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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곽상도와 동료들의 끔찍한 과거, 왜 사과 안 하나

곽상도와 동료들의 끔찍한 과거, 왜 사과 안 하나
무죄 확정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당시 수사검사 중 한 사람이 곽상도 의원
[오마이뉴스] 김성수 | 20.01.04 20:12 | 최종 업데이트 : 20.01.04 20:12


▲ 1면 머리기사로 강경대씨 사망 사건을 다룬 1991년 4월 27일자 <한겨레> ⓒ 한겨레

“지구 한쪽에서 일어난 한 행위가 결국 지구 다른 쪽에서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나비효과’를 나는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 아래는 필자가 9년 전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1991년 4월에서 6월 소위 ‘분신정국’이었다. 영국언론에서도 한국의 ‘분신정국’을 연일 보도했다.

당시 나는 무작정 영국에 유학 와서 영국의 장학단체에 장학금을 신청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400만 원의 장학금을 신청한 한 장학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면담을 했다. 그리고 1991년 6월 나는 그 단체로부터 신청한 장학금보다 10배가 많은 4000만 원의 장학금을 받았다. 너무나 놀라웠다. “무슨 착오가 생긴 것인가? 신청 액수보다 많은 10배를 주다니!” 지도교수도 놀라고 너무 반가워했다. 자기 생전에 장학금을 신청한 것보다 10배나 더 준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중에 나는 그 장학단체의 사무처장을 만났다. “아니 어떻게 신청한 장학금의 10배를 주시나요?”라고 놀라움에 물었다. 60대 초반의 나이가 지긋한 그 사무국장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단체에서 당신의 장학금 신청서를 검토 하는 기간 중 한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강경대 같은 분들이 한국에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당신이 노력 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장학금을 10배로 줍니다.”

나는 놀라웠다.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젊은이 강경대의 죽음에 내가 큰 빚을 졌다. 그 후 나는 그 장학단체 등의 도움으로 영국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도 모르는 사람들로 인해 도움을 받는다. 앞서 말했듯이 1991년 4월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대학생 강경대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나를 구했다. 그래서 2000년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항상 강경대와 같이 억울하게 생명을 국가폭력에 의해 잃은 분들에 대한 부채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 후 나는 노무현정부에서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그 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일을 했고 그 일을 통해서 국가폭력의 희생자인 다른 많은 강경대들을 만났고 그 분들의 눈물과 억울한 한을 보았다.

- ‘꿈을 포기 안해도 굶어 죽습니다’(2011년 2월 12일)


김기설 유서를 위기 돌파용으로 삼은 노태우 정권

강경대! 그의 삶과 죽음은 내 삶뿐만 아니라 곧 김기설강기훈의 삶에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1991년 4월 24일 강경대 치사 사건 후 2주가 지난 1991년 5월 8일, 김기설이 아침 8시 서강대학교 본관 옥상에서 온몸에 불을 지르고 분신 후 투신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현장에서는 김기설의 유서 2장이 발견되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김기설의 유서를 국정 전환 위기 돌파용 카드로 삼았다. 서울지검은 곧 김기설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아래 전민련) 동료 강기훈을 유서 대필자로 지목해 수사를 진행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아래 국과수)에 김기설의 유서와 강기훈의 필적감정을 의뢰해 “유서와 강기훈의 필적이 동일하지만 유서와 김기설의 필적은 다르다”는 감정회신을 근거로 1991년 7월 12일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해 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서울지검은 강기훈을 기소했다.

이어서 서울지법은 1991년 12월 20일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해 준 사실 및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인정해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했다. 그리고 서울고법이 유죄판결을 선고한 후, 대법원이 1992년 7월 24일 상고를 기각해 판결이 확정되었고, 강기훈은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94년 8월 17일 만기 출소했다.

사건이 발생한 1991년은 노태우 정권 후반기로 공안 통치, 김영삼·김종필과의 3당 합당 등 정치적 격변기였고, 수서지구 특혜분양사건, 국회의원 뇌물외유사건, 대구 페놀방류사건 등으로 대표되는 각종 비리가 발생한 시기였다.

특히 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범국민대책회의가 결성되었고, 그 후 전국적으로 집회와 시위가 연이어 일어나는 등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높았다. 이 기간은 강경대의 죽음을 포함 모두 13명의 젊음이 노태우 정권에 항의해 분신, 투신, 의문사로 사망하는 유례없는 비극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반면 연일 계속되는 분신정국에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는 글을 발표하고, 서강대 총장 박홍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근거 없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1991년 5월 8일 아침 김기설이 분신 사망하자 경찰은 분신 현장을 확인한 다음 사건 관계인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경찰은 검사의 지휘로 1차 현장검증을 했고, 서울지검 검사 및 수사진들과 2차 현장검증을 했으며, 당일 사건을 서울지검 강력부에 송치했다.

1991년 5월 13일 검찰은 강기훈에게 김기설을 소개받았다는 홍아무개의 진술을 받았고, 홍아무개는 이날 조사를 받으면서 김기설에게 받은 메모지와 함께 김기설이 자신의 수첩에 ‘복지다방 약도’와 ‘김기설의 전화번호’를 적었다면서 그 수첩도 검찰에 제출했다.

1991년 5월 14일 검찰은 강기훈의 형사사건기록을 입수했고, 1991년 5월 16일에는 강기훈의 집을 압수수색했다. 그리고 검찰은 유서를 비롯한 김기설과 강기훈의 필적에 대해 국과수에 필적감정을 의뢰했다.

▲ 1991년 5월 27일 강기훈씨가 명동성당에서 필적실연을 해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분신사망사건’이 ‘유서대필사건’ 되다

그러면서 검찰수사가 김기설 분신사망 사건에서 유서대필 사건으로 본격적으로 전환되었고, 검찰은 강기훈 등 대학생들을 소환해 조사했다. 강기훈이 1991년 6월 24일 자진 출두하자, 검찰은 그를 곧 구속했다. 그리고 구속 상태에서 강기훈은 자술서를 시작으로 1991년 7월 11일까지 총 9회에 걸쳐 피의자신문조서, 진술서 등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성해야 했다.

1991년 6월 28일 <한겨레>는 강기훈의 변호인들이 그가 구속된 지 3일 만에 강기훈을 처음으로 접견했고, 검찰에 더 이상 밤샘조사를 하지 말 것과 1주일에 두 번 이상 접견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검찰은 강기훈에 대한 철야밤샘조사를 거쳐 1991년 7월 12일 강기훈을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했고, 1991년 8월 12일에는 다시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를 추가기소 했다. 한편, 강기훈이 검찰에 출두한 이후에는 전민련 활동가들에 대한 소환조사도 연이어 이루어졌다. 특히 검찰은 전민련에서 김기설의 필적으로 제출한 업무일지에 임아무개의 필적이 있음이 확인되자 한때 임아무개를 유서대필 용의자로 지목하기도 했다.

한편 1991년 8월 28일부터 1991년 12월 20일 선고까지 서울지법은 강기훈의 자살방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총 12회에 걸쳐 공판을 진행했다. 당시 검찰은 변론종결 시 김기설에 대한 자살방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강기훈에게 징역 7년, 자격정지 3년을 구형했다.

이에 대해 강기훈의 변호인은 범죄의 일시, 장소와 방법이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건의 공소제기는 기각되어야 하며, 필적감정의 객관성과 공정성이 결여된 것이므로 증거가치가 없다고 무죄를 주장했다. 강기훈 역시 1991년 8월 29일 1심 1회 공판과 9월 11일의 2회 공판에서 자신은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한 사실이 없다며 강력히 혐의사실을 부인했다.

또한 강기훈은 당시 1심 1회 공판에서 검찰수사를 받으면서 잠을 재우지 않아 극심한 수면부족 상태에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검찰 수사시 이틀씩 잠을 안 재우고 모욕적인 손찌검을 당해 심리적 위축상태에서 만 하루만에 진술을 시작한 것은 불가항력에 의한 것이었다... 1991년 6월 24일 검찰에 자진출두한 후 처음 이틀간은 잠도 못자고 계속 조사를 받았고, 그 후에는 매일 오전 10시경부터 밤 12시 이후까지 계속 조사를 받았으며 토요일 하루는 구치소에 보내지 않고 밤샘조사를 하는 등 19일 동안 극심한 수면부족 상태에 있었다....

검사가 자백을 요구하며 회유와 협박을 했다... 유서대필을 자백하면 혁노맹(‘혁명적 노동자 계급동맹’-편집자 주)건 문제삼지 않겠다...(검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밝히지 않더라도 지금 공안부, 안기부, 기무사 등 입맛 다시는 곳이 많다. 우린 이것을 막으려고 한다. 사건 확대를 원치 않는다...

특히 (수사관들이) 참고인들을 모두 불러 수사하겠다는 말에 가장 타격을 받았다. 이아무개 등 학교후배들과 혁노맹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재조사한다고 했다. 상당히 참담했고 사실은 아니지만 차라리 내가 유서를 대필했다고 얘기하고 그 사람들한테 신체적 불이익이 가해지는 것을 막고 나중에 가서 법정에서 사실을 밝힐까, 어떻게 해서든 그 자리를 모면해보자는 등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나는 밤샘조사를 받았고, 기소되기 전까지 가족들의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검찰에 출두한 1991년 6월 24일 이후 밤을 새워 조사받은 것은 이틀 밤 2번, 하룻밤 3번 정도 된다. 조사실에서 밤샘조사를 하지 않을 때에는 보통 아침 10시경부터 밤 12시, 1시까지 조사받았고 제일 일찍 끝날 때가 밤 9시경이었다... 검찰에 출두하여 기소될 때까지 19일 동안에 검사실에서 검사입회하에 세 번 변호인 접견을 한 것이 외부인 접촉의 전부이다. 검찰에 출두한 후 가족이나 친지들을 처음 면회한 것은 기소 다음날인 1991년 7월 13일이었다.


“수갑 채워진 채 잠도 못 잤고 폭행과 폭언 난무”

지난 2006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 조사에서 강기훈은 이 사건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1991년 6월 24일 검찰에 출두한 첫날부터 서울지검 11층 특별조사실에서 10여 명의 검사와 수사관으로부터 집중적인 조사를 받았는데, 조사가 시작되면 이틀씩 잠을 안 재우고 진술을 강요하고, 의자에 앉지도 못하게 하고 선 자세로 조사를 받기도 했고, 검사나 수사관은 모욕적인 말과 행동, 때로는 손찌검까지 했으며, 그 과정에서 협박과 회유를 하기도 했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저의 가족과 여자 친구를 거론하면서 구속 운운할 때였다. 나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물리력은 참을 수 있었지만, 나로 인해서 받은 가족들의 상처는 무엇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멍에였다.

한편, 1991년 11월 20일 이 사건과 관련한 1심 8회 공판에서 당시 전민련 사회국 부장이자 대책회의 부대변인이었던 임아무개는 이렇게 진술했다.

1991년 7월 6일 검찰에 연행되어 유서대필 혐의로 조사를 받으면서 수갑이 채워져 잠을 자지 못했다...수갑이 채워진 채 한잠도 못 잤고 폭행과 폭언이 난무했고 고문형식으로 앉히고 수갑이 채워진 채 손을 올리게 했으며 허벅지를 때리고 뺨을 맞았다.

당시 강기훈과 임아무개를 이처럼 가혹하게 조사한 수사 검사 가운데 한 명은 현 토착왜구당 국회의원 곽상도였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지법 재판부는 1991년 12월 20일 강기훈에게 자살방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사실을 인정해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했다. 그러자 이에 대해 곽상도가 몸담고 있던 검찰은 원심의 형량이 가벼워 부당하다는 이유로 항소했고, 변호인은 공소사실 특정에 관한 형사소송법 법리를 오해했고, 증거 없이 사실을 인정하는 위법이 있다며 항소했다.

서울고법은 1992년 3월 12일부터 4월 20일 선고까지 총 6회의 공판을 진행했고, 1992년 4월 13일 변호인들이 변론재개신청을 했으나 서울고법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1992년 4월 20일 강기훈에게 원심의 형량대로 3년 징역을 선고했다. 강기훈의 변호인이 상고를 했으나 대법원은 1992년 7월 24일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판결을 확정했다.

팔자가 몸담았던 진실위는 지난 2007년 강기훈 사건 당시 검찰의 조사행태와 관련해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당시 수사기관에 의해 일부 사건에 대해 밤샘조사가 수사편의나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하더라도 수사기관이 합리적인 이유 및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휴식이나 수면을 취할 수 있도록 하지 않은 채 밤샘조사를 하는 것은 조사를 받는 사람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정당한 수사방법이라고 볼 수 없다.

서울지검의 수사과정, 법정에서의 진술 및 반대신문, 공개 기자회견 내용, 언론의 보도를 종합하면, 이 사건 수사과정에서 강기훈에 대해서 구속초기에 변호인 접견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밤샘조사를 한 일이 있고, 홍○○에 대해서 밤샘조사를 한 사실이 인정된다.


진실 규명

▲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던 강기훈씨가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에서 열린 재심 판결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환영의 뜻을 표하고 있다. 이날 이들은 “날조와 조작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정중히 사과하고 이에 가담했던 사법부와 검찰을 비롯한 권력기관은 반역사적인 거짓말잔치가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대안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 유성호

또한 1991년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 수사관으로 조직폭력, 마약사범을 검거, 수사하는 업무를 주로 했다는 라아무개는 2007년 진실위 조사에서 수사초기 강기훈이 쓴 글씨가 유서와 완전히 달라서 감정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고 이렇게 진술했다.

수사초기 나 역시 강기훈이 유서대필한 것으로 판단하고 심하게 추궁했지만, 당시 강기훈이 유서대필을 강하게 부인하기에 강기훈에게 ‘유서와 비교해 볼 터이니 네가 직접 글씨를 써봐라’고 얘기해 글씨를 쓴 적이 있는데, 당시 ‘원진레이온’이란 문구가 들어 가 있던 강기훈의 글씨는 누가 보더라도 유서 필적과 완전하게 달랐다.

당시 검찰 수사관들과 검사들이 강기훈의 필적을 국과수에 감정의뢰 한다기에 나는 ‘유서와 강기훈의 필적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감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수사진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 이러한 일 때문에 일정기간 수사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또한 당시 강기훈과 김기설의 국과수 필적감정과 공동심의와 관련해 진실위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필적)감정인 4명이 돌아가면서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나름대로의 판단을 가지고 토의를 했다”는 1심 5회 공판에서의 김○○의 증언과는 달리 진○○는 직접적으로 감정에 참여한 바가 없고, 말은 공동심의였지만 김○○이 내린 결론에 따라 감정서 회신 부본의 공동심의란에 서명하고 도장만 찍은 정도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고, 최○○ 또한 공동심의란에 도장 찍은 일이 전부이며 감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당시 감정에서 공동심의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감정인이 법정에서 국과수의 필적감정의 신빙성 여부가 유무죄 여부를 결정하는 주된 쟁점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동심의 관련 감정인 4명이 돌아가면서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나름대로의 판단을 가지고 토의를 했다고 중대한 사실에 대해 허위로 증언한 것이다. 이 허위증언은 공소시효가 지나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는 만큼...재심사유에 해당한다....당시 국과수 감정결과는 위와 같은 위법성이 있거나 자의적으로 동일필적으로 감정하거나 객관성이 결여된 문제점이 있어 신뢰할 수 없다.

1991년 당시 국과수에서 공동감정인으로 서명했고, 지난 2007년 국과수에서 필적감정에 다시 참여한 진아무개는 진실위에서 종전 국과수 감정이 잘못이라며 이렇게 인정했다.

저는 이번에 진실위원회에서 감정 의뢰한 감정 자료들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동안 제가 생각했던 것하고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냥 보더라도 유서와 다수의 김기설 글씨는 동일한 필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는데, 당시 김○○ 실장이 감정을 잘 못했다고 생각한다.

2007년 진실위에서 당시 국과수가 감정한 문건들에 대해 3개 사설감정기관에 각각 의뢰한 필적감정에 따르면 1991년 국과수 필적감정과는 정반대로 김기설의 유서와 강기훈의 필적이 다르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진실위는 “당시 국과수 감정인은 공동심의를 제대로 하지 않았음에도 공동심의를 한 것으로 감정서에 기재하고 법정에서 증언을 했고, 객관적 사실과 다른 자의적 감정결과를 회신해 강기훈으로 하여금 유죄판결을 받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며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했다.

▲ 2014년 재심 결심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강기훈씨가 서울고등법원을 나서고 있다. 이로부터 1년이 지난 2015년 대법원 판결로 최종 무죄가 확정됐다. ⓒ 유성호


그들은 피해자들에게 사죄나 용서 빈 적 없다.

그러나 곽상도 토착왜구당 의원을 비롯한 당시 수사 검사들은 2007년 진실위 진실규명 발표 후, 젊은 시절 무고함에도 자신 때문에 3년 징역을 산 피해자 강기훈에게 전혀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곽상도 의원은 진실위 발표 직후 언론인터뷰를 통해 “문제가 있었다면 당시 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느냐, 지금 와서 유서대필이 아니라는 것은 난센스 아니냐”고 반발했다.

강기훈은 진실위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지난 2008년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을 신청했다. 그 후 7년 만인 지난 2015년 5월 14일 사건발생 24년 만에 마침내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강기훈은 이 판결을 근거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재판을 신청했다.

그리고 또 2년 후인 지난 2017년 7월 7일 법원은 유서대필 조작사건 희생자 강기훈에게 국가의 민사 보상책임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재심 무죄 판결 2년, 사건 발생 무려 26년 만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국가와 문서감정인의 손해배상 책임만 인정했을 뿐 위법수사를 했던 수사검사 등의 책임은 일절 묻지 않았다.

강기훈은 지금 간암으로 투병 중이다. 하지만 가해자 중 한 사람인 곽상도 의원은 지난 2013년 3월 박근혜 정권에서 민정수석을 거쳐 현재 토착왜구당 의원으로 이른바 좌파독재저지특별위원회 위원을 겸하고 있다.


출처  곽상도와 동료들의 끔찍한 과거, 왜 사과 안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