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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광복 70주년 기획

[우리는 과연 해방됐는가] (5) 경제 - 경성방직에서 삼성 스마트폰까지

[우리는 과연 해방됐는가] (5)
경제 - 경성방직에서 삼성 스마트폰까지

일제와 결탁한 조선 자본가들
해방 후 ‘태생적 습성’ 못 버려
정권 협력 대가로 지원 받아
외환위기 후 시장지상주의로
국가권력 의존 벗어났지만
‘힘’에 의존한 경영 여전
힘든 일은 하청업체가 하고
수익은 대기업이 챙기는 구조
일감 몰아주는 정부 책임 커

[경향신문] 김지환 기자 | 입력 : 2015-01-30 21:53:01 | 수정 : 2015-01-30 22:55:07


▲ 일제강점기 서울 영등포 경성방직 공장에서 여공들이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높다란 담으로 둘러싸인 방직공장은 여공들에게 감옥에 비유되곤 했다. 1960~1970년대 ‘한강의 기적’의 이면에는 일제 때부터 굳어진 저임금과 노동력에 대한 행정적 통제가 자리 잡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서울시 제공

“대기업들은 기업가 정신으로 새로운 사업영역을 개척하기보다 손쉽게 돈 버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아요. 중소기업이 고생해서 기술 개발을 하면 비슷한 특허를 내거나 대규모 유통망을 앞세워 기술을 헐값에 가로채는 일도 비일비재하고요. 그러다보니 중소기업도 자체 기술 개발보다 인맥을 만들어 대기업에 줄을 대려고만 하는 거죠.”

경기 안산에서 10년째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ㄱ대표(48)는 ‘기업가 정신’을 묻는 질문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대기업에서의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시각장애인용 고주파 유도기 국산화에 힘쓰고 있다.

그는 대기업들이 건전한 기업가 정신보다 ‘갑질 횡포’에 익숙해진 데는 정부의 책임도 크다고 했다. 공공기관이 세부 공정별로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과 직접 계약해도 되는데 책임 소재 때문에 ‘안전한’ 대기업에 일감을 몰아주고 다단계 하도급으로 공사를 하는 관행이 굳어졌다는 것이다. 재하도급이 이뤄질 때마다 공사비는 20~30%씩 떨어지고 하도급 구조 아래쪽 업체는 단가를 맞추기 위해 낮은 가격의 자재·물품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대기업은 감독과 페이퍼워크(서류작업)만 할 뿐 정작 힘든 일은 하청업체에서 다 한다”며 “하지만 수익은 대기업이 가장 많이 가져가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그는 “얼마 전에 의정부에 있는 대기업이 불러서 안산에서 1시간30분 넘게 차를 타고 간 적이 있다”면서 “하루 종일 문 밖에 기다리게 하더니 고작 10분 만나서 정부에 제출할 서류작업을 지시하고는 돌아가라고 하더라”며 씁쓸해했다.

이처럼 관(官)과 유착해 손쉽게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책임은 회피하는 대기업 행태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대표적인 한국학 연구자인 카터 J 에커트 하버드대 교수는 1991년 경성방직의 성장사를 분석한 <제국의 후예>에서 국가 주도의 압축 성장을 꾀한 박정희 정권 시절과 일제 때 조선총독부 권력을 등에 업은 조선 자본가들 간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 아래서 진행된 근 20년간의 급속한 공업화 과정을 돌아보면 식민지 시기 역사 유산의 ‘기시감’을 떨쳐버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1919년 10월 5일 오후. 서울의 요릿집 명월관에서 열린 경성방직 창립 주주총회엔 130명의 주주들(혹은 대리인들)이 참석했다. 지주 자본가인 고창 김씨 집안이 면방직 공업 자본가로 출발하는 순간이었다. 25만엔의 납입자본과 100대의 직기로 시작한 경방은 1945년 1050만엔의 납입자본금과 1080대의 직기를 갖춘 기업으로 성장했다. 만주에도 비슷한 규모의 공장이 있었고 오사카, 베이징, 중국 중앙 내륙에도 사무소를 운영했다. 이 같은 고속성장의 배경에는 경방과 총독부가 설립한 식산은행 간 인적 연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경방 초대 사장인 박영효는 식산은행 이사회의 창립 일원이었고, 김연수는 식산은행 자회사인 조선신탁주식회사 감사로 참여했다. 저렴한 노동력을 쉽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1926년과 1931년 경방에서 파업이 벌어졌지만 일제 경찰력은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1944년 경성방직에 입사한 민석기옹(91)의 증언은 당시 감옥생활과 같은 공장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땐 회사에선 열여섯~스무 살 사이의 여자를 시골에 가서 전부 뽑아 왔다고. 아침 6시에 식당 가서 (아침밥을) 먹죠. 무조건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 아주 혹사시켰지. 그때 잘 먹지도 못한 애들을 말이야.”(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구술자료집 <영등포 공장지대의 25시>)

일제와 협력하며 성장을 꾀한 조선 자본가는 경방뿐만이 아니다. 오미일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는 지난해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에서 민영휘 일가의 축재 과정에 주목했다. 양민을 수탈해 재산을 모아 ‘반도 유일의 부호’로 불린 민영휘는 1915년 한일은행장이 되면서 경제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3남 민규식은 1933년 가족 재산 관리와 증식을 목적으로 영보합명회사를, 2남 민대식은 1935년 계성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영보합명은 일제 국책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간척과 토지개량 사업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10년 만에 자산을 4배 가까이 불렸다. 오 교수는 “민씨 일가가 특혜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경제정책에 부응해 시기별로 토지 개량과 산미증식, 군수기업 경영과 투자에 앞장섰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일제강점기에 관과 결탁해 성장한 한국 자본가들의 경험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물론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국 자본가의 연속성을 찾으려는 시도에 선을 긋는 시각도 있다. 오 교수는 “식민지 시기 경제활동이 해방 이후까지 연계된 경성방직은 특수한 사례”라며 “특히 중화학공업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 몫이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연속성이 단절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관과의 유착 속에서 형성된 퇴행적 자본가의 모습을 과거의 일로만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장진호 광주과학기술원 교수는 <한국 재벌과 ‘무책임의 경제’>에서 “식민지의 ‘종속적 자본가’로서 국가기구에 대한 유착과 부역,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국가기구를 동원한 폭력적 노동쟁의 억압은 국내 재벌들의 무책임에 각인된 태생적 습성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시기별로 보면 해방 이후 일제가 물러간 뒤 국내 기업들이 손쉽게 사업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배경은 헐값에 이뤄진 ‘적산(일제 재산) 불하’였다. 이승만 정권 시기에는 재벌이 단순히 정치권에 정치자금을 준 대가로 특혜적 외환과 수입 허가를 얻는 방식으로 거래를 했다. 하지만 1950년대 말부터 미국의 원조가 줄면서 원조에 의존하는 방식은 지속가능하지 않게 됐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재벌은 정부의 경제정책 목표에 협력하는 대가로 외자를 배정받고 저리의 정책자금을 지속적으로 공급받게 된다.

에커트 교수는 “1960년대 급속히 공업을 키우는 경제계획을 발진하기로 결정했을 때, 박정희 정권은 노련한 기업가들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다”며 “그 중 많은 기업가들이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초반의 급속한 공업 성장 속에서 단련된 자들이었다”고 했다. 일제 이후에도 재벌은 오랫동안 정치권력의 입맛을 맞춰주고 순응함으로써 생존과 성장을 도모하는 데 익숙해져 갔다는 것이다.

1970~1980년대까지 유지돼온 관과 대기업의 이 같은 종속적 유착관계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90년대 말 찾아온 외환위기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시장지상주의가 득세하면서 재벌은 정부의 하위 파트너가 아니라 되레 정부를 압도한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은 이런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기업이 국가권력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건전한 경쟁보다 힘에 의존한 식민지 시절 기업 경영의 부정적 유산은 아직도 변형된 형태로 남아 있다. 2012년 불거진 재벌의 골목상권 침해 논란이 대표적 사례다. 재벌 3세들이 계열사 간 지원성 거래를 통해 안전하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업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가 최근 스마트폰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도 기업가 정신 실종 탓이라는 분석이 있다. 유철규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자본주의 기업 성장 논리의 문제점과 비정규직 문제>에서 “삼성전자의 성장을 끌고 온 TV, 반도체, 디스플레이의 경우 삼성전자가 스스로 개척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인사팀의 한 실무자도 “외국에서 신제품이 나오면 6개월 만에 원제품의 성능을 120% 개량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의 가장 큰 장점이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의 확보가 삼성의 가장 큰 도전적 과제”라고 털어놨다.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삼성을 ‘카피캣(모방자)’이라고 비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전 세계 연간 특허순위 3~4위를 다투는 삼성전자 출원 특허의 대다수는 제품 특허가 아닌 생산공정 관련 특허다.

LG전자의 한 관계자도 “한국 기업이 원천기술을 독점한 일본 기업과 맞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힘은 중학교만 나온 노동자도 30분만 교육받으면 완벽하게 제품 생산이 가능할 정도로 생산기술을 표준·단순화시킨 데 있다”고 말했다.

해방 후 70년, ‘재벌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기업들의 덩치와 권력은 커졌지만 저임 노동력에 기초한 ‘손쉬운 성장’에 대한 유혹과 습성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결국 애덤 스미스의 ‘공정한 경쟁’과 케인스가 말한 ‘진취적인 기업가 정신’은 아직 우리 재벌에 요원한 과제인 셈이다.


출처  [광복 70주년 기획 - 우리는 과연 해방됐는가] 권력 유착·노동 착취로 ‘손쉬운 성장’… 기업가 정신,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