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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5·18 망언과 징계쇼…YS의 진노가 두렵지 아니한가

5·18 망언과 징계쇼…YS의 진노가 두렵지 아니한가
김영삼 회고록 “심화가 솟아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1983년 5·18 광주 3주년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
“맺힌 한(恨)은 민족의 가슴에 영원한 멍울이 될 것”
“문민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 연장선 위에 서 있어”

토착왜구당 의원총회 당적 제명 어려울 듯
국회 윤리특위-본회의 의원직 제명도 난망
김현철 씨, “정통 개혁보수 정당 출현 기원”
토착왜구당 분열 및 정계개편 불씨 될 수도

[한겨레] 성한용 선임기자 | 등록 : 2019-02-17 14:35 | 수정 : 2019-02-17 15:14


▲ 지난 8일 국회에서 열린 ‘5·18 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북한 개입 여부를 중심으로’에서 발표자로 나선 지만원이 인사하고 있다. 이날 공청회는 토착왜구당의 김진태·이종명 의원이 공동주최했다. 김경호 선임기자

토착왜구당 의원들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왜곡·비하 파장이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의 ‘망언’이 나온 것은 2월 8일이었습니다. 그 뒤 진화에 나선 나경원 원내대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존재할 수 있다”는 발언,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의 “토착왜구당은 다양한 의견이 제기될 수 있는 정당”이라는 발언이 오히려 더 크게 불을 질렀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토착왜구당의 김무성 의원, 무소속 서청원 의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씨의 반응이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김영삼 전 대통령의 후계를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알고 계시겠지만 세 사람의 글을 소개합니다. 이미 읽어 보신 분은 건너뛰시기 바랍니다.

김무성 2월 11일 오후 2:27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입장문>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며 역사적 평가와 기록이 완성된 진실입니다.

5·18은 그 당시 민주주의를 위한 시위와 신군부의 과잉진압 등이 교차하면서 상황을 악화시킴에 따라 발생했던 우리 역사의 아픔이자 비극이었습니다.

5·18의 희생은 이 땅의 민주주의를 키우고 꽃을 피우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故 김영삼 대통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널리 알리고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1983년 5·18 3주년을 시점으로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전개한 바 있습니다.

5·18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인사들이 1984년 5·18 4주년을 맞춰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했고 저도 여기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헌법 개정이 이뤄지고 민주화가 완성됐습니다.

역사는 사실입니다. 소설이 아닙니다.

지금 일부 인사는 39년 전 일어난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전혀 근거도 없는 ‘북한군 600명 침투설’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황당무계한 주장을 입증하는 어떤 증거도 갖고 있지 못하면서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습니다.

북한군 침투설이 사실이라면 법정에서 역사적 단죄를 당한 신군부 세력들이 적극 반박하고 나섰거나 군 차원에서 적극 대응에 나섰겠지만, 지금까지 그러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만큼 북한군 침투설을 계속 제기하는 것은 이 땅의 민주화 세력과 보수 애국세력을 조롱거리고 만들고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우리 국군을 크게 모독하는 일입니다.

역사적 평가가 끝난 5·18을 부정하는 것은 의견 표출이 아니라 역사 왜곡이자 금도를 넘어서는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토착왜구당 일부 의원의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발언은 크게 잘못됐습니다.

앞서간 민주화 영령들의 뜻을 훼손하고 한 맺힌 유가족들의 마음에 더욱 큰 상처를 냈습니다.

이번 발언은 토착왜구당이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역사의 진실을 외면한 억지 주장입니다.

토착왜구당은 이 땅의 민주화와 산업화 세력이 힘을 합쳐 탄생시킨 민주자유당과 문민정부를 그 뿌리로 두고 있습니다.

지난 1993년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했습니다.

문민정부는 5·18 민주묘역을 4년에 걸쳐 조성해 나중에 국립묘지로 승격되도록 했습니다.

동시에 5·18 특별법을 제정해 신군부 세력에게 광주 유혈 진압의 죄를 물으면서 과거사를 정리하고 5·18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습니다.

일부 의원들의 발언은 ‘정의와 진실’을 위한 토착왜구당의 역사와 여러 가지 노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일부 의원들의 발언이 토착왜구당의 미래를 망치고 국민들로부터 외면받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인에 주어진 최고의 책무는 국민통합과 나라발전입니다.

국민을 분열시키고 역사의 가슴 아픈 비극에 더 큰 상처를 내는 언행은 정치인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18 민주 정신은 오늘날 상생과 통합의 정신이 돼야 합니다.

상생과 통합이야말로 ‘함께 살아가는 포용적 보수’를 지향하는 우파 보수 정치가 갈 길입니다.

저는 최근 일어난 상황에 대해 크게 유감을 표시하며, 해당 의원들이 결자해지의 자세로 국민들의 마음을 풀어줄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감사합니다.

서청원 2월 11일 오후 4:32

<5·18은 재론의 여지 없는 숭고한 민주화 운동이다>

- 일부가 주장하는 종북좌파 배후설은 어불성설(語不成說)

-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9박 10일간 생생하게 현장 취재

-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무참하게 진압한 신군부의 만행

- 광주시민들의 높은 시민의식에 감복

최근 토착왜구당의 일부 의원들이 주최한 5·18 진상규명 대국민 공청회 문제가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안타깝고 불필요한 논쟁으로 국론까지 분열시켜야 되겠는가? 한마디로 5·18은 숭고한 민주화 운동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일부 의원들이 보수논객의 왜곡된 주장에 휩쓸렸다고 생각한다. 해당 의원들은 이 기회에 이런 생각을 바로잡고 국민 앞에 간곡하게 사과해야 한다.

나는 5·18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의 고참 기자로 회사의 명을 받고 광주에 특파되어 9박 10일간 생생하게 현장을 취재했다. 당시 사회부장은 지금도 예리한 칼럼을 쓰고 계신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기자의 눈은 매섭다. 현장을 직접 취재한 기자로서 당시 600명의 북한군이 와서 광주시민을 부추겼다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 많은 인원이 육로로 왔단 말인가? 해상으로 왔겠는가? 그런 일이 있었다면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여소야대인 1988년 13대 국회에서 열린 5공 비리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5·18 민주화 운동의 진실이 낱낱이 밝혀졌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특별법’이 제정되었고, 1996년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 책임자들이 내란음모죄로 법적인 처벌을 받았다. 이미 역사적, 사법적 평가가 끝난 상황에서 불필요한 논란을 다시 일으키고, 이것이 정치 쟁점화 되는 데 대해서 당시 현장을 경험했던 선배 의원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에도 거론된 적이 없었는데, 일부 인사들이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얘기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쟁이며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신군부에 반대해서 항거하던 학생들을 신군부가 군홧발로 짓밟고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이를 말리던 시민들까지도 무참하게 짓밟아서 생긴 민주화 운동이다.

하마터면 나도 목숨을 잃을 뻔했던 절체절명의 위기도 있었지만, 광주시민들은 침착하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나는 광주시민들의 높은 시민의식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지켜봤다.

당시 문화방송과 KBS 등이 불에 타는 일도 있었지만, 군인들이 철수한 후 6일간의 무정부나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광주 한복판 금남로에서 금은방 하나 털리지 않았다. 도청의 문서 하나도 훼손된 것이 없었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에도 이런 내용을 담았고, 1985년 7월 월간조선에 <광주민주화운동 5·18에서 5.27까지> 기사를 통해서 당시 상황과 광주시민들의 높은 시민의식에 감복한 내용을 기사화하기도 했다.

분명한 역사적 진실이 있고,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이 있는데 민주화 운동을 종북좌파의 문제로 왜곡해서 거론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잘못이다. 현장을 체험한 선배정치인으로서 숭고한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나 소모적인 정치 쟁점이 돼서 국론을 분열시키는 불행한 일이 없기를 바란다.

김현철 2월 13일 오전 8:57

이번 토착왜구당의 5·18 망언 사태는 비록 지도부가 뒤늦게 수습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지만 토착왜구당의 실체가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봅니다.

아버님은 문민정부 당시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정부가 문민정부라고 규정하고 특별법을 만들어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을 단죄했습니다.

1983년 아버님이 상도동에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3년째 연금당해 계실 때 5월 18일을 기해 23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통해 5·18을 기념하기도 했습니다.

토착왜구당의 일부라고 하지만 결국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들의 후예들 그리고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극우세력들이 존재하는 한 토착왜구당의 미래는 결코 희망적일 수 없습니다.

김현철 2월 14일 오전 10:20

작금의 토착왜구당의 행태를 보면 박근혜 정권의 탄핵을 통해 처절한 반성과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보여도 시원찮을 판에 다시 과거 군사독재의 향수를 잊지 못해 회귀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감지됩니다.

그런 수구 반동적인 집단 속에 개혁보수의 상징인 김영삼 대통령의 사진이 그곳에 걸려 있다는 자체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빙탄지간(氷炭之間)입니다.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과거 수구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확인되면 반드시 아버님의 사진은 그곳에서 내려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5·18’ 하면 자연스럽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떠올립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호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사람들이 “김대중 석방”을 외쳤기 때문입니다.

▲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항의해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3년 5월 18일부터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다. 옆은 부인 고 손명순 여사와 아들 현철씨.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나 5·18 광주항쟁은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로 촉발된 대한민국 역사의 거대한 비극입니다. 5·18에 영호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5·18에 그토록 분노한 이유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5·18 3주년에 맞춰 목숨을 건 단식에 돌입하고 5·18 특별법을 제정했던 이유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5·18 광주를 어떻게 생각했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의 회고록을 찾았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 회고록은 두 종류입니다. 대통령 퇴임 뒤 2년이 지난 2000년에 백산서당에서 펴낸 세 권짜리 <김영삼 회고록>(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의 기록입니다. 절판됐다가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재출간됐습니다.

또 2001년 조선일보사에서 펴낸 두 권짜리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이 있습니다. 대통령 재임 기간의 기록입니다. 두 가지 회고록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5·18 광주를 아주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5·18 직후 1980년 5월 20일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를 ‘폭거’로 규정하고 ‘김대중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그의 회견은 국내 언론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1면 톱 기사로 보도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배포된 아사히신문은 이 기사가 오려진 채 배포됐습니다. 기사를 쓴 아사히신문 기자는 추방됐습니다. <김영삼 회고록>은 이 시기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연금이 시작될 즈음, 나는 광주에서 걸려 온 당원들의 떨리는 전화 목소리를 통해서 충격적인 학살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심화(心火)가 솟아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계엄군의 검열로 누더기가 된 신문이나 TV를 통해서는 일반 국민들이 ‘광주사태’의 진상을 알 도리가 없었지만, 광주의 소식을 이미 전해 들은 나로서는 ‘광주’가 보도되는 한순간 한순간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정권욕에 사로잡힌 전두환 일당은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돌림으로써 역사에 남아서는 안 될 참극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광주사태가 심상찮게 번지고 있음을 알고, 5월 23일 광주사태에 즈음한 성명서를 만들어 가족을 통해 몰래 밖으로 내보냈다.

무도한 5·17 폭거가 엄청난 비극을 가져오고 말았다. 광주 일대에서 발생한 비참한 유혈충돌은 나라의 앞날을 위태롭게 하는 중대사가 아닐 수 없다. 과도정부는 오늘의 사태에 대해 국민 앞에 사죄하고 책임을 지는 일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먼저 5·17 이전으로 원상복귀 해야 한다. 또 비상계엄령을 해제하여 군은 국토방위에 전념토록 해야 한다.

성명은 몰래 국내외의 보도기관에 전달되었으나, 외신(外信)에만 보도되었을 뿐 국내에서는 단 한 글자도 활자화되지 못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3년 광주 5·18 3주년을 맞아 죽음을 불사한 단식을 시작했습니다. 그 유명한 23일간의 단식입니다. <김영삼 회고록>은 48쪽 정도의 분량을 할애해 ‘23일간의 단식’을 별도의 장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자가 영원히 산다’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5·18과 직접 관련된 내용만 부분적으로 소개하겠습니다.

“광주항쟁 3주년을 앞두고 나는 뭔가 비장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국민에게는 보다 빨리 자유가 와야 했고, 그러려면 독재자에 대해서는 보다 강력한 저항이 필요했다.”

“광주사태 3주년을 이틀 앞둔 1983년 5월 16일 나의 시국 전반에 대한 견해를 담은 성명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 외신을 통해 미국, 일본, 유럽 등 전 세계에 알려졌다.”

원고지 70장 분량의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설사 정권욕에 사로잡혀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더라도 광주사태라는 유례 없는 참담한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으니,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민주와 정의, 민족과 복지, 그리고 선진조국을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한 잔인성을 기반으로 하여 탄생한 정권이 어떻게 도덕성과 정당성, 그리고 정통성을 감히 주장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광주사태 이후 회개는커녕 그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거나 한마디의 사죄의 말이 없으니, 광주사태로 맺힌 한(恨)은 이 민족의 가슴에 영원한 멍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광주사태로 맺힌 한은 이 민족의 가슴에 영원한 멍울이 될 것’이라는 표현이 지금 다시 읽어도 가슴을 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전두환 정권에 ‘민주화를 위한 전제 조건 다섯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학생·종교인·지식인·근로자 전원 석방, 정치활동 보장, 교수·학생·근로자 복직, 해직 언론인 복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국보위 입법 무효 확인 등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5·18 3주년인 1983년 5월 18일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나의 단식은 5·17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파괴·부정당함은 물론, 민주화를 요구하던 수백 수천 명의 민주시민이 광주에서 무참히 살상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데 대한 자책과 참회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며, 비극적인 광주사태로 목숨을 잃은 영혼과 거기서 희생된 민주시민들과 그 가족이 겪고 있는 고통에 동참하는 기회이며, 동시에 반민주적인 독재권력의 강화와 인권유린 및 정치적인 탄압에 대한 항의와 규탄의 표시이자, 민주정치의 확립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나마 시급히 강구되어야 한다는 나의 정치적 요구의 표시입니다.”

단식 기간에 쓴 일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제10일(5월 27일) 계속 진료를 거부하고 단식을 계속했다. 혈압은 120/80~100/70. 이날은 광주 민중봉기가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된 지 3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그 날 숨진 광주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아사히신문>은 이날 서울 시내가 계엄상태와 같았다고 보도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목숨을 건 단식은 국내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았지만, 해외 언론은 주요 기사로 다뤘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은 전두환 정권에 눌려 있던 정가와 재야, 그리고 해외 동포들을 뒤흔들었습니다. 6월 9일 단식을 마치며 다시 성명을 냈습니다.

“나는 광주사태에서 희생된 영령과 조국의 제단에 자신을 던진 현충의 넋,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청년·학생들의 투쟁과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 고난의 맨 앞의 일부를 나 자신이 떠맡기 위하여 민주투쟁의 최일선에 설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서약하는 바입니다.”

그랬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총재와 손잡고 3당 합당을 했습니다. 그리고 199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5·18 광주’에 대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3년 5월 13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특별담화가 발표되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됐으며,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입니다.”

“문민 민주화를 향해 우리가 걸어온 고난에 찬 역정에서 볼 때,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뚝한 한 봉우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명예를 높일 수 있는 사업을 적극 지원하겠다”며, 망월동 묘역 민주성지로 확장, 전남도청 위치에 광주민주화운동 기념공원 조성 및 기념탑 설립 등을 약속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하지 않았습니다. 훗날의 역사에 맡겨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2년 뒤 1995년 10월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졌습니다.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여론이 고조됐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습니다. 1995년 11월 24일 당시 강삼재 민자당 사무총장을 청와대로 물러 1995년 정기국회 회기 내에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했습니다.

“5·17 쿠데타는 국가와 국민의 명예를 국내외에 실추시킴은 물론, 민족의 자존심을 한없이 손상시켜 우리 모두를 슬프게 만들었다. 특히 국가 최후의 보루이자 조국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해 온 선량한 군인들의 명예를 더럽혔다. 따라서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에게 슬픔과 고통을 안겨준 당사자를 처리하기 위해 나는 5·18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5·18 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이 땅에 정의와 진실, 법이 살아 있다는 것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기회가 되도록 하겠다.”

5·18 특별법은 1995년 12월 19일 국회에서 통과됐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등 12·12, 5·18 주모자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공소시효를 정지시키고 공범자들의 공소시효도 정치시켜 내란 및 군사반란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군형법상 반란수괴 등 혐의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1심 선고는 전두환 사형, 노태우 22년 6월, 2심 선고는 전두환 무기, 노태우 17년이었습니다. 대법원 확정판결은 1997년 1월에 내려졌습니다.

<김영삼 회고록>과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김영삼 전 대통령은 5·18 광주항쟁을 촉발한 전두환 신군부의 학살에 분노하고 온몸으로 저항했습니다. 대통령이 된 뒤 전두환 노태우를 결국 감옥에 보냈습니다. 김영삼 정부의 전두환 노태우 처벌은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민정부를 계승했다는 토착왜구당 안에서 지금 5·18 광주항쟁에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발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5·18 유공자를 깎아내리는 발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진노해 벌떡 일어날 일입니다.

▲ 2월 14일 오후 대전 한밭체육관에서 열린 토착왜구당 전당대회 충청·호남권 합동 연설회에서 당대표 후보로 나선 황교안(왼쪽부터), 오세훈, 김진태 후보가 인사하고 있다. 대전/김경호 선임기자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과연 토착왜구당이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을 당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요? 국회가 이들에 대해 의원직 제명을 관철할 수 있을까요?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김무성 의원만 해도 “토착왜구당 일부 의원의 5·18 발언은 크게 잘못된 것인 만큼 해당 의원들의 진정한 사과와 자숙이 우선돼야 한다”면서도, 제명에 대해서는 “이 같은 발언을 갖고 국민이 선출한 동료 의원을 국회에서 제명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지나친 정치 공세임을 말씀드린다”고 반대하고 있습니다.

김무성 의원의 태도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발언 당사자들은 사과와 자숙은커녕, 자신들의 발언을 전당대회 득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김무성 의원이 세 의원 징계에 왜 소극적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결국은 이렇게 될 것입니다. 토착왜구당 의원총회에서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 당적 제명안은 당내 화합이라는 명분으로 부결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국회 윤리특별위원회에서 국회의원직 제명안도 의결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윤리특위 위원장은 토착왜구당 박명재 의원입니다.

설사 윤리특위에서 의원직 제명안을 의결하더라도 국회 본회의에서 3분의 2 찬성을 얻기 어렵습니다. 토착왜구당 의원들이 반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요? 일단은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토착왜구당 일부 의원들이 얼마나 반역사적 인물들인지, 당 지도부가 얼마나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인지 많은 사람이 알게 됐습니다.

이번 사태로 토착왜구당이 입은 내상은 언젠가 토착왜구당이 분열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가 2월 16일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과거 아버님은 정치생명을 걸고 혁명적인 3당 통합을 통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30년에 걸친 군부독재세력을 몰아내고 진정한 문민정부를 수립했습니다.

96년 총선을 승리로 이끈 신한국당은 진정한 개혁보수세력으로 자리매김했으나 이후 안타깝게도 수구세력들에 의해 이념과 정책들이 변질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과거 야당 시절의 통일민주당과 문민정부의 신한국당의 맥을 이을 정통 개혁보수정당의 출현을 진심으로 기원해 봅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김현철 씨의 기원대로 이뤄지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그가 언급한 ‘정통 개혁보수 정당’이라는 단어를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지금 바른미래당 대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계로 끌어들였던 손학규 대표입니다. 2017년 대선에 출마했던 유승민 의원은 여전히 ‘개혁보수’의 기치를 들고 있습니다.

토착왜구당의 이번 5·18 사태가 어쩌면 2020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계개편의 불씨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정치,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출처  5·18 망언 이어 징계쇼까지…YS의 진노가 두렵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