회의 그릇된 역사인식과 친일파 전통의 현주소를 보여준 사건이다.


8.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역사날조

한국장로교 교단들은 총회 회수를 1912년에 모인 제1회 총회에서 시작하여 계산한다. 그러나 1912년에 설립된 한국 장로교단은 1943년에 해산되었다. 그러므로 광복 후 재건된 교단의 총회는 ‘후기 제1회’ 등으로 표기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생각된다. 고신교단이 첫 총회를 제1회로 시작한 것과 같이 말이다.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와 개신대학원대학교는 2002년에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다채롭게 가졌다. 음악회, 학술강연회, 동문회, 개교100년사 출간기념회 등을 가졌다. 1년 내내 행사가 진행됐다.

그러나 이 학교들이 100년의 역사를 가졌는가는 따져봐야 한다. 장신대학과 총신대학은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 학생들 절반가량을 데리고 가서 남산의 조선신궁 건물에서 시작한 장로회신학교(1948)로부터 시작되었다.

장로회신학교(평양)는 1938년에 신사참배 문제로 스스로 문을 닫았다. 그 학교와 1940년에 세워진 평양신학교는 무관한 학교이다.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와 개신대학원대학교가 100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1)이사회 (2)교수회 (3)교사(校舍) (4)학생회 (5)운영 주체 중 어느 하나라도 연결되면 일제의 강압과 민족적인 수난기를 넘기는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위 학교들이 설립 연대를 장로회신학교(1902)의 설립에서 시작하는 것은 장로교 총회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는 데 근거를 둔다. 총회가 1948년에 설립된 신학교의 역사를 장로회신학교(평양)를 계승하기로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장로회신학교(평양)는 한국장로교 총회가 운영한 학교가 아니다. 선교연합공의회가 운영했다. 장로교 총회가 최초로 직영한 신학교는 1940년에 세워진 평양신학교(일명 채필근신학교)이다. 그 학교를 운영하던 총회는 1943년에 해체되었다. 서울의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는 광복 후에 재조직된 남한의 장로교 총회가 운영하는 학교이다.

총회가 학교의 설립연도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권주의적 발상이다. 설립연도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총회가 학교의 설립연도를 결정할 수 있다고 보는 그 시각은 한국교회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친일파 전통의 한 단면이다.

장로회신학대학교는 자신의 역사를 평양신학교(채필근신학교)와 연계시킨다. 이 학교는 1950년에 폐교되었고, 이를 운영하던 장로교단은 1943년에 해체되었다. 이 교단과 1946년에 남한에서 새롭게 조직된 장로교단 사이에 공동체적 관련성은 있으나 법적인 연속성은 없다. 과거에 장로교회였던 교회들이 지역 노회를 재조직하고, 그 노회들이 다시 남부총회라고 하는 가설(假說) 총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공동체적인 관련성만으로는 학교라고 하는 법적기구의 연속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이족침략, 동족상잔의 전쟁이라는 삶의 상황을 고려해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와 서울의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연결시켜 1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역사 날조가 의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장신대학 70년사>와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를 대조하면 알 수 있다.

총신대학교는 여기에서 한 술 더 뜬다.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다채롭게, 성대히 가졌으며, <총신대학교 100년사>(2002)라는 방대한 책을 편찬 출간했다. 그런데 이 책은 평양신학교(채필근신학교)와 총신대학교가 무관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총신대학교가 장로회신학교(평양)에서 출발했지만, 그 역사에 친일, 우상숭배를 하던 ‘채필근신학교’의 역사를 포함시킬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학교가 2002년에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진 것은 모순이다. 책 제목은 <총신대학교 100년사>인데, 그 내용에서는 자신이 100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가 아니라고 서술한다. 과거사 청산 부재가 낳은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9. 주기철 복적 결의

장로회신학대학교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졸업생으로 여긴다. 교정에 주기철 순교기념비를 세워놓고 그가 이 학교의 졸업생이라고 부각시킨다. 주기철 목사가 졸업한 학교는 평양에 소재했고, 1938년에 폐교되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회는 주기철 목사의 복적을 만장일치로 결정한 바 있다. 이것은 10가지 이상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순교자를 자교의 위상향상과 정통성 확보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정에 있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 기념비의 비문은 이종성 박사가 썼다. 그는 주기철 목사의 순교와 저항을 가능하게 한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신바리새주의’, ‘근본주의’라고 매도해 왔다. 앞에서는 순교자를 상품화하여 자기 학교의 위상 향상의 수단으로 삼고 뒤에서는 그의 순교를 가능하게 한 신념체계를 근본주의, 바리새주의라고 지탄하고 폄하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10. 한신대학교의 역사날조

한신대학교(전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정하은 교수는 일제강점기의 순교자와 출옥성도들을 깎아내리며 그들이 피안적 신앙에 의해 희생된 자들이라고 지탄했다. 신학을 알아서 일제에 대항하여 투쟁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정통신학이라는 덧없는 신념체계로 말미암아 희생되었으며, 불나비가 불을 향해 겁도 없이 달려들 듯이 쓸모없는 희생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치 치하의 독일고백교회의 저항은 순교적 영웅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한국교회의 저항과 신앙투쟁은 극도로 폄하했다. 신앙승리자들에 대한 반감,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신대학교는 다섯 가지로 역사를 날조한다.

첫째, 조선신학교의 설립 목적이 “복음적 신앙에 기초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현 조선교회가 요구하는 건전한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함”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완전히 날조된 것이다. “충량유위한 황국의 교역자 양성”이 그 목적이었다.

둘째, “본교의 설립취지와 교육이상은 한국민족과 한국교회가 새 역사를 맞을 준비 작업으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신학교의 설립취지와 교육 이상은 충량유위한 황국의 교회사(敎悔師)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셋째, 한신대학교는 이사장 명단에서 진정률 장로(1948-1953)를 초대 이사장으로 내세운다. 문헌에 따르면 초대 이사장은 함태영 목사였고, 그 다음은 일본인 마쯔모토 다따오(松本卓夫)였다. 1943년경의 이사장은 일본인 무라야마 키요히꼬(村山淸彦)였다. 초대 이사장 다음으로, 2대에 걸쳐서 일본인들이 이사장을 역임했다.

넷째, 전직 교수 명단에서 일본인 교수들의 이름은 삭제해 버린다. 일본인 교수 미야우찌 아끼라(宮內彰), 전임강사 하나무라 요시오(花村芳夫), 무라기시 세이유(村岸淸洙), 야먀구찌 다로(山口太郞), 그리고 이사장이며 신약학 교수였던 마쯔모토 다따오(松本卓夫), 무라야마 키요히꼬(村山淸彦)의 이름을 싣지 않고 있다. 미야유찌 아키라 교수를 비롯한 일본인 전임 교수들의 이름을 빼버렸다. 미국인, 캐나다인 교수들의 이름은 포함시키면서 일본인들의 이름을 빼버린 까닭은 무엇인가?

다섯째, 이사진 구성에 대한 서술도 사실과 다르다. 1943년경에는 일본인 3명, 곧 무라야마 키요히꼬(이사장), 하나무라(花村美樹), 가나이에이 사부로(金井英三郞)와 한국인 4명(김영철, 조희염, 김종대, 함태영)이 이사였는데, 이사 명단에서 일본인들을 삭제했다.

한신대학교가 과거사를 솔직히 시인하고 참회하며 통절히 반성함으로써 역사를 바로 세우고 새로운 장을 열어가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은폐하고 날조한 것은 주기철을 비롯한 일제 말기의 신사참배거부자들이 정통주의 신학의 희생이었다고 비난한 김재준, 정하은의 궤변과 궤를 같이한다.

출옥성도들을 향하여 메이첸파니, 독선주의니, 독존적인 자기 영광을 과시한다느니 하면서 우물에 독 뿌리기 식 독설을 토한 것과 일치한다. 한신대학교가 자신의 역사에서 일본인들을 모조리 삭제하고, 이 학교가 민족 정체성을 지니고 출범한 것으로 서술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정조를 일제에게 갖다 바친 “창녀의 구차한 변명”이다.


출처  [특집 한국교회 수치의 과거사①②] “식민지 교회, 민족배신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