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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귀태’ 표현 어디서 나왔나?

‘귀태’ 표현 어디서 나왔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책에 등장
‘만주국 한·일 인맥’을 부정적 비유

[한겨레] 한승동 기자 | 등록 : 2013.07.12 15:41 | 수정 : 2013.07.12 21:12


▲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변인의 ‘귀태’ 발언은 지난해 우리나라에 번역된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책과함께)에 등장한다. 원래 이 책의 제목은 ‘대일본 만주제국의 유산’이다. 일본 고단사의 역사 시리즈물 ‘흥망의 세계사’ 18권으로 2010년에 출간됐는데, 재일동포인 강상중 세이가쿠인대 교수와 현무암 홋카이도대 대학원 준교수가 함께 썼다.

만주국은 1931년 일제 관동군이 류탸오후(유조호) 폭파사건을 날조해 만주침략(만주사변)을 본격화한 다음해에 세운 괴뢰국가다. 1945년 8월 해체된 만주국이 남긴 유산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바로 박정희(1917~1979)와 기시 노부스케(1896~1987), 그리고 그들이 만든 전후 일본과 대한민국이라는 게 이 책 내용이다. 바꿔 말하면 전후 한·일의 원류가 만주국이라는 얘기다.

이 책에는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변인이 얘기한 ‘귀태(鬼胎)’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제1장 ‘제국의 귀태들’, 제2장 4절 ‘만주가 낳은 귀태들’, 제3장 ‘만주제국과 제국의 귀태들’, 제4장 1절 ‘되살아나는 귀태들’, 6절 ‘귀태들의 한일 유착’ 등 제목만 봐도 그렇다. 제1장 1절 ‘바다를 뛰어넘는 만주 인맥’에 박정희가 쿠데타 직후 만주 인맥을 지렛목 삼아 도쿄에 가서 미일 안보조약 개정·강화 뒤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자민당을 만들고 키운 실세였던 기시 노부스케를 만나 환대를 받은 내용이 나온다. 거기 등장하는 “‘제국의 귀태’라고까지 불러야 마땅할 이런 만주 인맥 ‘동창회’”라는 구절에 붙인 각주에서 귀태를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의 국민작가로 불렸던) 시바 료타로의 조어다. 의학적으로는 융모막 조직이 포도송이 모양으로 이상증식하는 ‘포도상 귀태’를 뜻하지만, ‘태어나서는 안 될, 사위스러운, 불길한’ 같은 부정적 뉘앙스가 강한 말이다.”

경북 문경에서 훈도(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박정희가 죽음으로써 일제와 천황을 받들겠다고 맹세하는 비장한 혈서를 신징(지금의 창춘)에 있던 만주군관학교에 보낸 건 1939년 초. 그게 유별났던지 <만주신문>(1939년 3월31일치)은 ‘혈서로 군관(장교) 지원’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그 덕인지 그는 결국 그 학교에 들어갔다.

“만주국은 내가 그린 작품”이라고 호언했던 기시는 그때 만주국 총무청 차장이었다. 총무청 장관은 최고위직인 국무원 총리 바로 아랫자리지만 만주인들 몫으로 준 총리는 실권이 없는 자리여서 사실상 최고실세였다. 그 밑에서 실무를 장악하고 있던 기시가 만주국이 자기 작품이라고 큰소리친 건 허언이 아니었다. 기시는 그때 만주국을 군부 엘리트와 관료, 닛산과 같은 일본 재벌이 지배하는 철저한 중앙통제형 개발독재체제의 실험실로 만들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식의 계획경제, 수출 주도, 농촌진흥, 중화학공업 육성 등 전후 일본과 한국의 압축적 정치·관료 주도 성장전략과 한국의 새마을운동, 국기에 대한 맹세, 애국조회, 군사교육, 충효교육, 국민교육 헌장, 퇴폐풍조 단속, 반상회, 고도 국방 체제를 위한 총력안보 체제 따위의 통제장치들이 모두 만주국 실험을 거친 것들이었다.

▲ 왼쪽부터 박정희, 기시 노부스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는 그런 만주국의 등장 과정과 실체, 그것이 전후 일본과 한국 국가전략에 끼친 영향, 그리고 그 중심에 섰던 한·일간 주요 인맥들을 분석한다. 거기서 포착해낸 핵심적인 특징은 연속성이다. 연속성은 한국과 일본의 체제와 사람(인맥) 사이, 그리고 각각의 전전·전후 사이에 시공간 종횡으로 관철된다. 말하자면 전쟁 전 일제와 전후 일본이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고, 그 지배세력이 다르지 않으며, 한국 또한 그것과 닮은꼴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양자관계 역시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겉모습은 달라졌을지 모르나 본질상 단절되지 않은 연속체와 같다는 얘기다.

기시의 외손자가 지금 일본 총리 아베 신조고, 박정희의 딸이 한국 대통령이다. ‘귀태’를 얘기했을 때 홍 의원은 아마도 그 부정적 연속성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기시가 총무청 차장을 할 무렵 도조 히데키는 관동군 헌병대사령관에서 참모장으로, 이어서 육군 차관, 대신으로 승승장구했다. 박정희가 만주에 간 1940년 2월께 기시는 상공차관이 되고 이어 들어선 도조 내각의 상공대신으로, 국무상, 군수차관으로 출세해 전쟁 수행에 앞장선다. 따라서 기시와 박정희는 만주에선 직접 만나지 못했다.

만주군관학교 예과 졸업식 때 푸이한테서 금시곗줄을 받은 우등생 박정희는 1941년에 이름을 ‘다카기 마사오’로 바꿨고 그 다음해엔 더욱 일본색 짙은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꿔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편입한다. 우등 졸업 뒤 관동군 견습사관이 되고 1944년 7월에는 만주국군 보병 8사단에 배속됐다가 그해 12월 소위로 임관됐으며 1945년 7월에 중위로 진급한다. 그들의 주요 임무가 조선인 항일독립운동세력 박멸이었다.

하지만 일제 패전과 함께 기시와 박정희는 물없는 물고기 신세로 전락한다. 기시는 에이(A)급 전범이 돼 3년간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 갇힌다. 박정희도 무장해제당한 패잔병이 됐다. 그들을 살린 건 일제 패전 뒤 일본과 남한을 점령한 미국과 냉전, 그리고 만주 인맥이었다. 기시는 도조 등 에이급 전범 7명이 교수형을 당한 바로 다음날 전격 석방돼 1957년 총리 자리에까지 오른다. 기시를 살린 것은 나중에 외상이 되고 한일협정 때 일본 대표로 활약하는 그의 평생 부하 시나 에쓰사부로, 기시의 친동생으로 역대 최장수 총리가 되는 사토 에이사쿠 등과 미국이었다. 일본군 박정희를 한국군으로 세탁하고 군 좌익숙청 때 남로당원으로 처형당할 뻔한 그를 살린 것도 백선엽, 정일권, 김창룡, 이선근, 김정렴 등의 만주 인맥, 그들과 손잡은 미국이었다.

‘쇼와의 요괴’ 또는 ‘수괴’로 불린 기시는 그 뒤 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 직후 물러날 때까지의 약 3년 동안의 총리 재직기간을 포함한 7년여의 길지 않은 시간에 미국의 뜻대로 전후 일본정치의 방향을 정한 보수합동 체제(55년 체제)를 만들었고, 미국 의존 안보체제를 굳혔으며, 일본 고도성장의 기본틀을 짜, 만주 봉천 총영사관보 출신인 요시다 시게루 정권 이후의 일본국가 진로를 결정했다. 한일국교정상화와 한국 경제개발에는 이를 자국 안보문제와 관련한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접근한 기시와 그 주변에 형성된 일본 육사와 만주군관학교 또는 만주국 관료 출신의 만주 인맥이 깊숙이 개입했다.


출처 :‘귀태’ 표현 어디서 나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