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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농성·단식 줄잇는 불법파견, 정부 ‘땜질처방’이 악순환 부른다

고공농성·단식 줄잇는 불법파견, 정부 ‘땜질처방’이 악순환 부른다
파견제 도입 21년간 불법 판쳐
현대기아차·한국지엠 등 사내하청
법원은 원청 직접고용 판결하고
대상도 관리자들까지 확대 적용
노동부는 직접생산 공정만 인정
검찰은 솜밤망이 처벌에 그쳐
공공부문도 자회사 통한 정규직화
불철저한 행정 탓 근본해결 안돼

[한겨레] 전종휘 기자 | 등록 : 2019-09-01 19:08 | 수정 : 2019-09-01 20:24


▲ 고용노동부가 법원 판결에 따른 불법 파견 시정명령을 기아차에 할 것을 요구하며 단식 중인 김수억 금속노조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장이 지난 8월 20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 농성장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박종식 기자

대기업과 공공기관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고공농성과 단식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업체가 노동자들을 법에 금지된 파견 형식으로 데려다 쓴 탓에 직접고용을 해야 한다는 대법원 등의 판결도 잇따른다. 이처럼 도입 21년 된 파견 제도가 불법에 멍들며 노동 현장이 혼탁해진 데는 고용노동부와 검찰의 거듭되는 사용주 봐주기 행정과 처벌이 ‘불법의 악순환’을 조장하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김수억 금속노조 기아차비정규직지회장은 1일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35일째 단식을 이어갔다. 김 지회장은 노동부가 기아자동차에 불법 파견 상태에 있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라고 시정명령을 할 것을 요구한다. 문제는 기준이다. 김 지회장은 현대차와 기아차에서 이뤄지는 모든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법원의 일관된 판단 기준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이는 지난해 김 지회장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16일 동안 단식농성을 하자 노동부가 약속한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동부 생각은 다르다. 검찰이 지난 7월 박한우 기아차 사장을 기소하면서 간접생산 공정을 빼고 직접생산공정에 대해서만 불법 파견으로 판단한 기준을 준용할 방침이다. 당시 수원지검 공안부는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이뤄지는 조립 등의 작업에 투입된 사내하청만 파견법을 위반한 불법 파견이라고 판단하고 나머지 공정은 혐의 사실에서 뺐다. 노동부 관계자는 “특별사법경찰관인 근로감독관은 검찰의 지휘를 받는 게 맞다”고 말했다.

김 지회장은 “법원 판단 기준에 훨씬 못 미친 검찰의 판단 기준도 문제지만, 노동부가 수사절차가 아닌 행정명령을 하면서 검찰의 기준을 들이대는 건 더 큰 문제”라며 “그럼 왜 파리바게뜨 사건 때는 검찰 지휘 없이 자체 판단으로 직접고용 시정명령을 했느냐”고 지적했다.

법원의 불법파견 적용 기준은 계속 넓어지는 추세다. 김 지회장의 단식 기간에도 법원은 컨베이어벨트와는 거리가 먼 비생산 공정은 물론 사내하청 업체의 관리자도 불법 파견이라는 판결을 계속 내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 41부는 지난달 22일 현대차 공장에서 만들어진 차를 수출하기 위해 선적부두까지 운전해 이동시키는 일을 하는 사내하청 노동자 27명도 불법 파견이라고 선고했다.

김기덕 변호사는 “법원은 자동차 생산조립 공정과 서브 공정을 넘어 물류·운송까지도 근로자 파견을 인정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같은 날 같은 법원 민사 48부는 현대차 남양연구소 사내하청 업체에서 일하는 팀장급 관리자 5명도 불법파견 상태에서 일해 현대차가 직접 고용하라고 판결했다.

일주일 뒤인 29일엔 인천지법 민사 11부가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 105명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불법 파견을 인정해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불법파견 정규직화와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는 한국지엠 해고자 이영수씨는 1일 인천 부평구 한국지엠 정문 앞에서 고공농성 8일째를 맞았고 그 아래에서 해고자 25명이 단식농성 7일째를 보냈다. 1심에서 한국지엠 직원임을 인정받은 이씨는 11월 서울고법 항소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 대법원이 톨게이트 수납원 근로자 지위소송에 원고 승소 판결을 한 원심을 확정한 8월 29일 오전 대법원 앞에서 조합원들이 환호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과정에서도 사내하청 문제는 파열음을 내고 있다. 정부는 가이드라인에 자회사를 통한 정규직화를 허용했으나, 법원은 이들 사내하청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은 자회사가 아니라 본사가 직접 고용해야 할 노동자임을 확인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대법원에서 한국도로공사 직원임을 확정판결 받은 박선복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노동조합 위원장 등 5명을 포함한 톨게이트 징수 노동자의 서울요금소 지붕 고공농성은 이날로 64일째를 넘겼다. 1500여명의 해고자한테 자회사 이적을 요구해 온 도로공사는 3일께 대법원 판결 후속대책을 발표할 계획이다.

애초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7월 노동 유연화 명목으로 도입된 파견 제도가 국내 대기업과 공공기관에서 불법의 형태로 끊임없이 문제로 불거지는 데에는 제도 자체와 노동 행정의 허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근본적으로 사내도급이라는 노동력 공급 형태는 불법 파견 시비를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도급은 해당 업체가 자기 책임의 원칙에 따라 특정한 일을 완성해 납품해야 하는데, 사내도급은 하청업체 노동자가 원청의 지휘명령을 받아 일하는 게 불가피한 측면이 강하다.

불법 파견이 확인돼도 거듭되는 솜방망이 처벌은 사용자들의 불법을 부추긴다. 검찰은 노동부가 2004년과 이듬해 현대차와 기아차의 불법 파견을 적발한 사건을 무혐의 처분한 데 이어 2010년 7월 대법원이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최병승씨의 불법파견을 인정한 뒤에도 불법파견을 받아쓴 현대기아차 쪽에 대한 처벌에 나서지 않았다.

검찰은 노동자들의 고소·고발 5년 만인 2015년 12월 상시 불법파견이 아니라 한시·비상도급 혐의만 인정해 윤갑한 현대차 사장을 기소했다. 정몽구 회장은 처벌을 피했다. 지난 7월 검찰은 박한우 기아차 사장을 기소하면서 간접생산공정은 쏙 뺀 채 직접생산공정의 불법파견만 혐의 사실로 적었다.

민주노총 법률원의 권두섭 변호사는 “법원에서 불법 파견 판단이 계속 나오는데도 노동부와 검찰이 방치하다 보니 반복적으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고 짚었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도 “정부가 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은 문제가 공공 부문과 대기업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 한국지엠(GM) 부평2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2018년 말 해고된 이영수씨가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복직과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8월 25일 오후 인천 부평구 한국지엠 부평공장 정문 앞 9m 높이 비계틀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부평/신소영 기자

대선 때 “불법 파견이나 위장도급 판정 시 즉시 직접고용 제도화”를 약속한 문재인 정부가 임기 절반 가까이 되도록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빼고 민간부문 쪽 대책은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기선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현 정부는 민간부문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도로공사에서 볼 수 있듯 공공부문에서도 사실상 인력공급 자회사를 도입기로 한 것은 준비가 너무 안 된 상태에서 조급하게 시도된 정책”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은 “현재로썬 노동부가 철저한 근로감독 행정을 펴는 게 필요하다”고 밝혔다.


출처  고공농성·단식 줄잇는 불법파견 정부 ‘땜질처방’이 악순환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