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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1941년 김구와 김원봉, 2020년 조국과 우리

1941년 김구와 김원봉, 2020년 조국과 우리
[심용환의 역사로 생각하기]
[민중의소리]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장 | 발행 : 2020-01-28 17:10:14 | 수정 : 2020-01-29 05:36:41


“분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미국은 당시 중국의 재무부장관 격인 쑹쯔원(宋子文)에게 자문을 구한다. 쑹쯔원은 총통 장제스의 처남, 오랜 기간 중국 국민당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기 때문에 덕담 몇 마디라도 덧붙일 줄 알았으나 그러지 않았다.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분열되어 있다. 어떤 단체도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대표하고 있지 않다.’ 오죽하면 장제스가 김구와 김원봉 등을 불러들여 조선인 독립운동의 단결과 통합을 요구했다는 일화까지 전해질까.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군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충칭 폭격을 지원,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왜냐구요? 선생님들은 왜놈들에게 받은 서러움을 다 잊으셨단 말씀입니까? 그 설욕의 뜻이 아직 불타고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네 당, 네 당 하고 겨누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 분명히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러 온 것이지, 결코 여러분의 이용물이 되고자 해서 이를 악물고 헤매어 온 것은 아닌 것을 말합니다.”


▲ 미국 정보기관(OSS)에서 한반도 진공 훈련 뒤 여의도 진입작전을 앞두고 중국 시안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이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장준하의 ‘돌베개’에 나오는 구절이다. 목숨을 걸고 탈출, 6천리 길을 걸어서 찾아온 임시정부의 모양이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했었던 듯 하다. 1919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중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시절을 분열과 갈등 혹은 명맥유지로 버텼다. 3.1운동의 여파로 서울, 연해주 그리고 상하이 총 3개의 정부가 만들어졌다. 주로 4월 초에 결성이 되었는데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약 4개월간의 통합 노력을 통해 비로소 9월 초가 되면 상하이에 통합임시정부가 건설된다.

핵심은 안창호의 리더십. 그는 미주 교민들의 자금 지원에 힘입어 임시정부 건설을 주도했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임하거나 연해주 지역의 지도자 이동휘를 설득하는 등 개인적 역량으로 통합 작업을 수행한다. 잡음도 만만찮았다. 신채호는 반이승만에서 반임시정부로 나날이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문창범 등 상당수의 연해주 세력 역시 임시정부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1920년대. 이승만과 이동휘의 갈등은 극에 달했고 1921년에는 두 사람이 모두 임시정부를 떠난다. 외교독립방략의 실패, 사회주의의 대두, 새로운 독립방략의 필요 등으로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고, 장기간에 걸친 마라톤 토론이 벌어지지만 결과는 1919년과는 정반대였다.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었고 이들 모두가 임시정부를 떠난다. 이때부터 1941년 충칭에 정착하기까지 임시정부의 역사는 김구를 비롯한 몇몇 리더들의 조악한 할거에 불과했다.

1930년대 중반은 김원봉 리더십의 절정. 조소앙과 지청천 등이 합류하면서 임시정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세력을 통합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 독선적 리더십이 문제가 되어 다시금 사분오열이 된다.


임시정부 대부분의 시간 갈등과 분열에 시달려
1941년 독립의 비전 담은 ‘대한민국건국강령’ 발표
오랜 라이벌 김구와 김원봉, 가치 중심의 단결 이뤄

이후에는 상황이 도왔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독립운동세력은 전래없는 위기를 겪었고 김구 세력을 제외하곤 대부분 자금난과 조직난을 겪었기 때문에 임시정부로 몰려들 수 밖에 없었다. 1941년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발표한다.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제도(三均制度)에 역사적 근거를 두었으니... 사회 각층 각급의 지력과 권력과 부력의 향유를 균평하게 하야 국가를 진흥하며... 우리나라의 토지제도는 국유(國有)에 유범을 두었으니... 문란한 사유제도를 국유로 환원하려는 토지혁명의 역사적 선언이다.

... 부녀는 경제와 국가와 문화와 사회 생활상 남자와 평등 권리가 있음... 노공(老工) 유공(幼工) 여공(女工)의 야간 노동과 연령⋅지대⋅시간의 불합리한 노동을 금지함... 공인과 농인의 무료 의료를 널리 시행하야 질병 소멸과 건강 보장에 힘씀”


▲ 앞줄 왼쪽 네번째와 다섯 번째 홍진 임시의정원 의장, 김구 임시정부 주석, 앞줄 오른쪽 끝이 조선민족혁명당 김원봉. 1942년 임시의정원 의원 46명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자료사진

1940년대 통합의 방략은 ‘비전과 가치의 공유’라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초기에 개인의 리더십에 의존했다면 1930년대에는 당위성에 의존을 했다. ‘분열해서는 안된다. 좌우가 연대해야 하며, 민족주의자들 간의 우의와 단결이 중요하다.’ 그런데 분열은 왜 일어날까. 독립운동가 개인의 욕망 때문? 아니면 격동하는 세계질서로 인해 새로운 생각이 출현하고 각종 이견이 표출되기 때문은 아닐까? ‘대한민국건국강령’의 채택은 리더십이나 당위성이 아닌 강령에 의거한 통합의 상징이다. 평등한 가치에 근거한 새로운 건국, 토지 제도의 모순 혁파, 여성과 남성의 절대적 동등성, 확고한 노동권과 사회보장체제. 오랜 라이벌이었던 김구와 김원봉은 그러한 ‘가치의 범위’에서 타협하고 단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꽤 긴 시간 동안 ‘법무부 장관’ 조국을 둘러싼 몸살이 있었다. 찬성, 반대 그리고 비토와 침묵. 어쩌면 박근혜 탄핵 이후의 세상에 대해 각자 다른 생각을 가졌을 수많은 집단이 겪어야만 했을 숙명적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들 정치 집단이 각자 도생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고 그로인해 대한민국이 번영을 할 수 있다면 별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우리 사회에서 ‘통합’이라는 단어는 1988년 여소야대 정국에 놓인 민정당 국회의원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통용되었다. ‘왜 상처를 들쑤셔서 문제를 일으키는거야? 5공 비리건, 5.18광주 문제건 대충, 적당히 처리하는게 유리해’ 뭐 이런 식의 행태가 ‘통합’이라는 단어로 활성화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차라리 1941년의 선택이 훨씬 선구적이다.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할까.


출처  [심용환의 역사로 생각하기] 1941년 김구와 김원봉, 2020년 조국과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