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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종교와 개독교

‘반공주의’ 들고 독재정권과 함께 성장한 극우개신교

‘반공주의’ 들고 독재정권과 함께 성장한 극우개신교
[민중의소리] 권종술 기자 | 발행 : 2019-04-07 16:12:37 | 수정 : 2019-04-07 16:12:37


▲ 보수 기독교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3월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연 '구국과 자유통일을 위한 3·1절 한국교회 회개의 금식기도 대성회 및 범국민대회’. ⓒ임화영 기자

통계청이 발표한 ‘2015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신자 숫자가 가장 많은 종교는 개신교로 나타났다. 통계청은 1985년부터 10년마다 종교인구 조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통계청 조사에서 개신교가 신자 수 1위를 기록한 것은 2015년 조사가 처음이다. 그동안 부동의 1위였던 불교는 2위로 밀려났다. 당시 조사에서 개신교 신자라고 밝힌 사람은 19.7%(967만명)였고, 불교 신자라고 밝힌 사람은 15.5%(761만 명), 천주교는 7.9%(389만 명)였다. 2005년과 비교하면 개신교 신자는 125만 명이 늘어난 반면 불교는 296만 9천 명, 천주교는 112만 5천 명이 줄어들었다. 이 기간 개신교만 유일하게 신자가 늘어난 것이다.


인구의 1%였던 개신교,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진 종교가 되다
박정희 집권시기 884.3% 늘어난 개신교 신자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해방 직후인 지난 1945년 개신교 인구는 3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한다. 해방 당시 인구가 2500만 명 정도였으니 인구의 1~2%에 불과했다. 더구나 남한보다 북한에 개신교 인구가 더 많았던 상황이다. 강인철 한신대 교수는 2007년 발표한 ‘남한의 월남 종교인들 : 반공주의와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1945년 해방 당시 한반도 전체 개신교 신자의 60%가량인 약 20만 명이 북한 지역에 살았는데, 이들의 35∼50%에 해당하는 7만∼10만 명이 1945∼1953년 사이 남한으로 이동했고, 장로교와 감리교의 주축을 이뤘다”고 설명했다. 북에서 넘어온 개신교 신자들까지 더한다 해도 1945년 당시 남한의 개신교 신자는 2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인구의 1~2%에 불과하던 개신교는 이후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한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엔 50만 명으로 두 배 늘어났다. 그러다 폭발적인 증가를 기록하게 된 시점은 1960년대와 1970년대로 박정희 집권 시기와 일치한다. 기독교대연감과 한국종교연감 등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박정희 집권 첫해인 1961년 60만7천여 명이던 신자는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 598만여 명으로 884.3%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개신교 신자의 급격한 증가세는 통계청 조사가 시작된 이후 통계로도 확인된다. 통계조사가 시작된 지난 1985년엔 649만 명이었고, 1995년엔 876만 명으로 나타났다. 2005년엔 862만 명이었고, 2015년 조사에선 968만 명을 기록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1985년에서 1995년 사이엔 200만 명 넘게 늘어났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1995년에서 2005년 사이엔 소폭 감소하며 큰 변화가 없었지만, 다시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05년과 2015년 사이엔 개신교만 유일하게 신자 숫자가 125만 명 증가하면서 1위를 차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개신교 신자의 증감을 살펴보면 정치 지형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군사독재 등 권위주의 정부 시절과 장로 출신의 보수 성향의 대통령이 집권한 시절엔 큰 성장을 기록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시기엔 소폭 감소 혹은 정체됐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변화엔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 것일까? 폭발적인 성장의 뒷면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독재정권과 김영삼, 이명박 등 장로 대통령과 유신의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를 아낌없이 지원한 과거가 있다.

북에서 내려온 반공주의자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국개신교는 서북청년단 등 우익테러단체를 결성해 제주4.3항쟁과 여순항쟁, 대구10월항쟁 진압에 가담하는 등 이승만 세력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힘을 보탰다. 이들은 ‘공산주의’를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붉은 용’에 비유하는 등 북을 ‘악마화’하면서 반공주의를 마치 ‘성전(聖戰)’처럼 수행했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도움으로 권력의 중심을 차지한 개신교…
종교적산 불하와 군종제도 등 특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김진호 목사는 “미군정의 장택상조병옥 등 경찰 책임자들이 서북지역 출신 개신교인들을 활용했다. 군정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통역관 정치를 했다. 그런 과정에서 당국으로부터 특혜를 입었다. 미군정은 이들을 일종의 행동대원으로 활용으로 활용했다. 이들은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공격적 반공주의자로 변화한다. 북에서 가진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공격적 행동주의로 나타났다. 한국전쟁기를 지나면서 이러한 공격적 행동은 불타오르고, 당국 비호를 받으며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런 과정에서 개신교가 국교처럼 자원을 과점한 세력이 되자 개신교로 개종하는 이들까지 생겨나는 등 강력한 사회적 세력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권력과 가까워진 개신교는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각종 혜택을 받았다. 일본이 남긴 종교 적산을 우선 양도받고, 군종제도 등의 특혜를 얻어 성장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일제가 남긴 재산, 즉 적산(敵産)은 미군정 등을 거쳐 일반에 매각됐다. 이 과정에서 많은 특혜가 발생했고, 이 적산을 불하받은 많은 기업이 오늘날 재벌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을 보면 적산매각을 통한 이익이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적산 가운데는 기업 적산뿐 아니라 종교 적산도 많았다. 그 종교 적산 가운데 상당 부분을 개신교가 차지하는 특혜를 입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개신교의 교세는 미미했다. 때문에, 일제가 남긴 개신교 관련 재산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개신교는 개신교 관련 재산뿐 아니라 일본의 신흥종교로 한반도에도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던 천리교(天理敎)의 재산을 불하받는 등 특혜를 받았다. 한경직 목사의 서울 영락교회(전 베다니교회), 김재준 목사의 서울 경동교회(전 야고보교회), 송창근 목사의 서울 성남교회(전 성바울교회) 등이 천리교 건물을 불하받아 교회를 만드는 등 신학적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상당수 교회와 신학교가 이런 과정을 통해 세워졌다. 적산매각은 이후 남한에 대형교회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대통령 취임식을 하는 이승만. 개신교인이던 이승만 집권시기 개신교는 수많은 특혜를 받았다. ⓒ뉴시스

개신교에 유리했던 군종제도도 개신교 성장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우리나라 군대에 군종제도가 도입된 것은 한국전쟁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개신교는 해방 당시 1~2%에 불과했고, 천주교는 개신교보다도 적었지만, 개신교와 천주교는 이승만의 특혜로 1951년부터 1967년까지 군종을 독점했다. 불교 등에도 군종이 개방된 1967년 이후에도 개신교는 군종장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개신교의 군종장교비율은 1997년 66.7%에 이르렀고, 2004년엔 58.3%, 2018년 4월 국방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여전히 개신교 군종장교는 258명으로 전체 군종장교 492명 가운데 52.4%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특혜를 바탕으로 해마다 10만 명에서 20만 명의 군인들에게 세례를 하는 등 공격적인 선교를 통해 개신교의 폭발적 성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됐다.


한경직 목사 “저희 교회도 그날(6월 25일) 반공예배를 드렸습니다”
박정희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바로 반공하는 것”

권력과 가까워진 개신교는 권력과 함께 성장했고, 그렇게 성장한 힘은 다시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중요한 동력으로 활용됐다. 개신교 신자가 884.3% 늘어난 박정희 집권 시기와 개신교 대형교회들이 늘어난 1980년대 성장의 배후엔 이런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며 개신교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극우화와 보수화도 가속화됐다.

박정희 정권 시기와 이후 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개신교는 수많은 반공 집회를 열었다. 아시아기독교반공대회, 세계기독교반공대회 등 국제행사를 개최했고, 기독교반공협회와 기독교반공교육협회 등 다양한 반공단체를 조직하는 등 반공 여론 확산을 통해 박정희 정권에 힘을 실었다. 지난 1974년 7월 12일 청와대에서 박정희는 개신교 등 종교단체가 앞장서 만든 반공연맹 임원과 시도지부장 등과 만난 자리에서 6월 25일에 전국에서 반공대회를 연 것을 치하했다. 그러자 당시 반공연맹 임원을 맡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저희 교회에서도 그날 반공 예배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했고, 박정희는 웃음을 보이면서 “종교 그 자체가 반공 그 자체가 아니겠느냐”며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바로 반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당시 언론이 보도하고 있다. 개신교의 반공주의가 박정희에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장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는 “반공주의를 매개로 권력과 결탁한 개신교 세력들은 특혜를 누렸다. 박정희 정권이 친 개신교 정부라고 말하긴 어려워도 상당한 도움을 준 건 사실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반공주의를 내걸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좌익전력 때문에 미국은 의혹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사절단이란 이름의 특사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김활란 등 개신교계 인사들이 미국을 방문해 쿠데타 당위성을 밝히며 설득했다. 박정희 집권 시기에 빌리 그라함 목사의 민족 대복음화 집회가 여의도에서 열린다. 당시 김장환 목사가 통역했다. 김준곤 목사는 10월 유신 환영 메시지도 냈다. 보수 개신교 세력들은 정교분리를 외치며 진보 개신교 세력의 활동을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은 정권과 사실상의 뒷거래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 1968년 대통령 조찬 기도회라는 열린 첫 공식 국가조찬기도회. 이날 기도회에서 김준곤 목사는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라고 박정희를 칭송했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1973년 김준곤 목사 설교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계의 주시 속에 벌어지고 있는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 하겠다”

독재자들을 축복했던 조찬기도회도 개신교의 극우화와 권력 지향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국가조찬기도회는 박정희 정권 시절이던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만든 고 김준곤 목사가 제안해 1965년 시작한 국회조찬기도회에 기원을 두고 있다. 1968년 열린 첫 공식 국가조찬기도회에서 김준곤 목사는 박정희를 향해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김 목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또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라고까지 칭송했다.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발표한 다음 해인 1973년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에서도 찬양 발언을 이어갔다. 김 목사는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계의 주시 속에 벌어지고 있는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 하겠다”며 “당초 정신혁명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는 이 운동은 … 맑스주의와 허무주의를 초극하는 새로운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야 될 줄 안다. 외람되지만 각하의 치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군 신자화 운동이 종교계에서는 이미 세계적 자랑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만일 전민족 신자화 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만 있다면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살자’ 전두환을 축복한 목사들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
사회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

1980년에는 광주시민을 학살한 뒤 권좌에 오른 전두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축복을 기원하는 치욕적인 장면까지 보여줬다. 정식 국가조찬기도회는 아니지만, 당시 개신교 목사들은 1980년 8월 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고 전두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당시 조찬기도회는 공중파 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고, 광주 학살을 기반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의 안정적인 통치기반의 마련을 개신교 목회자들이 도운 것이다. 당시 조찬기도회에선 ‘학살자’ 전두환을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여호수아에 비교하며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 사회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하기도 했다.

▲ 1980년 8월 전두환을 위해 개신교계가 연 조찬기도회 모습. ⓒ기타

독재정권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평신도들을 동원해 대규모 기도회를 열며 정권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 민주화의 열풍이 불던 1987년. 전두환 정권에 맞서 많은 시민이 민주화를 외치며 투쟁하던 이 시기 정권이 위기를 맞자 그해 10월 3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선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대성회’가 열렸다. 개신교 보수세력들은 민주화 열풍의 시기를 ‘북한의 테러 위협과 학생시위, 노동쟁의로 분열과 대립’의 시기로 규정하며 신도들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한국개신교단협의회 등이 주축이 돼서 열린 기도회에선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극동방송 사장인 김장환 목사 등이 단상에 올랐다. 100만 명이 넘는 개신교 신자들이 함께한 기도회에선 공산집단의 붉은 마수의 흉계를 경계하고, 정치인 근로자 학생 모두의 자성을 촉구하는 등 4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독재정권의 위기 때마다 열린 기도회
1975년 한경직 목사 설교
“나라 없이는 신앙도 자유도 재산도 모두 잃게 되므로
자유 민주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깨어나 함께 기도하자”

박정희 집권 시절이던 지난 1975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유신 독재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이 커졌고, 박정희는 이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유신헌법 재신임 투표를 추진했다. 그해 4월 9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고인들을 사형선고 20시간 만에 사형에 처하는 등 인권탄압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위기가 커지자 6월 22일 개신교 보수세력이 중심이 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40만 명이 모여 ‘나라를 위한 기독교 연합 기도회’를 열었다. 기도회는 4월부터 준비됐다. 각 교단이 모임을 갖고 기독교범교단지도자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한경직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협의회는 “최근 인도차이나 사태에 따른 공산주의의 위협을 중시해 이에 대해 최대의 관심을 기울인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기도회를 추진했다. 22일 열린 기도회에서 한경직 목사는 대회사를 통해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지금 남침야욕에 혈안이 돼 있다”고 지적하면서 “나라 없이는 신앙도 자유도 재산도 모두 잃게 되므로 자유 민주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깨어나 함께 기도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 1975년 박정희 정권이 위기에 처하자 그해 6월 22일 개신교 보수세력이 중심이 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40만 명이 모여 ‘나라를 위한 기독교 연합 기도회’를 열었다. 당시 기도회를 보도한 6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 ⓒ기타

2년 뒤인 1977년 8월에도 서울 여의도광장에선 ‘77민족복음화대성회’가 열렸다. 150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집회에선 “우리는 계속 복음화의 기수가 될 것을 다짐한다. 김일성 북한 괴뢰정권은 침략야욕을 버리고 정부의 통일 노력에 호응하라.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중지하고 우방으로서 신의를 지키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당시는 미군 철수 문제 등을 두고 논란이 이는 등 박정희 정권이 위기를 겪고 있었고, 위기의 박정희 정권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런 행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7년 박근혜 탄핵을 앞두고 한국교회총연합회는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2017한국교회대각성 기도회’를 열어 난국에 빠진 우리나라와 교회를 구하기 위해 회개 운동을 벌이자고 호소했다. 이에 앞서 열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국교회연합이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3.1 만세운동 구국기도회’는 사실상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 총궐기 운동본부’ 집회 사전 집회 성격의 행사였다. ‘구국 기도’와 ‘교회 대각성’을 내걸었지만 사실상 위기에 처한 박근혜를 특면 지원하기 위한 행사였다. 그리고,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보수세력이 권력을 잃어버리자 문재인 정부를 공산주의 또는 악의 세력이라 주장하며 ‘구국기도회’를 빙자한 극우 집회를 열고 있다.


박정희식 근대화의 논리를 철저하게 내면화하고,
체질화했던 게 개신교였다

개신교 성장의 비밀엔 이런 정치적 요소뿐 아니라 또 다른 영향도 있다. 바로 ‘번영신학(繁榮神學)’이다. ‘번영신학’은 금전적 축복이나 물질적 풍성함이 신의 뜻이라고 믿으며 신앙이 자신들의 물질적 부를 증가시킨다고 믿는 신앙이다. 신을 믿으면 물질적 축복을 줄 것이라는 이라는 믿음은 반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의 개신교에선 자주 만나는 모습이다. 이런 개신교의 ‘번영신학’이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와 맞아떨어졌다.

교회협 정의평화위원장 최형묵 목사는 “거시적으로 조명하면 정권의 비호뿐 아니라 급속한 근대화로 인한 아노미 상태,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면서 해체된 공동체를 대신할 곳으로 교회가 주목받은 시대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박정희식 근대화의 논리를 철저하게 내면화하고, 체질화했던 게 개신교였다는 것이다. 성장주의를 추구하면서 가시적인 물질적 성취에만 관심을 두었다. 물질적 성장이 곧 신의 축복으로 여기게 했다. 이런 부분은 민주주의보다는 경제가 우선이라던 박정희 정권의 이익과 통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극우개신교를 파헤치다②]‘반공주의’ 들고 독재정권과 함께 성장한 극우개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