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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가 88명 이른다던 ‘광주 카빈소총 희생자’는 단 1명뿐

신군부가 88명 이른다던 ‘광주 카빈소총 희생자’는 단 1명뿐
문형배 전 원광대 교수 최초 증언
‘시민군 오인사격·북 개입설’ 반박
“505보안대가 폭도·비폭도 분류”
카빈 희생자 28~88명까지 늘려
시민학살 책임 줄이려 조작 의혹

[한겨레] 정대하 기자 | 등록 : 2019-05-16 20:59 | 수정 : 2019-05-17 07:46


▲ 문형배 전 원광대 교수.
5·18 민주화운동 당시 카빈소총에 맞아 사망한 시민 희생자는 1명뿐이었다는 사체검안 의사의 증언이 최초로 나왔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계엄군의 학살 책임을 덜기 위해 사망자 가운데 상당수를 시민군이 사용한 카빈소총에 의한 사망자로 조작했다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증언이다. 그동안 5공 인사들은 시민 사망자 가운데 카빈소총 희생자가 28~88명에 이른다며 이것이 시민군 간 오인사격이나 북한군 개입 결과라고 주장해왔다.

문형배 전 원광대 의대 교수는 16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 민간인 희생자 164명 가운데 최초 검안 소견서에 카빈소총 총상 사망자는 1명뿐이었다”고 말했다. 전남대병원 의사였던 그는 5·18 당시 각계 인사 11명으로 꾸려진 사체검안위원회에 소속된 의사 2명 중 1명이다. 함께 참여했던 박규호 조선대 의대 교수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생존한 유일한 사체검안위 의사다. 사체검안위 위원들은 검찰·경찰·의사 등 49명이 참여했던 사체검시관들이 1차로 작성한 소견을 바탕으로 사체검안서를 작성했다.

사체 검안에 참여한 의사들은 총알이 몸속으로 들어간 ‘사입구’와 몸을 뚫고 나온 ‘사출구’의 외형적 상태만 기록했다. 보통 M16소총은 사입구보다 사출구의 크기가 더 크고, 카빈소총은 사입구와 사출구의 크기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문 전 교수는 “실제 탄환을 확인하기 전에는 정확한 분류는 불가능하다. 다만 카빈소총 사망자를 1명으로 기억하는 것은 당시 경찰관들이 사망 과정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1980년 8월 19일 광주지검이 분류한 민간인 희생자는 164명으로, 총상 사망자는 135명, 이 중 카빈소총에 의한 사망자는 28명이다. 이후 카빈소총 사망자는 계속 늘어났다. 1985년 10월 국무총리 국회 답변에선 37명으로 늘었다가, 1988년 2월 소준열 전 전투교육사령부 사령관이 88명으로 늘려 답변한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5월 21일 계엄군 집단발포 이후 시민들이 카빈소총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카빈소총 희생자를 늘려 시민군 간의 오인사격 등으로 희생된 것처럼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 1980년 8월 19일 광주지검이 분류한 민간인 희생자 164명 중 총상 사망자는 135명으로 이 가운데 카빈소총 희생자는 28명이다.

문 전 교수에 따르면, 애초 보안사령부 505보안대에서 이른바 ‘폭도’를 가려내는 과정에서 카빈소총 희생자로 둔갑된 이들이 최초로 나왔다. 그는 “검안감정서를 발부한 건에 대해 505보안대에서 (폭도-비폭도) 분류 작업을 했다”며 “당시 이른바 ‘폭도’(M16소총 희생자)를 ‘비폭도’(카빈소총 희생자)로 분류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사망자들 가운데 계엄군이 사용한 M16소총에 맞은 경우는 폭도(시민군)로 분류돼 장례비 등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폭도라는 오명을 벗거나 장례비 지원 등을 받기 위해 카빈소총 희생자가 늘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죽음은 시민군의 책임으로 전가됐다.

▲ 1980년 5·18 당시 총을 맞고 쓰러진 광주 서석고 전형문군이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출처  [단독] 신군부가 88명 이른다던 ‘광주 카빈소총 희생자’는 단 한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