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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박근혜가 ‘공포정치’에 집착하는 이유

박근혜가 ‘공포정치’에 집착하는 이유
김태형의 심리로 본 세상
[민중의소리]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 최종업데이트 2016-02-28 14:59:47


지난 대선 과정에서 상당수의 국민은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면 유신독재가 부활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반면에 ‘설마 그런 일까지 생기겠느냐?’라고 의문을 표시한 국민도 있었다. 오늘의 현실은 전자의 우려가 옳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 억압, 언론통제와 여론조작, 집회 및 시위에 대한 폭력적 진압, 최근의 테러방지법 강행까지 현 정부는 유신독재를 부활시키는 방향으로 줄달음쳐왔다.

현 정부가 단순히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막는 데서 그치지 않고 유신독재의 부활을 향해 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박근혜를 수반으로 하는 한국의 극우 보수세력이,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숱한 위기를 타개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방도를 공포정치에서 찾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공포정치를 부활시켜야만 한다는 심리적인 초조감과 절박감이 이들의 목을 조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한국의 극우 보수가 자초한 것이라고 해야 옳은데, 그 원인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점점 집권이 어려워지는 극우보수세력

첫째, 시대착오적인 극우 보수세력의 영구집권 야욕. 시대가 바뀌면 정치도 바뀌어야 한다.

인류역사를 돌이켜볼 때, 새 시대에 부합되는 자기혁신에 성공한 정치세력만이 살아남았음을 알 수 있다. 시대는 변했는데, 과거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회집단을 시대착오적인 집단이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극우 보수세력은 명백한 시대착오적 정치세력이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추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민주정치가 아닌 독재정치를, 자주와 자립이 아닌 사대와 의존을, 평화와 통일이 아닌 전쟁과 흡수통일을, 탈냉전이 아닌 냉전을 고집하고 있다.

역사가 전진함에 따라 시대착오적 정치세력은 결국 도태되기 마련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극우 보수세력이 경제민주화와 같은 국민을 기만하는 거짓공약, 국정원을 동원한 불법선거와 관권선거, 박근혜 후보의 노인세대 득표력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에도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승리했다.

이것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한국에서 시대착오적인 정치세력의 집권이 더욱 어려워질 것을 의미한다. 시간은 극우 보수세력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다음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처럼 특정한 세대의 표를 싹쓸이할 수 있는 후보를 내세우지 못한다면 또 지난 대선을 훨씬 능가하는 불법, 부정선거를 자행하지 않는다면 재집권이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극우 보수세력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공포정치밖에 없지 않을까?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의원들이 23일 오후 국회 로텐더홀 계단에서 결의대회를 열고 테러방지법 처리를 막기 위해 무제한토론 필리버스터를 사용한 더불어민주당을 규탄하고 있다. ⓒ양지웅 기자



무능해도 선거 이기니 괜찮아?

둘째, 국가위기를 자초하는 극우 보수세력의 무능.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 등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듯이 현 정권은, 최소한의 위기대처 능력이나 국가운영 능력조차 갖추고 있지 못한, 최악의 무능정권이다.

한국의 극우 보수세력이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무능해진 가장 큰 원인은 색깔론을 악용해 정치해온 사정과 관련이 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무능한 보수세력은 야당의 공세는 물론이고 국민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 이들이 나름대로 유능해지려고 노력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색깔론으로 야당과 국민을 제압할 수 있기에 한국의 극우 보수세력은 제아무리 무능해도 선거에서는 이길 수 있다. ‘무능해도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극우 보수가 유능해지려는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국가운영은 점점 더 높은 능력을 요구하고 있는데, 한국의 극우 보수는 무능하다.

이런 괴리 때문에 이들은 국가적 비전은커녕 사건이 터지면 그것을 수습하느라 쩔쩔매는 임기응변식의 국가운영을 하고 있다.

사건·사고가 나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거짓말이나 궤변을 늘어놓고, 어려움이 닥치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즉흥적 대응을 하거나 상대방을 종북으로 몰고, 소통 대신 공갈과 협박만 일삼는 정치행태가 이를 잘 보여준다.

권력을 잡은 집단이 정상적인 정치활동 혹은 국가운영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무능하다면 민심이반과 통치위기를 피할 수 없다.

놀라울 정도로 무능하지만, 권력은 놓기 싫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식한 박정희식 공포정치와 독재국가가 떠오르지 않을까?


‘아버지의 최후’가 남긴 트라우마

셋째, 박근혜의 아버지 트라우마.

박근혜의 아버지 트라우마는 한둘이 아니지만, 여기에서는 한 가지만 언급하겠다.

삶, 특히 삶의 마지막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를 둔 자식들은 ‘나도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까?’ 혹은 ‘나도 아버지와 같은 최후를 맞이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40대에 요절한 부모를 둔 자식들이 40대가 되자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심리적, 육체적인 어려움을 겪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두려움에서 해방되려면, 치열한 노력을 통해 부모가 남겨준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사고로 요절한 아버지로 인해 ‘나도 아버지처럼 쓰러지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가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했고, 고생을 많이 했는지는 그의 자서전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아무튼, 상처를 치유하지 않아서이겠지만,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 박근혜는 ‘나도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여전히 붙잡혀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버지의 삶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여 정통성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박정희는 언론을 통제하고 중앙정보부를 앞세우는 공작정치를 했다.

부정선거로 권력을 장악한 그의 딸 역시 언론을 통제하고, 공작정치를 본격화하기 위해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박정희는 공작정치만으로는 위기를 수습할 수 없게 되자 군대를 동원하여 공포정치를 강행했다.

그의 딸은 테러방지법이 반대에 부딪히자 화를 내고 있는데, 만일 하고자 하는 일이 마음 먹은 대로 풀리지 않으면 아버지처럼 군대를 동원하고픈 충동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하늘 같이 떠받들던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군해버리자 극심한 두려움과 미국에 대한 불신감에 휩싸여 독자적인 핵무장을 추진한다.

박정희의 딸은 북의 핵 문제를 빌미로 사드 배치까지 허용하면서 미국에 올인했지만 미국은 막후에서 북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도 아버지처럼 미국에게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두려움과 미국에 대한 불신감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게 될까?

이런 점에서 얼마 전 박근혜가 공식 석상에서 ‘베트남 패망’을 언급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 궁정동 안가 만찬장의 박정희 저격 현장을 재연하고 있는 김재규 ⓒ1980 보도사진연감


아버지의 삶과 최후를 되풀이할지도 모른다는 박근혜의 두려움은 국민적 비판이나 저항이 심해질수록 더 커지기 마련이다.

더불어 자기를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불신병이나 의심병도 날이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과연 박근혜는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적어도 분명한 것은 그녀가 아버지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공포정치는 필연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한국에서 극우 보수세력이 집권하고 있는 한 공포정치는 필연이다.

이들은 공포정치가 아니고서는 정권을 유지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정치세력이고, 공포정치가 아니고서는 국가운영조차 할 수 없는 무능한 정치집단이며, 아버지 트라우마로 인해 공포정치가 있어야 하는 지도자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잠깐은 공포정치로 국민적 저항을 잠재울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공포정치는 거대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유신독재와 신군부독재를 매장했고, 공포정치에서 해방되었던 민주정부 시기를 경험했다.

이런 한국인들을 공포정치로 지배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앞으로의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다.


출처  [김태형의 심리로 본 세상] 박근혜가 ‘공포정치’에 집착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