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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2,400여명 일하다 죽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매년 2,400여명 일하다 죽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산재 유가족 ‘기업처벌법’ 제정 한목소리
[경향신문] 선명수 기자 | 입력 : 2019.02.20 16:29:00 | 수정 : 2019.02.20 17:27:39


▲ 20일 오후 서울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유가족과 함께하는 기업처벌법 이야기 마당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숨진 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가 발언하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우리 유미는 삼성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병에 걸린 후에 보니, 유미와 짝으로 일했던 분도 백혈병으로 죽었다네요. 유미는 유해 화학약품을 썼다고 하는데, 삼성은 안 썼다고 했습니다. 저는 딸의 말을 믿기로 했습니다.”

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1명, 5명, 12명, 151명…. 故 황유미 씨처럼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은 노동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났다. 삼성은 피해자가 5명일 때는 그게 전부라고 하다가, 12명이 됐을 때는 그 외에 피해자는 없다고 했다. 삼성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은 노동자는 확인된 숫자만 지난해 11월 말 기준 151명, 전체 직업병 피해자는 450명에 달한다.

열여덟의 나이에 삼성전자에 취직해 기숙사로 떠나는 딸을 배웅한 아버지 황상기 씨(64)는 그로부터 4년 뒤 자신이 몰던 택시 뒷자리에서 딸을 잃었다. 병원 치료를 받고 속초의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황 씨는 20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유가족과 함께하는 기업처벌법 이야기 마당’에 나와 자신과 딸의 이야기를 했다. 이날 행사는 산업재해 피해자 유족들이 모여 중대 재해를 일으킨 기업 책임을 묻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열렸다.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 故 김용균 씨의 죽음 이후 산업안전보건법이 28년 만에 전면 개정됐지만,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한 기업 처벌은 여전히 요원하다는 문제의식으로 마련했다.

황 씨는 “피해자가 수백 명이 나왔지만, 삼성은 처벌받지 않았고, 피해자들의 산업재해 인정을 막아 삼성이 감면받는 보험료가 1년에 1000억 원이 넘는다”며 “사람이 죽어도 벌금 몇백만 원을 내면 끝인데, 삼성이 왜 돈과 노력을 들여 안전한 환경을 만들겠냐”고 반문했다. 황 씨는 국가의 역할을 강조했다. 노동자들이 일하다 죽어도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기업의 책임을 묻는 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날 행사에는 황 씨와 故 이민호 군의 아버지 이상영 씨, 故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 故 이한빛 PD의 동생 이한솔 씨, 원진레이온 산업재해 피해자 박민호 씨 등이 참석했다.

이민호 군은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17년,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 제주의 한 생수 공장에 현장 실습을 하러 갔다가 그해 11월 적재기에 눌려 숨졌다. 이 군의 아버지 이상영 씨는 “첫 번째로 아들의 휴대전화 액정이 깨졌고, 두 번째로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 그때 회사는 산재 처리를 하지 않기 위해 119 대신 직원의 차량으로 아들을 병원에 옮겼다”며 “그때 왜 산재처리 하지 않냐고 항의를 했다면 달라졌을 텐데, 그걸 따지지 못한 부모의 잘못으로 세 번째 사고가 나 아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이 씨는 “현장 실습 중에 고등학생인 아들이 죽었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며 울먹였다.

김미숙 씨는 “안전조치보다 사람 목숨값이 싸니까 안전조치 없이 기업이 일을 시킨 것”이라며 “원청이 책임을 지고 노동자를 죽게 한 기업을 제대로 처벌하기 위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캐나다, 호주, 영국 등 해외에선 ‘기업살인법’이라고 불리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故 노회찬 정의당 의원 등의 발의로 국회에 계류돼 있지만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연대에 따르면 2001~2016년 사이 매년 평균 2376명이 일하다 목숨을 잃었다. 한국의 산재 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2006년, 2011년을 제외하고 23년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대표는 “연구에 따르면 산재 사망을 줄이기 위한 정책 수단으로 가장 효과적인 것은 산재 예방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법을 어긴 사업주를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이라며 “국회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한 논의를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매년 2400여명 일하다 죽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산재 유가족 '기업처벌법' 제정 한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