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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의백’ 김원봉은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다

의열단 ‘의백’ 김원봉은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다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 기자 | 입력 : 2019.05.03 09:23 | 수정 : 2019.05.03 21:47


▲ 의열단의 초기 멤버 사진. 의백(단장) 김원봉과 곽재기·강세우·김기득·이성우 등 창립 초기 단원들이 모여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곽재기 의사의 서대문형무소 수형 기록 카드를 분석해 확인했다. 1920년 3~5월 사이 중국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租界) 안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을 보면 신분 노출을 꺼려 중국식 복장을 한 의백 김원봉 외 단원들은 모두 깔끔한 양복 차림을 하고 있다.

“내가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약산 김원봉(1898~1958)과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의 악연과 관련된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진다. 물론 1차 사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의열단 동지인 유석현(1900~1987)과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정정화 선생(1900~1991)의 회고담, 독립운동가 송남헌(1914~2001)의 <해방 3년사>, 그리고 이런 자료들을 재구성한 <김원봉 평전>과 각종 논문 등을 종합해보자.

1947년 3월 22일 서울 청계천 은신처에서 변소에 앉아있던 약산 김원봉(1898~1958) 선생이 체포됐다. 김원봉 선생이 누구인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열단 의백(단장)이자, 조선의용대장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낸 불세출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선생이 변소에서 큰 볼일을 보다가 채 뒷정리도 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고의춤을 잡고 일어선 채로 붙잡히고 말았다. 이쯤으로도 치욕일진대 천하의 김원봉 선생에게 수갑을 채운 자가 바로 악질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이었다. 이 과정에서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구전된다.

▲ 의열단 의백 김원봉 선생. 의열단을 이끈 이를 단장이 아니라 의백이라 했다. 의형제의 맏형이라는 뜻 이다. 남이지만 피를 나눈 형제처럼 유혈투쟁을 벌이겠다는 의미였다.


노덕술에게 모욕당한 의열단장

“의열단이라고 까불지 마라. 지금 이 나라에서는 빨갱이라면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아.”

선생이 “의열단이 너 같은 친일경찰 놈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꾸짖자 노덕술은 선생의 따귀를 때리며 참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노덕술은 독립투사를 때려잡는 악질 경찰에서 해방 후에는 좌익분자를 색출하는 애국 경찰로 둔갑해 있었다. 그렇게 노덕술에게 갖은 수모를 당한 김원봉은 의열단 동지인 유석현 선생(1900~1987) 앞에서 통곡했단다.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들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이런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 있소. 내가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 1923년 1월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과 2월의 폭탄반입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 호외. 왼쪽 사진은 의열단 의백 김원봉 선생의 21살 사진이다.

정정화 선생(1900~1991)의 회고록에도 당시의 이야기가 나온다.

“언젠가 약산(김원봉)이 왜정 때부터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몹시 분개했던 일이 기억난다. …의열단의 의백(義伯·의형제의 큰형님)이었고…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지낸 사람이 악질 왜경 출신자로부터 조사를 받고 모욕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민족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 분개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상이 아무래도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정화 선생은 “그런 약산이 얼마 후(1948년 4월) 월북했다”고 첨언했다. 노덕술이 김원봉 선생에게 정말로 따귀까지 때린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여러 증언을 종합해보면 노덕술이 어떤 형태로든 독립운동지도자인 김원봉 선생에게 참을 수 없는 수모를 안겨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 노덕술과의 악연은 왜 김원봉 선생이 월북했는지를 그 이유를 알려주는 실마리가 된다.

▲ 황푸군관학교 옛 정문. 김원봉 선생은 1926년 의열단원 20여명과 함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 즉 국공합작으로 창설 운영되던 황푸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입교한다. 코민테른이 파견한 소련 군사고문단도 학교 운영에 참여했다. 6개월간 교육받고 10월 5일 졸업한 선생의 황푸군관학교 이력은 항일 역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의열단의 맏형, ‘의열단 의백’ 김원봉

김원봉 선생이 누구인가. 1920년대 이후 김구 선생과 함께 중국 내 독립운동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분이다.

선생의 이름은 12개나 된다. 김약산, 최림, 진국빈, 이충, 김세량, 왕세덕, 암일, 왕석, 윤봉, 김국빈, 진충, 김약삼 등이다. 그만큼 천의 얼굴로 신출귀몰 일제와 싸웠다는 뜻이다. 1918년 중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폭력투쟁만이 조국을 해방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혔다.


1919년 11월 9일 김원봉을 비롯한 조선의 10대 후반~20대 중반의 청년 13명이 중국 지린성(吉林省) 바후먼(把虎門) 밖의 농가에 모였다. 밤새워 행동강령을 토론한 청년들은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했다. 의열단의 공약 제1조가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것이었다. 의열단은 ‘7가살(可殺)’, 즉 암살대상으로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 장성,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적 양반·지주 등을 꼽았다. 또 ‘5파괴’, 즉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각 경찰서·기타 왜적의 중요기관 등을 파괴대상으로 선정했다.

▲ 동아일보 1924년 4월 25일 자. 김지섭 의사의 도쿄 일왕 거주지 입구의 니주바시(二重橋) 폭탄 투척 사건을 다루고 있다.


제비뽑기로 거사의 주인공을 결정하다

김원봉은 의열단의 ‘의백(義伯)’으로 추대됐다. ‘의백’은 한마디로 의형제의 맏형을 뜻한다. 즉 남이지만 피의 맹세로 의형제의 결연을 다졌음을 의미한다. 의열단의 파괴·암살 폭력투쟁은 1920년 3월부터 본격 개시됐다.

즉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1920년 9월),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12월),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1921년 9월), 김익상·오성륜·이종암 등의 일본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저격미수(1922년 3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후 교전(1923년 1월), 황옥·김시현의 폭탄반입사건(2월), 김지섭의 도쿄 일왕 거주지 입구의 니주바시(二重橋) 폭탄 투척(1924년 1월), 베이징에서 일제 밀정 김단하 암살(1925년 3월),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 투척(1926년 12월) 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사건에 가담한 의열단원들은 극적으로 탈옥한 이(오성륜)도 있었지만, 끝까지 싸우다 자결한 이(박재혁·김상옥·나석주)들도 있었고, 일제 경찰에 게 암살당한 이(김익상)도 있었으며 옥사(김지섭)하거나 사형당한 이(최수봉)도 있었다.

거사 참여는 곧 죽으러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의열단원들은 서로 “내가 먼저 가겠다”고 손을 들었다. 나중에는 제비뽑기로 순서를 정했다. 먼저 죽으러 가겠다고 제비까지 뽑은 셈이다.

▲ 김원봉 선생은 동지 박문호의 누이이자 여성혁명가인 박차정 선생과 혼인했다. 박차정 선생은 조선의용대 시찰에 나섰다가 적탄을 맞아 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박차정 선생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멋진 친구들

김산의 전기인 <아리랑>을 쓴 님 웨일스(1907~1997)은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의열단원들은 언제나 멋진 스포츠형의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했다. 어떤 경우에도 결벽스러울 정도로 아주 깨끗하게 차려입었다.”

일제와 친일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일본 외무대신은 “김원봉을 체포하면 즉각 나가사키(長岐) 형무소로 이송할 것이며, 소요경비는 외무성이 직접 지출한다”는 요지의 훈령을 상하이 총영사관에 하달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도 웃지 못할 해프닝이 터졌다. 강도들이 재물을 빼앗으면서 ‘난 의열단원인데 군자금으로 가져가니 그리 알라’고 엄포를 놓는 사건이 일어났다. 충청도에서는 경찰이 좀도둑을 잡아놨더니 좀도둑이 ‘내가 의열단이다’라 소리쳤고, 그 소리를 들은 순경들이 놀라 도망쳤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1923년 8월 30일 미국 정보기관의 첩보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일본 상하이 총영사의 첩보는 “의열단 단원이 1000명을 헤아리게 됐다”고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의 학맥이 된 국공 합작의 황푸군관학교

선생은 1926년 의열단원 20여명과 함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 즉 국공합작으로 창설 운영되던 황푸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입교한다. 코민테른이 파견한 소련 군사고문단도 학교 운영에 참여했다. 6개월간 교육받고 10월 5일 졸업한 선생의 황푸군관학교 이력은 항일 역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한일운동을 지속하는데 필요한 강력한 지원세력을 중국 군대와 정부 내에 구축할 수 있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을 막론하고 두터운 학맥을 쌓은 것이다. 이 학교 교장이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주석이었고, 정치부 주임은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였다. 황푸군관학교 출신들은 국공 합작이 깨진 뒤에도 중국 국민당 국민정부에서 장제스 주석의 친위대 역할을 했다. 저우언라이(정치부 주임), 선생의 동기생(4기)인 린뱌오(林彪) 등도 공산당의 핵심 인물이 됐다.

▲ 김원봉 선생의 가족들. 망건을 쓰고 있는 노인이 부친 김주익이다. 선생의 가족들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거의 모두 처형됐다.


골수 보수우익단체의 재정지원까지 받다

선생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인 안광천(1897~?)의 영향을 받아 1930년 4월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개설했다. 또 공산당 재건 동맹에 참여했다. 이때가 선생의 항일투쟁사에서 가장 좌경화했던 때였다.

그러나 선생의 ‘왼쪽 투쟁’은 오래 가지 못한다. 일본이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 점령하고 괴뢰국을 세우자(1932년 3월) 선생은 이때야말로 일제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 제휴해서 과감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때라고 여겼다. 선생은 1932년 봄 중국 국민정부가 있는 난징(南京)으로 떠났다. 여기서 학맥을 찾았다. 황푸군관학교 동창생들을 찾아다니며 의열단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선생이 접촉한 조직은 국민당 정부의 ‘삼민주의 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 였다. 남색 옷을 입는다고 ‘남의사(藍衣社)’라고도 했던 이 조직은 중국 국민당 산하의 파시즘 비밀조직이었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황푸군관학교 출신 20여명이 구성했는데, 공산당을 탄압하고 당 내부의 반대파를 제거하고 숙청하는 우익조직이었다.

마침내 남의사의 지원이 결정됐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난징 교외의 장잉진(江寧鎭) 탕산(湯山)의 사찰에 둥지를 만들어주었다. 김원봉 선생은 그곳에 지도급 독립투사들을 길러낼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열었다. 2년 뒤인 1934년 4월에는 임시정부 지도자인 김구 선생이 학교를 방문해서 ‘조선 혁명을 위해 최후까지 분투해 줄 것’을 격려했다. 김구 선생은 학생들에게 만년필 한 자루씩을 선물했다. 졸업생 중에는 항일민족시인 이육사 선생(1905~1944)이 끼어 있다. 학교는 1932년 10~35년 9월까지 3년간 125명의 독립군 간부와 전사를 키워냈다.


실용주의적 좌파 민족주의자

이 대목에서 살펴볼 것이 있다. 우파로부터 조선공산당 재건 동맹 참여와 레닌주의 정치학교 운영으로 골수 공산주의자 소리를 듣고 있는 김원봉 선생이 아닌가. 그런 선생이 이젠 공산당을 탄압한 국민당 정부, 그것도 모자라 백색테러단체인 남의사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선생은 그 때문에 좌파로부터도 배반·변절자로 손가락질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원봉 선생은 본디 어떤 사람인가.

훗날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분대장이었던 김학철(1916~2001)의 회고담은 선생이 어떤 사상을 갖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장제스를 암살하는데 협조해달라”고 청하자 김원봉 선생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사진. 맨 앞줄 휘장 가운데가 김원봉 대장이다.

“장개석(장제스)이를 해치우는 것은 우리의 급선무가 아닙니다. 그자는 백번 죽어 마땅하지만 지금 그자의 속셈은 우리를 이용해보자는 거요. 우리도 그자와 맞장기를 두어 안 될게 뭐 있소? 일제를 타도하려면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이면 어떤 거나 다 이용해야 하지 않겠소.”

김원봉 선생이 실용주의적 사고를 둔 민족주의자이지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얘기다. 항일투쟁을 위해서는 어떤 단체나 국가와도 연대한다는 유연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김원봉 선생은 ‘뼛속까지 민족주의였다’라는 설명이 맞겠다. 더 정의하자면 김구 선생이 민족주의 우파세력의 지도자라면 김원봉은 좌파세력의 한 축을 이룬 지도자라 할까.

▲ 중국 산시성 쭤취안현 윈터우디촌 마을 입구 절 문 정면에 적힌 조선의용대의 항일선전 문구. ‘강제병 끌려 나온 동포들 팔노군이있는 곧마당(곳마다) 조선의용군이 있으니 총을 하랄노(하늘로) 향하여 쏘시요!’라 했다. 중국군 산하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의용대는 주로 후방에서 일본군의 귀순 종용 업무 등을 맡았다.


우리 군대, 조선의용대의 창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다급해진 장제스 중국군사위원회 위원장은 한·중 항일 연합 전선을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김원봉 선생은 ‘옳다구나’ 했다. 선생은 예의 ‘학맥의 자양분’이었던 황푸군관학교 출신의 중국 유력인사들을 만나 조선인 부대, 즉 조선의용대 결성안을 추인받는다.

중국은 마침 일본의 침략에 맞서 제2차 국·공 합작을 이룬 때였다. 중국은 군사위원회 정치부에서 이 부대를 관할한다는 조건으로 창설을 승인했다. 마침내 1938년 10월 10일 우한(武漢) 한커우(漢口) 중화기독청년회관에서 역사적인 결성식이 열렸다. 조선의용대 창설 소식이 미국의 각 신문에 보도되자 재미교포들이 자진해서 의용대 후원회에 지원했다. 총대장은 김원봉 선생이 맡았다. 비록 남의 땅이고, 200여명의 소수 인원이었지만 나라가 망한 후 국제정규전에서 독립군이 직접 참전한 것은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조선의용대는 1940년대 중국 관내에서 한인의 양대 군사조직이던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창설 및 발전을 선도했다.

김원봉 선생은 1942년 민족혁명당을 이끌고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선생과 조선의용대원 일부는 1942년 7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됐다. 2년 뒤인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등과 연립정부를 건립하는데 이때 민족혁명당의 김규식은 임정 부주석으로, 김원봉 선생은 임정 군무부장에 추대됐다.

▲ 환국하기에 앞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자세를 취한 김원봉 선생(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키 큰 분). 앞줄 오른쪽 두 번째부터 신익희, 조소앙, 김규식, 김구, 이시영 선생.


좌우익 화해를 필사적으로 주도한…

해방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한사람으로 환국한 선생은 일관되게 주요 정치세력들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른바 좌우합작을 향한 의지였다. 하지만 1946년 1월 열린 임시정부의 비상국민회의 준비회가 우익 편향으로 기울자 김원봉 선생 같은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 선생은 결국 비상국민회의에서 탈퇴하고 말았다. 그것으로 1942년 충칭(重慶)에서 성립된 임시정부를 매개로 한 다양한 단체의 협동전선은 붕괴했다. 미군정에서 정보를 담당하고 군정청의 공식 전사 편수관이었던 리처드 로빈슨은 당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1946년 2월 1일 즈음 김구의 임시정부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진보적 분자들이 떠났다. 김규식과 김원봉이 김구의 지도권을 벗어나 그들의 당파를 구성하여 주도했다.” (리처드 로빈슨의 <미국의 배반>)

그러나 지금도 그런 편이지만 해방정국이 어떤 때인가. 우익과 좌익, 남한과 북한, 미국과 소련 등 대결 구도에서 하나만 골라야 한다는 이분법 진영논리가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우경화한 임시정부에서 벗어난 좌파 민족주의자는 왼편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좌파 민족주의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좁았다.

“김원봉은 우익과 좌익 사이에서 화해를 주선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실패하자…확실히 한 개인에 대한 위협은 그를 공산주의 노선에 있도록 했다.” (리처드 로빈슨)

▲ 1947년 3월 22일 김원봉 선생 등이 체포되었다는 경향신문 25일 자. 이때 선생은 미군정청 수사과장으로 변신한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와 위험한 동거

임정을 탈퇴한 임정 군무부장이자 광복군 부사령 출신의 좌파 민족주의자는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 결성에 합류했다. 드디어 공산주의자들과 위험한 동거를 했다.

하지만 선생은 민전 내에서도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에 매몰되지 않고 독자적인 정치생존의 길을 도모하고자 했다. 선생은 민전에 참여하면서 “민주주의는 독선이 아니며…남북 일체를 규합하여 속히 임시국회를 열어 강력한 우리의 통일 정부를 수립하도록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원봉은…공산당에 가입하기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와 여운형은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중도파였기에 공산당의 고질적인 전체주의와 소련의 권위를 거부했다.…김원봉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 기꺼워하지는 않았지만 별도리 없었다.” (리처드 로빈슨)

▲ 1947년 1월 25일 자유신문 기사. 경남 통영에서 김원봉 선생의 조선의용대 기록영상물이 상영되는 순간 우익단체 청년들이 몰려와 해설자를 구타하고 필름을 빼앗았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만삭의 부인 앞에서 붙잡힌 선생

그러나 미군정이 박헌영·이강국 등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검거령을 내리면서 김원봉 선생 등도 ‘민전’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도매금으로 넘겼다. 경남 통영극장에서는 조선의용대 기록영화가 백색테러를 당했다.

“1월 16일 경남 통영에서 김원봉 장군의 대일 실전 조선의용대 기록영화를 상영하던 중 광복청년단원 20여 명이 영화관을 습격해서 해설 중이던 황용암 씨를 무수히 난타한 뒤 통영경찰서에 인도했다. 경찰은 황 씨를 4일간 구금했다. 이 영화는 공보부의 검열을 받고 정식으로 허가받아 상영했는데….” (1947년 1월 25일 자유신문)

김원봉 선생은 1946년의 총파업과 10월 대구 항쟁, 그리고 남로당 결성 등을 거치면서 미군정 반공 정책의 속죄양이 되어 탄압받았다. 급기야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씻을 수 없는 수모까지 당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노덕술에게 체포되었을 당시 선생의 22살 연하 부인인 최동선은 출산이 임박한 만삭이었다. 둘째에게는 선생이 철창에 구금되었을 때 낳았다고 해서 철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원봉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해방정국은 무질서 그 자체였다.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정적을 마구잡이로 암살하고 납치·구금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송진우(1945년 12월 30일)-여운형(1947년 7월 19일)-장덕수(1948년 3월 12일)에 이어 김구 선생(1949년 6월 26일)까지 백색테러에 의해 암살되었던 시절이었다. 어느 한 편도 아닌 민족의 통일을 위해 좌우합작 운동을 끈질기게 폈던 선생의 목숨 역시 풍전등화였다.

김원봉 선생에 대한 인물평 중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평이 하나 있다. “약산 김원봉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미군청정의 역사편수관도 “비공산주의 계열의 좌익지도자인 김원봉이…”라든가, “여운형과 더불어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중도파였기에 공산당의 고질적인 전체주의와 소련의 권위를 거부했다”든가 하는 표현을 썼다. 특히 김원봉 선생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미군정청 관리는 “미국의 강력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한 사람을 잃은 것”이라고까지 했다.

▲ 노덕술의 죄상을 낱낱이 까발린 서울신문 기사. 일제강점기에 독립투사를 3명이나 고문 치사시켰다고 한다.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가했는지 유진흥이라는 독립투사는 ‘노 놈! 노 놈!’이라 울부짖으며 죽어갔다고 한다.

심지어 “만약 남북조선이 통일되었다면 북조선의 김두봉(1889~?)과 남조선의 김원봉은 조선공산당에 반대해서 민족적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는 조선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도 나왔다. 더 나아가 “그렇게 되었다면 통일 협상은 성공적인 결론을 얻고 또한 내전(한국전쟁)까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런 선생에게 후손들이 별 생각 없이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을까. 그런 사람에게는 임시정부를 담당했던 미 전략국 요원이었던 클레런스 윔즈의 ‘김원봉 보고서’를 보여주어야 한다.

“김원봉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단체들과 손잡고 일했다. 일례로 그는 황푸군관학교 졸업생들이 결성한 극우파인 남의사의 일원이었으며 그들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다.”

김원봉 선생은 독립을 이룰 수만 있다면 그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던 실용적 좌파 민주주의자였다. 모든 이데올로기의 장점을 가미하는 민주사회주의를 추구한….

▲ 1949년 2월 18일 경향신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이 반민특위 특경대에게 붙잡히자 “노덕술이는 나라에 필요한 기술자이니 풀어주라”고 강권했다.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과 김상돈 부위원장이 이 대목을 지적하며 개탄하고 있다.


김원봉의 천려일실

하지만 김원봉 선생에게 천려일실이 하나 있다. 월북이다. 선생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로 하고 신변에 어마어마한 위협을 느끼자 월북하게 된다. 충칭 시절 선생의 비서였던 사마로는 자서전에서 “북한으로 가지 말라는 말에 김원봉은 ‘나도 그리 가고 싶은 곳은 아니지만, 남한의 정세가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심지어 노덕술 같은 악질 친일 경찰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선생이 월북한 것은 1948년 4월 9일이다. 선생은 김구·김규식 선생 등도 참석한 이른바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남는다. 북한 정권에서 초대 국가검열상(감사원장)이 됐다. 선생은 북한에서 남북으로 갈라진 민전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이라는 단일기구로 통합하기도 했다.

1952년 7월 검열상에서 노동상으로 이동한 선생은 그해 박헌영·이강국 등 남로당계 인사들이 ‘미제 간첩죄’로 처형당했을 때도 건재했다. 57년 9월 노동상에서 해임된 선생은 1958년 9월 9일 조소앙의 장례식 때 참여한 뒤 소식이 끊겼다. 선생의 최후를 두고 여러 설이 나온다. 국제간첩 혐의로 숙청됐다는 설과 장제스의 스파이로 몰려 갇혔다가 자살했다는 설, 그리고 은퇴설 등이다.

▲ ‘대한민국 상훈’ 홈페이지에 기록된 노덕술의 상훈 기록. 한국전쟁 때 화랑무공훈장 2개, 충무무공훈장 1개를 받았다는 것이다.


떼죽음 당한 남한의 가족·친척들

남한에 남은 가족·친지들은 그야말로 떼죽음을 당했다.

9남 2녀의 형제 중 친동생 4명과 사촌 동생 4명이 이른바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임을 당했고, 아버지 김주익은 외딴곳에 유폐되었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이다. 그러나 이 단체의 좌익전향자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빨갱이’라는 이유로 군과 경찰에 의해 떼죽음을 당했다.

의열단장과 조선의용대장, 임정 군무부장이었던 김원봉 선생이었지만 ‘월북 빨갱이’의 낙인이 이런 참사를 빚었다.


‘기술자가 필요하다’며 부활한 친일경찰 노덕술

최근 들어 김원봉 선생의 서훈을 두고 해묵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사실 2005년부터 사회주의 운동가라도 항일투쟁을 벌여 나라를 되찾는데 몸과 마음을 바친 분이라면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을 수 있다. 그래서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역이지만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과 몽양 여운형 선생(1886~1947)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사 54명이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이름으로 국가유공자 포상을 하려면 매우 중요한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항일투쟁의 공적이 있는 사람이라도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거나, 또는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인물은 포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정권에서 초대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지낸 김원봉 선생은 해당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만 추가해보련다. 노덕술의 사례다. 노덕술은 일제강점기에 혹독한 고문으로 3명의 독립투사를 죽였던 악질 경찰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경험자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미군정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으로 중용됐다. 독립투사를 잡는 일제 경찰이었던 노덕술은 빨갱이를 탄압하는 반공 경찰로 변모했다.

김구 선생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대표주자인 김원봉 선생에게도 모욕을 주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경대가 노덕술을 체포·구금했다. 그러자 이틀 뒤 이승만이 기가 찬 명령을 내린다. 반민특위 임원들을 경무대로 불러 “노덕술이는 나라를 위해 요긴히 쓰일 기술자이니 석방하도록 하라”는 지시했다. 이승만과 이승만의 비호를 받은 친일세력의 방해 공작에 따라 반민특위가 와해하고, 마포형무소에 갇혀있던 노덕술은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공소기각으로 처리된다.

노덕술에 대한 단죄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노덕술은 1년 뒤인 1950년 헌병 중령으로 이직하여 1사단 헌병 대장과 부산 육군범죄수사대장(CID)으로 경력을 이어갔다. 노덕술은 이후에도 정치판을 기웃거리며 1960년 제5대 민의원 선거에 경상남도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노덕술은 1968년 4월 사망했다.

▲ 노덕술은 1960년 7월 29일 제5대 국회의원 선거(울산 을)에 출마했다. 그러나 노덕술은 1744표를 얻어 8명 중 6등에 머물렀다. 4·19혁명이 일어난 이후의 대명천지에서도 국회에 진출할 꿈을 꾸었다.


노덕술이 받은 훈장과 김원봉이 받지못한 훈장

그러나 노덕술과 관련해서 한 가지 기막힌 사실이 있다. 노덕술이 한국전쟁 때의 공로로 세 차례나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행정안전부가 운영하는 ‘대한민국 상훈’ 홈페이지는 “노덕술이 1950년 12월 30일과 51년 7월 8일 화랑무공훈장(4등급)을 한 번씩, 1953년 2월15일에는 충무무공훈장(3등급)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화랑 및 충무 무공 훈장은 한국전쟁 등에 보통 이상이나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주는 훈장이다. 한국전쟁 때 헌병사령부 등 소속이었던 노덕술이 어떤 무공을 세웠을까. 이것도 궁금하다.

악질 친일경찰 출신의 노덕술이 단죄는커녕 승승장구하면서 화려한 경력을 이어갔고, 국가가 주는 무공훈장을 세 번이나 챙겼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문제는 이들의 상훈을 취소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현행법인 상훈법에서 친일행적이 있다고 서훈을 다 취소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의열단장과 조선의용대장, 광복군 부사령, 임시정부 군무부장의 화려한 독립운동경력에도, 훗날 북한 정권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김원봉 선생과 악질 친일경찰 출신으로 해방 이후에도 고문치사 등의 죄악을 저질렀지만, 친일세력의 비호를 받아 무공훈장을 세 번이나 받은 노덕술…. 과연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참고자료>

김영범, <한국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과비평사, 1997

한상도, ‘해방정국기 김원봉의 정치활동-독립운동가에서 정치가의 길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8

염인호, ‘김원봉-의열투쟁과 무장독립운동의 선구자’, <한국사시민강좌> 47, 일조각, 2010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시대의창, 2008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MBC 특별기획 -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MBC문화방송, 2002

이원규, <약산 김원봉>, 실천문학사, 2005 옂


출처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의열단 '의백' 김원봉은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