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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도망가란 신호였는데... 남자는 결국 학살됐다

도망가란 신호였는데... 남자는 결국 학살됐다
충북 보도연맹원 사건 희생자 이웅찬의 66년 전 그날
[오마이뉴스] 글: 박만순, 편집: 최유진 | 16.07.09 09:11 | 최종 업데이트 16.07.09 14:32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경은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수감 재소자 등을 불법으로 학살했다. 충북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됐다. 특히 청주, 청원,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낭성면 호정리 도장골, 남일면 두산리 지경골, 오창초등학교 곳곳에 민간인 유해들이 묻혀 있다. 아래 글은 당시 희생된 '이웅찬'의 가족과 지인들을 인터뷰 해 희생 직전 상황과 그에 대한 기억을 엮은 글이다.  [편집자말]

사원증 사원신분증 ⓒ 박만순

66년 전인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며칠 후. 충북지역 보도연맹원들이 경찰서와 지서의 소집연락을 받았다. 이웅찬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그해 7월 7일, 이웅찬은 수동 육군병원 뒤편에 있던 자취방에서 앰프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방송에서는 "보도연맹원들은 청주상과대학으로 모이라"는 목소리가 반복되었다. 점심을 먹은 후 청주상과대학 운동장으로 간 그는 잠시 후 청주경찰서 무덕전으로 이송되었다. 무덕전은 경찰들의 체력 단련장으로, 주로 유도를 배우던 곳이다. 무덕전에는 수 백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있었고, 이웅찬이 아는 얼굴도 더러 있었다.

평소 그를 알고 있던 경찰이 형사들과 수군거렸다. 좌익활동과는 무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웅찬이 자네, 담배 좀 사 갖고 오게!"라며 담배 값을 주었다. 사복형사와 이야기를 나눈 경찰은 상업학교 축구부 출신인 이웅찬을 알아보고 그를 살려 줄 셈으로 담배 심부름을 시킨 것이다. '내놓고 도망가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알아서 도망가겠지'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눈치를 채지 못한 그는 담배를 사 들고 다시 무덕전을 찾았다. 자신이 특별히 지은 죄도 없고, 죽으러 끌려 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낮엔 화물기사, 밤엔 청주상과대학생

경찰은 돌아온 그에게 다시 심부름을 시켰다. "왜 이렇게 빨리 왔냐? 천천히 사 와라. 다른 볼 일도 있으면 보고 오라. 친구도 만나고 오라"고 이야기 했으나, 순진한 이웅찬은 번번히 무덕전으로 돌아 왔다. 이렇게 한 것이 세 번이나 되었고, 결국 그는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미원·보은 방향으로 끌려가 학살되었다.

66년 전 그날, 그렇게 끌려간 그는 여태 돌아오지 않고, 가족들의 가슴 속은 새카맣게 타기만 했다. 당시 4살이던 꼬마 이능원은 칠순 노인이 되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길 기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의 손에는 아버지의 체취가 남아 있는 사원증이 들려 있었다. 1949년에 만들어진 '사원신분증'은 이웅찬이 충북화물자동차회사(사장 손해광) 직원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능원(청주시 사창동)은 자신의 아버지가 전형적인 주경야독형의 인물이었음을 회고한다. "아버지는 낮에는 충북화물에서 기사로 일하셨고, 밤에는 청주상과대학에서 공부를 하셨죠", "축구선수로도 유명해서 충북 도내 뿐만 아니라 전국을 다니며 시합 했다"고 한다.

당시 청원군 북일면 주중리가 고향이었던 그는 수동에서 여동생과 자취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고향에서는 아내가 시부모와 시조부모를 층층시하로 모시고 있었다. 이렇게 평범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던 그가 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끌려갔을까?


"민청에 가입하라고 해 도장 찍은 게 그 이유여"

▲ 증언자 이성원옹 ⓒ 박만순

한산 이씨의 종친회 일을 수 십 년간 보아 온 이성원옹(89·청주시 내덕동)은 이웅찬의 2년 후배다.

"그 사람 참 고지식했어", "경찰들이 살려줄려고, 그렇게 눈치를 줬어도 고지식하게 무덕전으로 갔으니 말여..."

음성 맹동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던 이성원은 자신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경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느 날 초등학교 선배인 최재황이가 민청(民靑)에 가입하라고 하대. 그때 민청 가입서에 도장 찍은 것이 후일 보도연맹에 자동적으로 가입한 계기가 된 거여."

이웅찬이 보도연맹에 가입한 경위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이성원옹은 옛 청원군 북일면 주중리(현재의 청주시 주중동) 사람 대부분이 자신과 같은 경로로 보도연맹에 가입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뭔 빨갱이 짓을 하다 죽었으면 원이라도 없지. 애먼 사람만 죽었어. 똘똘한 사람은 그때 다 죽었지."

민청에 가입했던 그는 삐라를 뿌린 적도 없고, 시위에 참가한 적도 없다고 한다. 민청에 가입한 후에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서청(西北靑年會) 놈들 때문에 아무런 활동도 못했지. 걸리면 그 놈들한테 맞아 죽는데"라며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해방 후 건국의 도상에서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던 단체에 가입했으나, 특별한 정치활동을 하지도 못한 청·장년들이 빨갱이로 규정되면서, 사상전향을 강요당했다. 이런 곡절을 겪으며 보도연맹에 가입한 젊은이들이 6.25가 나자 북한군에 협력할 수 있다는 혐의만으로 집단학살된 것이다.


아버지가 생각나는 날

▲ 증언자 이능원 씨 ⓒ 박만순

장마가 지속되면서 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몸도 마음도 축 쳐지는 날씨이다. 당시 4살이었던 이능원은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뚜렷히 기억한다.

"아버지가 시골인 주중리에 오면 항상 아버지의 품에 있었고, 청주로 가실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학살된 후 집안은 풍비박산 되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굴레는 평생을 옥죄었다. 과거사법 개정을 통해, 이능원씨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 주는 것이 현재를 사는 대한민국 시민들의 과제다.


출처  도망가란 신호였는데... 남자는 결국 학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