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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경찰 ‘공안몰이 수사’

경찰 ‘공안몰이 수사
5년전 출간된 시집 뒤늦게 문제 삼아… 해산되거나 사실상 와해된 단체인데…

“6·15 선언 실현” 주장한 자료집을 ‘북한 찬양·고무’ 근거 삼는 등
혐의 불분명한데도 압수수색부터... 공안당국의 ‘존재감 경쟁’ 지적

[한겨레] 허재현 박현철 기자 | 등록 : 2013.05.02 20:24 | 수정 : 2013.05.02 21:40


경찰이 사회운동단체 사무실과 활동가들의 집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잇달아 압수수색하고 있어 때아닌 공안몰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청년 통일운동 단체 ‘소풍’ 회원 신아무개(34·여)씨는 지난달 30일 아침 7시께 서울 마포구 자신의 빌라에서 여느 때처럼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남성이 “아랫집에 물이 샌다”며 찾아왔다. 신씨가 문을 열자 서울지방경찰청 보안2과 소속 경찰관들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소풍의 총회 자료집에 북한의 사상과 동일한 내용이 적혀 있다’ 등의 혐의 사실을 제시했다. 이날 다른 소풍 회원 10명의 집과 사무실도 압수수색당했고 이 단체 회장을 지낸 이준일 통합진보당 서울 중랑구 위원장은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청년단체 ‘이끌림’ 회원 김아무개(35)씨의 서울 성동구 집도 지난달 4일 서울경찰청 보안3과에서 압수수색했다. 경찰은 김씨가 한양대 내 이적단체의 배후라고 의심하고 있다. 경찰청 보안3과는 지난달 29일 민주노총 철도노동조합 내 모임인 한길자주노동자회 회원 6명의 집을 압수수색했다. ‘국가기간산업인 철도공사 내 이적 목적의 비합법적 조직을 결성해 종북세 확산을 꾀하는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점이 분명하다’는 이유에서다.

이밖에 서울경찰청 보안2과는 4월2일 통합진보당원 황선(38)씨의 집을, 경남지방경찰청 보안수사1대는 지난해 12월 경남 창원의 청년 통일운동 단체 ‘푸름’의 전·현직 대표 6명의 집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했다.

경찰이 4월을 전후해 집중적으로 공안 수사에 나서고 있지만, 수사 대상들이 받는 혐의는 비상식적이다. ‘소풍’의 경우 총회 자료집에 실린 강령에 북한을 찬양·고무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경찰은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자료집을 보면, 활동 방향으로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완전히 실현해 잘못된 민족사를 바로세우자’, ‘6·15정신은 애국애족의 이념 우리민족끼리의 정신이다’ 등의 내용이 적혀 있을 뿐이다. 경찰은 정부가 체결한 남북 합의를 이행하자는 주장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보는 셈이다.

경찰은 ‘이끌림’이 매년 여는 통일한마당 행사도 이적행위로 적시해 압수수색 영장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 행사는 ‘평화통일 염원 캠페인’이 주된 내용이다. 서울 성동구는 이 행사에 매년 250만원씩 예산을 지원한다.

황선씨는 2008년 출간한 시집을 경찰이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이라며 압수수색 영장을 제시했다고 전했다. 황씨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적표현물을 공개적으로 출판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황당해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는 ‘푸름’은 회원수 15명의 작은 단체인데, 경찰은 대법원이 2009년 이적단체로 판결한 ‘6·15 남북공동선언실천 청년학생연대’(실천연대)에 가입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실천연대는 2010년께 해산했고, ‘푸름’은 2011년 10월 발족했다. 경찰청이 수사중인 철도노조 한길자주노동자회는 지난해 통합진보당 내분 사태를 겪으며 사실상 와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민사회에선 경찰의 공안수사에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고 의심한다. 윤지애 국가보안법폐지연대 사무국장은 “수년 전 활동 내용들을 근거로 경찰이 동시에 수사에 나서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남북관계 긴장국면을 활용해 박근혜 정부가 진보단체들을 탄압하려는 것 아닌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공안당국의 ‘존재감 경쟁’ 측면이 크다는 지적도 나온다. 표창원 전 경찰대학 교수는 “국가정보원과 국군기무사령부도 대공 관련 수사를 하기 때문에 경찰 보안부서들은 늘 부서 존폐에 대한 위기감을 갖고 있다. 남북관계가 흔들리고 국정원도 흔들리고 있을 때 경찰 보안부서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지난해 대통령 선거로 못했던 수사를 하고 있는 것일 뿐, 2~3년 동안 계속 수사를 해 온 사안들이다”라고 설명했다.

경찰의 공안몰이를 그대로 방치하는 정부도 문제라는 목소리가 높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이광철 변호사는 “박근혜 정부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실현하려 한다면, ‘6·15 공동선언 실천’ 정도의 주장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사하는 것은 막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 경찰 ‘공안몰이 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