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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김제 가족간첩단 사건' 34년 만에 뒤늦은 무죄

‘김제 가족간첩단 사건’ 34년 만에 뒤늦은 무죄
피고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경향신문] 허진무 기자 | 입력 : 2017.06.29 17:09:00 | 수정 : 2017.06.29 19:13:05


▲ 법원이 29일 ‘김제 가족간첩단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자 피고인 최을호씨의 아들 최원일씨와 고문치유단체인 진실의힘 송소연 이사가 눈물을 흘리며 끌어안고 있다. 진실의힘 제공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피고인들은 무죄입니다”

서울중앙지법 제23형사부는 이른바 ‘김제 가족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사형을 당한 고 최을호씨와 징역 9년을 복역한 고 최낙전씨에 대해 29일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앞서 2014년 7월 유가족 측은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지난해 9월 30일 재심이 결정됐다.

김제 가족간첩단 사건은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2년 8월 전북 김제에서 농사를 짓던 최을호씨가 16년 전 북한에 나포됐다 돌아온 뒤 조카인 최낙전·최낙교씨를 간첩으로 포섭해 국가기밀을 수집해 북한에 보고하는 등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이들은 고문조작의 상징적 장소였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기술자’로 불리던 이근안 경감에게 40여일 동안 고문을 당했다. 또한 그해 10월 서울지검 공안부 정형근 검사(전 한나라당 국회의원·현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에게 넘겨져 수사를 받았다.

1983년 3월 1심 재판부는 최을호씨에게 사형, 최낙전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항소와 상고는 차례로 기각됐다. 최낙교씨는 1982년 12월 검찰 조사를 받던 도중 구치소에서 사망해 공소기각 처분됐다. 당시 검찰은 자살이라고 발표했지만 유가족은 아직도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최을호씨는 서대문구치소에서 복역하다 1985년 10월 31일 사형당했다. 최낙전씨는 9년을 복역한 뒤에도 보안관찰에 시달리다 석방된 지 4개월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날 법정에는 세상을 떠난 피고인들을 대신해 그 아들들이 섰다. 무죄가 선고되자 유가족들은 법정 방청석에서 박수를 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재판부는 여러 자료와 증언을 살펴보면 당시 수사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가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고 고문에 의한 경찰 진술조서와 검찰 피의자신문조서는 최씨 등이 간첩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최낙전씨의 아들 최원일씨는 “참 아픈 기억은 아버지가 잘못했으니까 감옥에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라며 “가족마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던 시대였으니 간첩으로 조작된 아버지의 고통이 어땠을지 가슴이 찢어진다”고 말했다.

사건 조사와 유가족 지원을 맡았던 고문치유단체 ‘진실의힘’은 이날 성명을 내고 “이들의 죽음은 당시 경찰과 검찰이 어떻게 서로 동조하고 묵인하면서 평범한 일가족을 간첩으로 만들었는지를 보여준다”고 밝혔다.

이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검찰은 재심 무죄 판결에 대해 형식적인 항소·상고로 일관해 무죄판결을 지연시켜 왔다. 정의의 지연은 그 자체로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가중시켰다. 진정으로 국가가 용서를 구하려면 검찰은 항소를 포기해야 한다”라고 비판했다.

진실의힘은 또한 “재심에서 다수의 피해자가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고문조작에 개입한 수사관과 검사 등 어느 한 사람 처벌받지 않았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가는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새 정부의 결단을 촉구한다”고 요구했다.


■ [전문] 故 최을호씨 아들 최봉준씨 최후진술
“집안은 멸문지화 당해”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최을호씨 아들 최봉준입니다. 1986년 10월 서대문구치소에서 사형집행을 당하신 아버지를 대신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1982년 8월,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우리 집안은 가족들끼리 사이가 돈독했고, 서로 아껴주며 사촌이든 오촌이든 다들 형제자매와 다를 바 없이 자랐습니다.

제 부친은 폐가 좋지 않아서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계셔야 했습니다. 그런 빈자리를 낙전, 낙교 형님이 대신해서 어른 노릇을 해주셨고 우리 형제자매들도 잘 따르고 그랬습니다.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가까이 지내는 우리 집안을 참 많이 부러워했고, 저는 늘 든든했습니다.

병석에 누워있던 아버지가 끌려가시고 낙전 낙교 형님마저 끌려갔습니다. 세 분은 신문과 방송에 ‘간첩’이 되어서 나타났습니다. 느닷없는 일이었죠. 그때는 반공이 제일로 중요한 때였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집안의 어른 세 분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도 충격일 텐데, 심지어 ‘간첩’이라고 나왔으니 우리 집안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문은 발이 빠른 것 같았습니다. 온갖 이야기들이 동네에 춤추고 다녔고, 그럴수록 우리 집안은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간첩’ 발표의 충격은 뒤이어질 충격에 비하면 좀 나은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있던 어른들은 서대문구치소로 옮겨갔습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른 채 두려움과 공포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낙교 형님의 죽음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구치소에서는 자살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왜, 어떻게, 그리 가실 수 있는가. 지금도 이 의문은 지워지지 않은 채입니다.

그리고 1986년 10월, 서대문구치소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버지 시신을 인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형을 집행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마지막 가는 길을 우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면, 그 전에 아버지를 만나게라도 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자식들 7남매를 남겨놓은 채 홀로 사형장에 끌려가시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숨이 턱 막힐 뿐입니다.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억울하셨을까, 눈이라도 감으셨을지, 우리 자식들은 가슴 저 밑바닥에 무거운 돌덩이를 지고 살아왔습니다.

1991년 5월 출소한 낙전 형님의 죽음도 억울하기만 합니다. 25년 전이었습니다. 낙전 형님이 출소하시고 그 해 추석 명절에 고향에 갔습니다. 그 때 낙전 형님께서 큰 집 대청마루에 앉아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나는 산 지옥을 경험했다”면서 남영동에서 이근안한테 고문이란 고문은 다 당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춧가루 물고문, 전기고문, 다리 사이에 막대기 넣고 앉혀 피 안통하게 하기, 잠 안재우기 고문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힘든 고문은 잠 안재우기 고문이었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잠을 못자게 했는지, 고통이 너무 심했다고 했습니다. 거기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곳이었다며 모르고 한 번은 당했는데 알고 두 번을 갈 수 없는 곳이라며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형님은 호랑이가 가장 무서운 줄 알았는데,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없는 일도 있게 만들어서, ‘간첩’으로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형님은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도 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전히 무서움과 두려움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뒤로 한 달이 지나고 하나님 곁으로 가시고 말았습니다.

판사님. 우리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저희는 살아남았지만, 어른 세분이 한꺼번에 다 사라지셨고, 자녀들을 뿔뿔이 흩어졌으며, 고향 마을에서는 따가운 눈초리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아버지와 단란한 정도 나눠보지 못한 저희들은, 아버지의 나이가 된 지금도 ‘아버지’라는 말만 나와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생전 병석에 누워계시던 아버지가 간첩일 수가 없다는 사실은 우리 동네사람 누구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억울하다는 말씀 한 마디 제대로 못하시고 형장의 이슬이 되셨을 아버지, 서글픈 시대를 만나 제대로 살지 못하시고 하나님 곁으로 가신 형님들. 지금이라도 법원이 당신들은 죄가 없소라고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고향 집 뒷산에 있는 선산에 누워계시는 아버님과 형님 묘에 상석을 세우고 대리석으로 묘를 다듬어드렸습니다.저희 자녀들이 아버님들 묘소에 무죄라는 판결이 적힌 판결문을 올리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현명한 판결을 부탁드립니다. 고향 마을에도 떳떳하게 내려가 동네 어르신들에게 인사도 드리고 기쁜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만을 기다려봅니다. 감사합니다.

■ [전문] 故 최낙전씨 아들 최원일씨 최후진술
“표현하기 힘든 가슴 저미는 고통”

저는 최낙전의 아들 최원일입니다. 최낙교는 저의 큰 아버지고, 최을호는 제 오촌 당숙의 아버지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작은 할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는 이 법정에 서계셨을 겁니다. 고문으로 망가진 육신과 공포에 짓눌린 마음으로 말입니다. 큰 아버지는 법정에서 ‘간첩’이라 판결 받기 싫으셨는지, 구치소에서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저는, 고문으로 육신이 망가지지는 않았지만, 공포에 짓눌리지는 않았지만, 세 분 모두 사라지고 없는 이 자리에 말로다 표현하기 힘든 비통함을 안고 서 있습니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그리고 작은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신 여러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재심을 받아주신 판사님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제 고향은 전북 김제 진봉면 고사리입니다. 우리 집 뒤로는 산과 바다, 앞으로는 드넓은 평야(논)가 펼쳐진 정말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입니다. 저는 큰아들로서 온갖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자랐습니다. 지금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을만큼 제 평생의 전성기였고,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행복한 시간은 1982년 8월,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모두 부서졌습니다. 아버지, 큰아버지, 그리고 작은할아버지가 한꺼번에 어디론가 끌려가셨던 그 때, 제 어릴 적 기억은 그 시간에 멈춰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차가운 아픔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한참 뒤에야 ‘간첩’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뒤로 어머니와 우리 가족들의 고통스런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원치 않은 이별, 제가 제일 존경하고 사랑했던 아버지와 영문도 모르는 이별. 철창을 사이에 둔 채 연습했던 말도 다 못하고 돌아서야 했던 짧은 면회시간. 홀로 농사일 하시면서 죽도록 고생하신 어머니. ‘간첩 자식’이 되어 한없이 지옥 속을 헤매야 했던 젊은 시절.

참 아픈 기억은 아버지가 잘못했으니까 감옥에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 아버지 용서해달라는 탄원서도 썼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간첩’이라고 발표했으니 그걸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지요. 가족마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시대였으니 자신도 모르게 ‘간첩’으로 조작된 아버지의 고통이 어떠하셨을까, 가슴이 찢어집니다. 더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갑작스런 큰아버지의 죽음은 저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또한 그렇게 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제가 이럴진대 사촌인 득록형과 정록형의 고통은 어떠했을까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가슴 저미는 고통입니다.

아버지가 출소하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다시 예전처럼 우리 가족의 안정과 행복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1991년 5월. 드디어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오랜 세월 격리되었던 탓인지 변해버린 모든 환경들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주무시다가도 신음소리와 함께 벌떡벌떡 일어나셨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진저리를 치셨지만 어떻게 도울 방법도 힘도 없었습니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동네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이었습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아버지는 마을의 발전을 선도해온 분이셨고, 누구나 아버지를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던 동네 어른들이 아버지를 ‘간첩’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경찰의 감시는 동네사람들의 그런 의심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경찰은 아버지에게 일거수일투족을 신고하라고 했고, 우리 집을 다녀갔습니다. 그것을 본 동네사람들은 아버지를 간첩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말하지 못하고, 홀로 삭이며 고통스러워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지금까지 잊히지 않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임종을 못봤습니다. 어떻게 장례식을 치뤘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26년이 지났지만 그저 아플 뿐이지요. 아마 제 마음은 아직도 아버지를 보내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판사님, 저는 아직도 궁금할 뿐입니다.

왜 작은할아버지께서 사형을 당해야만 했을까요? 왜 큰 아버지께서 차가운 구치소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어야 했을까요? 왜 우리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요? 왜 국가는 이 모든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우리 가족들에게 던져 주었는지요? 판사님, 이제 판사님께서 대답해 주실 것을 간절히 호소합니다.

얼마 전, 재심을 준비하던 중에 고향 진봉면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많이 변했어도, 우리 집터, 우리가 놀던 골목들은 여전했습니다.

골목에서 만났던 마을 어르신 한 분이 우리를 보더니 말씀하시더군요. “야, 너희 모두 다들 아버지를 빼 닮았구나. 이제 너희들이 커서 아버지 원한과 억울함 갚으러 왔느냐”며 낙교 아들, 낙전이 아들, 을호씨 아들을 다 맞추셨습니다.

아버지와 큰아버지, 작은 할아버지가 간첩사건에 휘말리면서 사실 진봉 마을의 공동체도 부셔졌을 겁니다. 세 분의 죽음은 온 마을 전체를 비통함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부디 이번 재심이 제 고향 마을 어른들께 드리는 진혼곡이 되었으면 합니다. 말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단독] '김제 가족간첩단 사건' 34년 만에 뒤늦은 무죄…피고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