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일 낭인 칼에 시해돼 불태워졌다’ 그간의 정설 뒤집히나
‘명성황후, 을미사변 때 생존’ 서구 외교문서 발견
[경향신문] 김종목 기자 | 입력 : 2013-07-01 06:00:02 | 수정 : 2013-07-01 11:08:50
이번에 독일과 영국에서 발견된 외교문서는 명성황후가 을미사변 이후에도 비밀리에 생존했으며 사건 현장을 탈출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시해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국제정세의 거센 회오리 속에 놓여 있던 조선의 운명과 한반도 상황을 보여준다. 학계에서는 사료의 진실성을 검증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을미사변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 “생존… 러 공사관 피신 타진” 독 대사, 러 공사 말 인용 보고
을미사변 약 4개월 후에 작성
▲ “고종, 황후 생존 여부에 침묵” 영 공사의 다른 문건도 발견
오기나 일 역선전일 가능성도
■ 명성황후 살아 있었나?
“왕비가 살아 있고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어느 한국인으로부터 왕비의 공사관 피신을 비밀리에 요청받았다”는 내용의 라돌린 보고서는 1896년 2월6일 작성됐다. 독일제국 총리 쉴링스퓌르스트 호엔로에에게 보낸 비밀문서였다. 을미사변은 명성황후 시해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 건축기사 세레진 사바틴의 증언으로 러시아와 유럽에서도 보도가 된 상황이었다.
이 문서는 또 “로바노프는 일본군이 한국에 오래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이 한국에서 철군한 것처럼 일본군이 더 이상 한국에 주둔할 근거가 없다”고 적었다.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 통합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일본이 ‘청·일 양국 군대가 동시에 조선에서 철수한다’는 톈진조약(1885)을 따르지 않는 것을 지적한 말”이라며 “1896년 6월9일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모스크바 의정서)로 일본군의 한반도 철수가 실현된다”라고 말했다. 문서에는 독일황제 빌헬름 2세의 ‘잘 봤다(all right)’는 짧은 영어 메모가 쓰여 있다. 라돌린은 명성황후의 생존과 함께 영국 총리 솔즈베리의 대외정책, 불가리아 주재 러시아 공사에 관한 3개의 문서를 작성해 본국에 보냈다. 유럽상황에 덧붙여 명성황후 정보를 보고한것은 한반도 정치 상황에 관심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한편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도 수시로 명성황후 정보를 본국과 베이징에 보냈다. 아관파천 뒤 고종이 명성황후의 생존 여부에 침묵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는 명성황후 사망을 공식 발표했던 고종의 과거 행적과 배치된다.
■ 을미사변 직후 엇갈리는 진술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10월9~12일 나온 정보는 시해와 생존이 혼재돼 있다. 힐리어는 9일 명성황후가 피신했다고 베이징 주재 공사 오커너에게 보고했는데 오커너는 다음날 명성황후 사망 보고서를 영국 총리 솔즈베리에게 제출했다. 그는 11일 궁녀 등의 시해 증언을 담은 보고서를 오커너에게 보냈고, 12일 시해사건을 목격한 사바틴의 진술을 솔즈베리에게 보냈다. 서울 주재 독일 영사 페르디난드 크리엔은 10일 명성황후 실종 문서를 작성해 본국에 보고했다.
정 교수는 “라돌린과 힐리어 보고서는 사건 4개월 뒤라 더 정제된 정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문서의 등장인물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라돌린은 정보 출처가 고종, 명성황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러시아 외교부 장관 로바노프 로스토프스키라고 밝혔다. 정 교수는 “당시 독·러 관계를 고려할 때 로바노프가 확실한 근거 없이 명성황후 생존을 언급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생존 가능성 언급한 다른 보고서
명성황후 시해가 정설이 된 것은 베베르가 을미사변 직후 작성해 러시아에 보낸 ‘사건 경위 보고서(베베르 보고서)’의 영향이 크다. 명성황후가 칼에 맞아 숨진 뒤 불태워졌다는 사바틴의 증언이 당시 서구 언론에 보도되면서 시해가 기정사실화됐다. 그러나 ‘사바틴 증언’을 보고서에 첨부했던 베베르는 명성황후 생존 가능성도 함께 적었다. 2001년 말 KBS <역사스페셜>은 박종효 모스크바대 교수가 러시아 외교부에서 발굴한 ‘베베르 보고서’를 근거로 ‘긴급 입수! 러시아 비밀문서 명성황후 최후의 날’을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사바틴 증언을 토대로 시해에 무게를 뒀지만, 베베르가 숫자암호로 쓴 ‘아마 아직까지도 왕비가 생존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도 함께 보도했다.
‘베베르 보고서’에는 “새벽 4시반경 궁내에 소란이 있어 고종께 보고하고 ‘왕후는 어디 계시느냐’고 묻자 고종은 ‘벌써 대책을 세웠다. 왕후는 안전한 곳에 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는 시해 직전 상황에 관한 궁정경비대 부령 이학균의 보고서도 첨부됐다. 정 교수는 “사바틴의 증언에 밀려 생존 가능성은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다”고 했다.
■ 문서의 신뢰 여부
역사학자들은 이번 문서를 두고 여러 반응을 보였다.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는 “독일 문서에는 서울 외교가에 떠도는 소문이나 외교적 역선전이 많이 들어 있다”며 “명성황후가 시해 직후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돌았다. 임오군란 때도 죽었다던 명성황후가 51일 만에 살아 돌아온 게 그런 소문을 뒷받침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문서는 일본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퍼뜨린 역선전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외교가 풍문에 관한 새 자료 정도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명성황후 생존은 을미사변 뒤에 일어난 여러 사실을 보면 있기가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 외교문서가 신뢰성이 높다는 것은 수긍하지만, 라돌린 문서가 아관파천 즈음에 나온걸 보면 러시아 공사관 대피를 원한 사람이 왕비가 아니라 왕의 오기일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강상규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이 문서들을 뒷받침하는 여러 자료를 더 확보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발굴 자료가 소문일 수도 있지만 당시 독일은 의외로 중요한 국가였기 때문에 사료로서 연구하고 공부할 가치가 있다”며 “정설에 안주하지 않고 1차 사료를 토대로 치밀한 재검토 작업을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단독] ‘명성황후 일 낭인 칼에 시해돼 불태워졌다’ 그간의 정설 뒤집히나
‘명성황후, 을미사변 때 생존’ 서구 외교문서 발견
[경향신문] 김종목 기자 | 입력 : 2013-07-01 06:00:02 | 수정 : 2013-07-01 11:08:50
이번에 독일과 영국에서 발견된 외교문서는 명성황후가 을미사변 이후에도 비밀리에 생존했으며 사건 현장을 탈출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시해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국제정세의 거센 회오리 속에 놓여 있던 조선의 운명과 한반도 상황을 보여준다. 학계에서는 사료의 진실성을 검증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을미사변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 “생존… 러 공사관 피신 타진” 독 대사, 러 공사 말 인용 보고
을미사변 약 4개월 후에 작성
▲ “고종, 황후 생존 여부에 침묵” 영 공사의 다른 문건도 발견
오기나 일 역선전일 가능성도
▲ 1895년 10월8일 을미사변이 일어났던 경복궁 건청궁이 30일 활짝 열린 채 관람객을 맞고 있다. 경복궁 중건 이후 1884년부터 고종이 이곳에서 정무를 처리했으며 1887년 국내 최초로 전기가 가설됐다. 1909년 완전히 헐렸다가 2007년 복원됐다. | 서성일 기자 |
■ 명성황후 살아 있었나?
“왕비가 살아 있고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어느 한국인으로부터 왕비의 공사관 피신을 비밀리에 요청받았다”는 내용의 라돌린 보고서는 1896년 2월6일 작성됐다. 독일제국 총리 쉴링스퓌르스트 호엔로에에게 보낸 비밀문서였다. 을미사변은 명성황후 시해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 건축기사 세레진 사바틴의 증언으로 러시아와 유럽에서도 보도가 된 상황이었다.
이 문서는 또 “로바노프는 일본군이 한국에 오래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이 한국에서 철군한 것처럼 일본군이 더 이상 한국에 주둔할 근거가 없다”고 적었다.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 통합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일본이 ‘청·일 양국 군대가 동시에 조선에서 철수한다’는 톈진조약(1885)을 따르지 않는 것을 지적한 말”이라며 “1896년 6월9일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모스크바 의정서)로 일본군의 한반도 철수가 실현된다”라고 말했다. 문서에는 독일황제 빌헬름 2세의 ‘잘 봤다(all right)’는 짧은 영어 메모가 쓰여 있다. 라돌린은 명성황후의 생존과 함께 영국 총리 솔즈베리의 대외정책, 불가리아 주재 러시아 공사에 관한 3개의 문서를 작성해 본국에 보냈다. 유럽상황에 덧붙여 명성황후 정보를 보고한것은 한반도 정치 상황에 관심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한편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도 수시로 명성황후 정보를 본국과 베이징에 보냈다. 아관파천 뒤 고종이 명성황후의 생존 여부에 침묵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는 명성황후 사망을 공식 발표했던 고종의 과거 행적과 배치된다.
▲ 1896년 2월6일 러시아 주재 독일대사 후고 라돌린이 독일제국 총리 실링스퓌르스트 호엔로에 앞으로 보낸 비밀문서. “러시아 외교부 장관 로바노프가 자신의 정보에 따르면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한국의 왕비가 아직 살아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베베르)는 왕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한 명의 한국인으로부터 아주 비밀리에 요청받았다고 한다. 로바노프는 일본군이 한국에 오래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이 한국에서 철군한 것처럼 일본군도 더 이상 한국에 주둔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Fürst Lobanow sagt mir gesprachsweise, daß seinen Nachrichten zufolge die todt gesagte Konigin von Korea, noch lebt. Der russische Gesandte in Soul ware sogar von einem Koreaner geheimnißvoll gebeten worden, der Konigin Aufnahme in der russischen Gesandtschaft zu geben. Der Furst meint, daß die Japaner doch ziemlich saumselig in der Raumung von Korea seien. Ihr langeres Verbleiben deselbst hatte keinen Grund mehr da auch die Chinesen das Land geraumt hatten.)고 적혀 있다. |
▲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가 1986년 2월11일 아관파천 나흘 뒤인 2월15일 베이징 주재 영국 대리공사 뷰클럭에게 보낸 문서. “왕(고종)은 여전히 왕비(명성황후)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The King is still unable to say whether the Queen is alive or not.)고 적혀 있다. |
■ 을미사변 직후 엇갈리는 진술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10월9~12일 나온 정보는 시해와 생존이 혼재돼 있다. 힐리어는 9일 명성황후가 피신했다고 베이징 주재 공사 오커너에게 보고했는데 오커너는 다음날 명성황후 사망 보고서를 영국 총리 솔즈베리에게 제출했다. 그는 11일 궁녀 등의 시해 증언을 담은 보고서를 오커너에게 보냈고, 12일 시해사건을 목격한 사바틴의 진술을 솔즈베리에게 보냈다. 서울 주재 독일 영사 페르디난드 크리엔은 10일 명성황후 실종 문서를 작성해 본국에 보고했다.
정 교수는 “라돌린과 힐리어 보고서는 사건 4개월 뒤라 더 정제된 정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문서의 등장인물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라돌린은 정보 출처가 고종, 명성황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러시아 외교부 장관 로바노프 로스토프스키라고 밝혔다. 정 교수는 “당시 독·러 관계를 고려할 때 로바노프가 확실한 근거 없이 명성황후 생존을 언급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생존 가능성 언급한 다른 보고서
명성황후 시해가 정설이 된 것은 베베르가 을미사변 직후 작성해 러시아에 보낸 ‘사건 경위 보고서(베베르 보고서)’의 영향이 크다. 명성황후가 칼에 맞아 숨진 뒤 불태워졌다는 사바틴의 증언이 당시 서구 언론에 보도되면서 시해가 기정사실화됐다. 그러나 ‘사바틴 증언’을 보고서에 첨부했던 베베르는 명성황후 생존 가능성도 함께 적었다. 2001년 말 KBS <역사스페셜>은 박종효 모스크바대 교수가 러시아 외교부에서 발굴한 ‘베베르 보고서’를 근거로 ‘긴급 입수! 러시아 비밀문서 명성황후 최후의 날’을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사바틴 증언을 토대로 시해에 무게를 뒀지만, 베베르가 숫자암호로 쓴 ‘아마 아직까지도 왕비가 생존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도 함께 보도했다.
‘베베르 보고서’에는 “새벽 4시반경 궁내에 소란이 있어 고종께 보고하고 ‘왕후는 어디 계시느냐’고 묻자 고종은 ‘벌써 대책을 세웠다. 왕후는 안전한 곳에 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는 시해 직전 상황에 관한 궁정경비대 부령 이학균의 보고서도 첨부됐다. 정 교수는 “사바틴의 증언에 밀려 생존 가능성은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다”고 했다.
■ 문서의 신뢰 여부
역사학자들은 이번 문서를 두고 여러 반응을 보였다.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는 “독일 문서에는 서울 외교가에 떠도는 소문이나 외교적 역선전이 많이 들어 있다”며 “명성황후가 시해 직후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돌았다. 임오군란 때도 죽었다던 명성황후가 51일 만에 살아 돌아온 게 그런 소문을 뒷받침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문서는 일본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퍼뜨린 역선전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외교가 풍문에 관한 새 자료 정도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명성황후 생존은 을미사변 뒤에 일어난 여러 사실을 보면 있기가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 외교문서가 신뢰성이 높다는 것은 수긍하지만, 라돌린 문서가 아관파천 즈음에 나온걸 보면 러시아 공사관 대피를 원한 사람이 왕비가 아니라 왕의 오기일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강상규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이 문서들을 뒷받침하는 여러 자료를 더 확보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발굴 자료가 소문일 수도 있지만 당시 독일은 의외로 중요한 국가였기 때문에 사료로서 연구하고 공부할 가치가 있다”며 “정설에 안주하지 않고 1차 사료를 토대로 치밀한 재검토 작업을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단독] ‘명성황후 일 낭인 칼에 시해돼 불태워졌다’ 그간의 정설 뒤집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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