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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박종철이 떠난 지 30년, 권력은 더 뻔뻔해졌다

박종철이 떠난 지 30년, 권력은 더 뻔뻔해졌다
나의 젊은 벗 박종철을 추모함
[오마이뉴스] 글: 유병순, 편집: 박정훈 | 17.01.14 10:43 | 최종 업데이트 : 17.01.14 10:43


글쓴이 유병순씨는 대학 시절 박종철 열사와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으며, 이후 한동안 노동운동에 몸담았다. 현재는 미국에서 컴퓨터 보안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편집자말]

▲ 지난 13일 오전 경남 양산 성전암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의 30주기 추도식에서 어머니 정차순(85)씨가 아들의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 정민규

안양 어느 변두리 단칸 셋방, 힘겨운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가까이하기 위해 찾아갔던 선한 친구 박종철. 무릎을 맞대고 우리 삶의 미래를 함께 잠시 얘기했던 그때를 다시 생각하며...

1987년 1월 15일 한 석간신문, 전날 경찰의 조사를 받던 대학생이 쇼크사했다는 기사가 사회면 중간에 2단으로 짤막하게 걸렸다. 수백 명을 총칼로 학살하고 들어선 정권이었지만, 반독재 운동가들이 체포되면 권력기관들로부터 무자비하게 고문을 받는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인 시대였지만, 그래도 이 사건은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박종철의 죽음... 시민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앳된 대학생의 시신이 너무도 시퍼렇게 폭력의 증거물이 되어 드러났다는 생생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거기서 시작된 의문과 폭로와 분노의 불길은 얼마나 커지고 어디서 끝날지 아무도 몰랐다. 이 사건도 여느 의문스런 죽음과 공공연한 고문 사건들처럼, 그렇게 짓뭉개고 넘어갈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몰랐다.

사람이 죽지 않을 정도만큼의 고통을 주는 고문을 하는 데 많은 경험을 쌓은 고문 전문가들. 물고문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욕조가 설치된 밀실. 그런 밀실들이 들어찬 서울 시내 한복판의 건물을 버젓이 공식적인 시설로 운영하는 경찰. 그 죽음은 우발적인 사고도 아니었고, 어디 뒤에 숨어 몰래 벌인 일탈도 아니었다.

이 거대한 폭력의 체제. 누가 그런 권력을 허락했던가? 이것은 박종철이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발가벗겨진 몸뚱아리 하나로 그 거대한 악의 체제에 맞서, 결국에는 장엄한 죽음으로 그 치부를 우리 모두의 면전에 그대로 던져 보인 사건이었다.

용기있는 증언들이 진실을 하나하나 드러내었다. 우발적인 사고와 소수의 일탈로 묻어버리려던 추악한 은폐와 축소의 뒷모습까지도 폭로되었다. 알 만한 사람은 익히 추정할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사건의 전말이 그렇게 하나씩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찌르는 처절한 물음을 계속 마주해야 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국가 권력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은 무엇인가?

▲ 7백여 명의 서울대 학생들이 경찰의 조사를 받다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의 영정을 앞세우고 학내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정태원

사람들은 박종철이라는 젊은이의 죽음이 던진 도전을 외면하지 않았고, 더 이상 침묵하지도 않았으며, 더 이상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그 마구잡이 폭력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그해 여름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은 나라의 정체성을 새로 써내려가고 있었다.

이어진 개헌. 그 헌법이 담고 있는 새로운 문구는 대통령 직선제를 표현하는 것이었으나, 그 가장 큰 의미는 국가기관에 위임된 권력, 즉 합법적인 폭력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물론 유신의 헌법도, 쿠데타와 학살로 집권한 권력의 헌법조차도 고문을 허락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현실적인 의미도 힘도 없는 것들이었다. 반면 1987년에 이루어진 개헌은, 국회에서 정해진 문구 이전에 바로 그 뜨거운 거리 위에 써 내려진 것이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막강한 권력의 국가 기관이, 그 힘을 행사할 때는 정해진 절차와 감시를 통해 제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 가장 중요한 정신의 하나였다.


철저히 농락당하는 87년 헌법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고문을 위해 고안되어 운영되는 경찰 시설물은 없어졌다. 이제는 영장도 없이 누군가를 어두운 골목길에서 납치하듯 체포해가는 일은 없어졌다. 이제는 아무런 근거도 법원의 허락도 없이 경찰이 누군가를 불법으로 감금하는 일은 없어졌다. 고문은 공식적으로 없어졌다. 아니, 정말 없어졌는가? 이 나라에서는 더 이상 막강한 국가권력이 권력자의 임의대로 제한없이 개인을 침범하는 일은 정말 없어졌는가?

불행하게도 오늘 돌아보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현실은 그냥 뻔뻔해졌을 뿐이다. 밀실에 숨어 몰래 행하는 고문이 아니라, 뻔히 목숨을 위협할 만한 타격을 줄 것을 알면서도 물대포를 쏘아대며 그것을 공식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고문과 그것은 과연 무엇이 다른가? 공공연한 권력의 살인행위. 시위대를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

▲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2015년 11월 14일 오후, 서울 종로1가 종로구청입구 사거리에 설치된 경찰 차벽앞에서 69세 농민 백남기씨가 강한 수압으로 발사한 경찰 물대포를 맞은 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이희훈

그러나 책임자의 처벌은커녕 아무도 위법 행위여부로 기소조차도 되지 않았다. 경찰의 그러한 행위가 합법이라면, 바로 1987년에 우리가 만든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다. 경찰의 행위가 불법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도 그 누구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있고, 헌법은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 기관의 엄청난 힘은 반드시 정해진 절차와 감시에 의해 통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통제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국가 기관이 국민 개인을 상대할 때, 특히 그 개인의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일을 하게 될 때 국가 기관은 그 편의나 효율성을 기준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개인이 어떤 숭고한 뜻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냐, 평범하고 힘없는 사람이냐, 범죄자이냐, 어린 아이냐, 그 어떤 사람이냐에 관계없이 그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특히 경찰과 같은 공권력이 개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를 하게 될 때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정도의 절제가 지켜져야 한다.

지난 수십년 동안 그나마 조금씩 쌓아온 국가를 운영하는 절차와 규칙들이 권력자의 '임의의 강압'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 힘겹게 조금씩 폭로되고 있다. 고문으로 죽은 사람은 없을지언정, 그 외에 그 어떤 정해진 절차와 제한들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지 모든 것이 의심되고 있다.

절차와 공적인 약속에서 합당함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 국가 권력의 겉모습과 현실에서의 실질적 기만은, 세월호 참사라는 통한의 비극에도 닿아 있다. 아이들은 멀쩡해보이는 배 안에서, 그럴듯한 안내 방송을 믿으며, 당연한 것으로 기대하는 구조의 손길만을 기다리다 숨져갔다.

▲ "가만히 있으라" 2014년 5월 3일오후 서울 청계천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침몰사고 희생자 추모와 실종자 무사귀환을 위한 국민촛불 집회에 한 참가자가 세월호 선내 방송을 뜻하는 '가만히 있으라' 손피켓과 국화꽃을 들고 있다. ⓒ 이희훈

완전히 새로운 세대의 이 순결한 영혼들은 그저 형식적으로 갖추어진 국가의 책임에 철저히 기만당했다. 한 세대의 실패를 다음 세대가 온전히 그 처절한 죽음으로 증언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한 세대를 건너 다시 나라의 정체성을 가르는 질문을 마주하고 있다. 다시 모두 고개를 들어 수십년 만에 한 고비를 넘는 이 도전에 응답해야 한다.

나는 충분히 대답하고 있는가?


출처  박종철이 떠난 지 30년, 권력은 더 뻔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