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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 “차명계좌 실명전환 대상 아니다” 이후 이건희 돈 빼가

금융위 “차명계좌 실명전환 대상 아니다” 이후 이건희 돈 빼가
이건희 차명비자금 면죄부
금융위 법해석 근거는
1997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관련, 대법 전원합의체 ‘보충의견’ 인용
1998년 삼정호텔 차명계좌 사건, ‘소득세·과징금 정당’ 대법 판결 배제
‘180도 달라진’ 금융위 해석
2008년 발간 실명제 법령·예규엔, ‘삼정호텔 사건 판례’ 5번째로 명시
노태우 사건은 수록도 안하고선 2009년 “과징금 대상 아니다” 공식화
법조계, 금융위 판단에 갸우뚱
“대법 판례는 차명계좌=실명전환 대상, 금융위 주장 따르면 ‘실명제 판결’ 모순”
박용진 의원 “구속력없는 의견 내세워 ‘실명전환 의무 없다’ 면죄부는 잘못”

[한겨레] 이순혁 기자 | 등록 : 2017-10-16 05:00 | 수정 : 2017-10-16 14:53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008년 4월 4일 오후 서울 한남동 조준웅 삼성 특검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차명계좌는 비실명자산이 아니기 때문에, 금융실명제에 따른 실명전환 대상이 아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차명계좌에 면죄부를 준 금융당국의 논리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차명도 누군가의 실명이기 때문에 비실명자산이 아니고, 따라서 실명전환 대상도 아니란 얘기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비리나 불법과 연관된 비자금을 막는다는 취지로 도입된 금융실명제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금융실명제를 담당하는 주무부처가 이런 주장을 펴게 된 근거는 뭘까?


금융위, 대법판결 근거로 “실명전환 대상 아냐”

15일 차명계좌가 금융실명제법에 따른 실명전환 적용 대상인지를 묻는 박용진 의원(더불어민주당)의 질의에 대한 금융위원회 답변 자료를 보면, 금융위는 “이른바 ‘차명거래에 의한 기존 금융자산이라도, 그 명의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등에 따른 실명(주민등록표상 명의)이라면 이는 기존 비실명자산에 속하지 아니하여 실명전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대법원의 판결 내용”이라며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다.

금융위가 근거로 든 판결은 1997년 4월 17일 선고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판결(96도3377)이다. 이 판결은 비자금 관련 사건이어서 금융실명제 관련 쟁점이 포함돼 있다. 당시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은 노씨의 손아래 동서로 정권 실력자였던 금진호 의원의 제안에 따라 ‘노태우 비자금’ 가운데 362억 원을 자신 명의로 실명전환했다. 검찰은 두 사람을 금융기관의 금융실명제 관련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했는데, 1심에서는 유죄가 선고됐다.

하지만 항소심에 이어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정귀호)는 8 대 5로 무죄를 선고했다. “금융기관의 업무는 실명전환 청구자가 주민등록표상의 명의 등 실명인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뿐 그가 금융자산의 실질적인 권리자인지의 여부를 조사·확인하는 것까지는 그 업무가 아니다”라는 이유에서였다. 재벌이 실명전환한 게 알고 보니 대통령 비자금이었는데, 금융기관에서 그것까지 확인할 수는 없지 않냐는 얘기였다. 제3의 돈 주인을 확인하는 것이 금융기관의 업무가 아닌 만큼, 이들의 업무방해 혐의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여기에 다수 쪽 대법관 2명(김형선·송진훈)은 보충의견을 개진하면서 ‘차명거래라도 명의가 실명이라면 비실명자산이 아니고 실명전환 대상이 아니다’라고 밝힌다. 이 내용이 금융위가 답변 자료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1998년 대법 판결에선 차명계좌에 8천만원 원천징수

하지만 해당 판결이 나온 이듬해, 차명계좌는 당연히 실명전환 대상이라는 대법원 판결(1998.8.21 선고 98다12027)도 있었다. 서울 강남의 삼정호텔 박선득 사장은 1989년 아들 명의로 개설한 차명계좌에 2억 원을 예금했는데, 1993년 8월 12일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가 실시된다. 당시 정부는 두 달 안에 실명전환하지 않으면 최고 90%의 이자소득세와 과징금 등을 부과하도록 했는데, 박씨는 이 기한을 넘겼다. 조흥은행은 이듬해 3월 그간 이자소득세 5200만 원과 자산가액의 10%인 과징금 2900만 원을 더한 8100만 원가량을 원천징수했고, 박씨는 이에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1996년 7월 금융실명제 규정에 따른 적법한 일처리였다며 조흥은행 손을 들어준다.

항소심 재판부도 1998년 2월 “비실명거래(가명거래뿐만 아니라 이 사건과 같은 차명거래도 포함된다)임이 확인된 금융자산에 대하여는 금융기관으로서는 그 지급에 바로 응하여서는 아니되며 이를 실명전환하고 그에 따른 과징금 및 이자소득세를 원천징수한 후 지급할 의무가 있다”며 항소를 기각한다. 이어 대법원 2부도 “가명에 의한 거래는 물론 거래자 자신이 아닌 타인의 실명에 의한 거래는 ‘거래자의 실명에 의한 금융거래’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조흥은행 손을 들어줬다. 박씨는 8000만 원이 넘는 돈을 원천징수당한 데 이어, 3차례 재판 모두에서 자신은 물론 상대편 변호사 비용까지 부담해야 했다.



상당수 법조인도 금융위 판단에 고개 갸웃

차명계좌가 실명전환 의무가 있는지를 두고 서로 엇갈리는 듯한 두 판결이 있는데, 금융위는 전원합의체 판결을 근거로 “차명계좌는 실명전환 대상이 아니다”라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하지만 상당수 법조인들은 금융위 유권해석을 수긍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두 사건 판결문을 검토한 서울 한 법원 부장판사는 “전원합의체 판결은 타인(노태우)의 비자금을 자기(정태수) 명의로 실명전환한 사건에서, 금융기관이 비자금의 실제 권리자(노태우)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업무까지 한다고 볼 수는 없다며 업무방해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것이고, 두번째 판결은 민사판결의 일반적인 법리로서 타인 명의 계좌는 실명전환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이라며 “누군가의 이름을 빌린 차명계좌는 당연히 실명전환 대상(이란 게 대법원 판례)”이라고 말했다. 차명계좌 일반에 대한 법 해석은 두번째 판결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금융위 해석대로 전원합의체 판결이 차명계좌 일반에 관한 기준이 된다면, 그 뒤에 내려진 박씨 사건 항소심과 상고심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대법원이 전원합의체를 열어 ‘차명계좌는 실명전환 의무가 없다’고 선언했는데, 1년도 안 돼 고법과 대법원 소부가 아무렇지도 않게 정반대 판결을 내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박씨 사건 재판부의 주심인 정귀호 대법관은 전원합의체의 주심이기도 하고, 재판장(김형선 대법관)은 ‘차명계좌는 비실명자산이 아니어서 실명전환 의무가 없다’는 보충의견을 쓴 이다. 전원합의체 판결을 주도한 다수파 대법관들도 차명계좌 일반의 실명전환 의무는 당연하다고 본 것이란 얘기다.

게다가 금융위가 인용한 전원합의체 판결의 문구는 보충의견의 한 대목일 뿐이다. 한 장관급 법조인은 “보충의견이란 게 다수의견을 뒷받침하는 것이지만, 다수 쪽 대법관들이 지지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보충의견을 대법원 판결이라고 인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박용진 의원도 “금융위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대법원 판결 보충의견을 근거로 차명계좌임이 이미 밝혀진 경우에도 실명전환의 의무가 없다고 의견을 제출했는데,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금융위 주장대로라면 금융실명제가 아니라, 차명거래촉진제로 이름을 바꿔야 할 판”이라고 지적했다.



2008~2009년 사이에 달라진 금융당국 해석

금융실명제 관할 주무부처인 금융위도 차명계좌가 실명전환 대상이라는 두번째 판례를 모르고 있지 않았다. 금융위가 2008년 8월 펴낸 ‘금융실명제 종합편람-법령·예규편’을 보면, 관련 대법원 판례 9개 가운데 박씨 판결을 다섯번째로 기재하고 있다. 반면에 금융위가 차명계좌 면죄부의 근거로 삼은 전원합의체 판결은 수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1년 뒤인 2009년 경제개혁연대가 금융위에 이건희 차명계좌의 원천징수 여부에 관해 질의하자, 금융위는 원천징수는 없었다며 “가명이나 허명이 아닌 주민등록표상의 실명으로 개설된 계좌로서 실명전환의 대상에 해당하지 않아 과징금 부과 대상이 아니다”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이번에 박용진 의원에게 답변한 차명계좌 면죄부 논리와 동일한 내용이다.

결국 금융당국이 2008~2009년을 거치는 사이, 차명계좌에 관한 판례 해석과 유권해석이 180도로 달라졌다는 추정이 나온다. 그렇다면 왜 이때 차명계좌에 대한 판단을 바꾼 것일까? 2008년 삼성 차명계좌의 명의변경과 관련된 것은 아닌지 규명이 필요해 보인다. 금융위가 차명계좌에 관한 견해를 바꾸면서 많게는 조 단위로 추정되는 과징금과 소득세가 부과되지 않고 이 회장에게 온전히 돌려주게 됐기 때문이다.


출처  [단독] 금융위 “차명계좌 실명전환 대상 아니다” 이후 이건희 돈 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