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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독립운동 역사가 지워지고 있다

고려인의 독립운동 역사가 지워지고 있다
[인터뷰] 고려인 센터 ‘미르’ 김승력 대표
“연해주 고려인센터 리모델링, 독립운동 역사 지우는 것”

[프레시안] 박정연 기자 | 기사입력 : 2020.04.19. 13:50:20


지난해 4월,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소비자 조합원들과 함께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러시아에 다녀왔습니다. 하바롭스크와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아 100년 전 어느 날 어느 독립투사가 되어 들리지 않는 총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선연한 핏자국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동포인 고려인을 만났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고려인 문화센터를 운영하는 김승력 안산 고려인센터 ‘미르’ 대표를 만났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았던 지난해, 프레시안과 소비자 조합원들은 항일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좇아 러시아 연해주를 다녀왔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안 됐을 때 즈음 여행을 이끈 철도기관사이자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인 박흥수 대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우리가 다녀온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의 토대를 세운 사람의 동료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과 고려인에 대한 사료를 직접 수집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프레시안 기사를 보고 조합원들과 저희가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허망하고 분노했다고….”

불현듯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모든 조합원이 탄식을 내뱉던 순간,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문화센터에 갔을 때였다. 고려인 문화센터는 우수리스크 한인들의 거점이었고, 고려인의 정신을 담고 있는 ‘고려인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독립운동가들과 고려인의 사료가 빼곡했던 그곳은 박근혜 정부 시절 리모델링을 거치며 유교 정신으로 덧칠된 ‘민속 박물관’으로 변질해 있었다. (관련기사 : 연해주 독립운동가 59인을 지워버린 박근혜 정부)

고려인 문화센터에 전시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의 사료를 수집했던 사람은 김승력 안산 고려인센터 ‘미르’ 대표였다. 김 대표는 한국에서도 안산에 정착한 고려인을 위해 한국어 야학을 운영하며 여전히 고려인을 위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서른이 되던 1997년에 ‘망한 소련’이 궁금해 러시아 우수리스크로 가서 공부를 시작했다. 청년 유학생은 그때 고려인이라는 존재를 처음 인지했다.

“97년이 제가 서른 되던 해였는데, 저희 세대는 일종의 ‘빨간물’이 들어서인지(웃음) 망한 소련이 궁금했다. 소비에트는 붕괴했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답답했다. 러시아어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모스크바로 가려다 우연히 연결된 곳이 우수리스크였다. 우수리스크 사범대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우리랑 똑같이 생긴 고려인 아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관심이 갔다. 그때만 해도 고려인에 대해 지금처럼 조명되지 않았을 때다. 고려인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같은 민족임에도 무지했던 것에 대한 부채감을 느꼈다.”

▲ 고려인센터 ‘미르’ 김승력 대표.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

1999년, 우리민족서로돕기 재외동포사업본부에서 연해주 고려인 정착촌에 대한 실태조사를 김 대표에게 부탁해왔고 이를 계기로 자원봉사자로서 본격적으로 고려인 사회에 발을 디뎠다. 실태조사를 하며 직접 본 고려인의 현실은 너무 각박해서 뭔가를 해야 했다고 느꼈다. 고려인들은 군인들이 철수한 군 막사에서 난민처럼 살았다. 전기와 물이 끊긴 곳도 있었다. 우선은 한국의 가정과 고려인 가정을 일대일로 연결해 겨울나기를 도와주어야 했다. 고려인들의 연해주 정착에도 적지 않은 보탬이 되는 일이었다.

“연해주 6개 고려인 정착촌 중 하나였던 플라타노브카 정착촌 한 집에 지원금을 들고 방문했을 때, 전기가 끊어진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었다. 그날이 그 집 아이의 생일이었는데 빵 살 돈도 똑 떨어져 모두가 기운이 빠진 채였다. 그 집 어머니께서 저를 보시고 저의 방문이 머리 위에 내리는 첫 눈송이 같았다고 했던 때가 기억난다. ‘누군가의 머리 위에 문득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 같은 삶’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일을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고려인과 관계를 맺게 된 첫 계기였다.”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가 고려인의 역사를 지우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후 김 대표는 흩어져 있는 고려인들을 위한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2004년 본격적으로 우수리스크에 고려인 문화센터 설립을 위한 일을 시작했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재임 시절이기 때문에 정부 관료들도 고려인 지원에 관심을 가졌다. 돕기 사업을 했던 이강두 동북아평화연대 이사장이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으로 부임하기도 했다.

재외동포재단에서 고려인문화센터 건립 예산을 지원받았고, 동북아평화연대 연해주 사무국이 중심이 되어 사업을 진행했다. 김 대표는 1층 중앙에는 러시아 한인 역사박물관을 만들어서 고려인들의 역사와 정신을 기리고자 했고, 2층에는 작은 병원과 식당 그리고 고려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율 공간을 구상했으나 모든 게 뜻대로 되진 않았다. 자금 등의 문제로 고려인 문화센터 건설 조성 계획은 축소되기도 했다. 그렇게 첫 삽을 뜬 뒤로부터 완공까지는 5년의 세월이 걸렸다.

고려인 문화센터를 개관하기에 앞서 그는 직접 고려인의 가정을 방문해서 관련 자료를 모았고, 소비에트 연방 과학아카데미 출신의 이원용 박사와 러시아 전역의 문서보관소를 다니면서 사료를 찾아냈다. 그 결과 독립운동가인 최재형 선생의 고택과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장소 등을 발굴해냈다.

“고려인 후손들에게서 소중하고 구체적인 자료들을 얻었다. 우즈벡 고려인 공동체에서 할아버지 유품이 있으면 사진을 찍기도 했고 지역 향토사학자와 함께 발품을 팔기도 했다. 오랜 동료인 이원용 미르 상담국장이 직접 러시아 극동문서보관소의 자료를 찾아주기도 했다. 하바롭스크, 모스크바, 중앙아시아 문서보관소를 다 돌았다. 그 과정에서 전 러 한인공산당 깃발도 찾았고, 고려인 한 분이 사진집을 낸 것을 찾기도 했다. 그 사진집에는 연해주를 발판으로 삼았던 항일 혁명가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러한 자료사진을 받아 문화센터 한쪽 벽면을 전부 독립운동가들과 혁명가들의 사진으로 채웠다.”

▲ 고려인센터 ‘미르’ 김승력 대표.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

2009년 고려인 문화센터가 완공됐을 때 우수리스크 고려인들에게는 큰 경사였다. 처음에 김 대표를 믿지 못했던 고려인들도 꾸준한 그의 헌신 덕에 마음의 문을 열고 소통하기 시작했다. 문화센터 건물이 올라가고 형태가 눈에 보이니까 고려인들도 관심이 커졌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외교부의 간섭과 통제가 들어 오기 시작했다.

“동북아평화연대는 고려인 문화센터의 기틀을 마련하는 과제를 안고 이를 10년 동안 운영하면서 자립시켜놓는 게 목표였다. 설립 취지에 맞게 센터가 운영될 수 있도록 궤도에 안착시킨 후 고려인 단체에 이관할 계획이었는데 이명박 정권의 외교부에서 이런저런 간섭이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고려인 단체에 문화센터를 직접 운영하라고 이간질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치 우리가 고려인 문화센터를 가지고 기득권을 행사하려는 꼴이 되어서 어차피 이관할 계획이었던 것 깨끗하게 고려인 단체에 다 이관하고 빠지게 된 것이다.”

이후 집행된 2016년 박근혜 정권의 리모델링은 고려인 문화센터에서 가장 중요한 항일 혁명정신을 빼 버렸다. 이전 고려인 문화센터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이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했다. 고려인들은 봉건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연해주에 정착했다. 이 같은 고려인들의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 양반 자제만 글을 배울 수 있었던 서당과 조선 시대의 전통 혼례 복장 등이 항일혁명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저는 그렇게 바꿀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다. 고려인 문화센터가 고려인의 역사를 지우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다. 정말 어렵게 지은 공간인데 그렇게 바뀌고 비난을 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그곳은 첫째로는 고려인들 스스로가 자부심을 찾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둘째로는 연해주를 방문한 한국 분들께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려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고려인 박물관의 전시 내용은 특히 연세 드신 고려인들에게 반응이 뜨거웠다. 항일 독립운동 부분에는 글자 하나하나까지도 굉장히 신경을 썼다.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맡겼던 항일혁명 감수 내용을 어르신들이 싹 바꿀 정도로 잘 알고 계셨고 관심이 많았다. 그게 고려인의 자긍심이고 후세에 가르쳐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하셨다.”

하지만 그는 2010년부터 러시아 정부로부터 비자 갱신을 받지 못하고 있는 처지여서 직접 리모델링 이후 바뀐 고려인 문화센터를 볼 수 없었다.

“2010년 10월 비자 갱신차 한국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갈 수 없었다. 5년이 지난 2015년 블라디보스톡 공항까지 갔다가 못 들어가고 결국 돌아왔다.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추정컨대 러시아 정보 당국이 요구한 정보 제공 요청을 거절했던 것이 이유가 될 것 같고, 둘째는 우리가 고려인 정착 마을 사업을 지원했던 일들이 소수민족인 고려인 동포사회가 러시아에 대립하는 것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러시아 당국의 기우에서 비롯된 것 같다. 고려인 사회가 반러시아적인 집단이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다시, 안산에서 ‘투명인간’이던 고려인들과의 조우 “팔자 같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김 대표가 운영하는 ‘미르’에는 안산에 둥지를 튼 고려인들이 네 번이나 찾아왔다. 그의 오랜 동료인 미르의 이원용 상담국장이 이들을 맞았다. 어떤 이는 아이 유치원의 운영계획 수요조사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한글을 모르는 고려인이었고, 어떤 이는 국내 취직을 위해 출생신고서 번역이 필요하다며 찾아왔다. 또 어떤 이는 혼인신고서 번역을 위해 미르를 찾았다.

▲ 고려인 센터 ‘미르’를 찾은 고려인들.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

러시아를 떠난 그였어도, 고려인을 떠나지는 못했다. 그는 왜 한국에 와서도 그는 고려인들을 돕게 됐을까. 김 대표는 고려인들이 안산의 ‘투명인간’, ‘유령’이었다고 말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고려인들이 김 대표의 마음을 잡았다.

“2011년 러시아에 비자 문제로 못 들어가게 되어서 ‘잘됐다, 할 만큼 했는데 끝인가 보다’하고 고향에서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하면서 칩거를 했다. 그때 연해주에 청년회를 만들어서 활동했던 고려인 청년들이 저를 찾아 한국으로 왔다. 그들이 한국까지 왔는데 만나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그 친구들이 한국에 있는 자신들의 친구들도 만나기 위해 온 곳이 안산이었다. 그때 처음 안산에도 고려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선부동 땟골에 와서 그들과 며칠 지내보니 황당했다. 고려인들이 안산에 마을을 이루고 살 정도로 많았지만, 지역사회의 ‘유령’, ‘투명인간’이었다. 지자체도 이 사람들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모르고 이들도 한국 사회에서 이런저런 문제를 겪지만 기댈 곳이 없었다. 고려인과 관련된 활동을 안 했던 사람이면 몰라도 이걸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안산 근처 공단들은 외국인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일자리가 많았다. 선부동 땟골은 시화반월공단 근방에 있고 방값이 쌌기에 고려인들이 둥지를 틀 조건이 맞았다. 그해 2월 김 대표는 안산 선부동 땟골에 보증금 200에 월세 28만 원의 6평짜리 쪽방을 하나 얻었다. 한글을 잘 모르는 고려인들을 상대로 상담도 하고 한글을 가르쳤다. 작은 쪽방은 고려인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소문이 퍼져 한글을 가르칠 때면 콩나물 교실이 따로 없었다고 했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 공간이 그들을 전부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인들한테 50만 원씩 빌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0짜리 망한 PC방 터로 옮겼다. 그게 현재는 자리를 잡은 고려인 문화센터 ‘너머’의 원형이었다. 야학 수업은 12시가 다 되어서 끝났고 선부동 땟골이 아닌 다른 곳에 자리를 잡은 고려인들은 자신들이 있는 지역에서도 수업해달라고 요청했다. 야학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고 멀었기 때문이다.”

‘너머’가 지자체 지원도 받고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기에 새롭게 ‘미르’라는 고려인센터를 시작하게 되었다. ‘미르’는 ‘너머’의 확장 사업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고려인들에게 절실한 또 하나의 지원 사업이었다. ‘너머’가 포괄할 수 없는 지역의 고려인들 역시 많은 어려움에 부닥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르’사업에 같이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적 여건은 만만치 않았다. 자리 잡힌 ‘너머’에 비하면 ‘미르’는 모든 사업이 그렇듯 초기의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한다. 결국 ‘미르’라는 출발선에 다시 서게 됐다. 김 대표와 의기투합한 이원용 박사가 상담국장으로 나선 것은 큰 힘이 되었다.

▲ 고려인센터 ‘미르’의 이원용 상담국장과 김승력 대표.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

다시 지하 셋방 입구에 ‘미르’라는 작은 간판이 달렸다. 고려인 지원 센터 ‘미르’의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 공간에 방이 몇 개 나온다. 상담실로 이용하는 작은 방에는 컴퓨터 한 대와 작은 책상이 전부이지만 이곳을 찾는 고려인들에게는 기꺼이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공간이다. 지하 통로 끝 야학 교실로 쓰이는 방은 30여 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제법 넓은 곳이다. 교실 뒤편에는 후원자가 보낸 쌀 포대들이 쌓여 있었다. 김 대표의 뜻에 공감해 직접 농사지은 쌀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고려인들을 돕기 위한 손길은 작으나마 식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어지럽게 정리되지 않은 집기들 사이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훈장이 걸려있기도 했다. 인터뷰하는 그의 어깨너머로 지난 밤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가르친 한국어가 빼곡히 적힌 칠판이 보였다.

1997년도 우수리스크에서 고려인과의 만남 이후 약 30여 년 동안 고려인을 위한 돕는 활동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팔자 같다. 한국에 온 뒤로는 러시아에서 하던 일과는 다른 일을 하고자 했는데, 고려인 청년들이 찾아와서 또 안산에 이렇게 자리를 잡게 됐다. 또 이 활동만 하다 보니 이것 말곤 잘하는 게 없다. 30, 40대는 전혀 고민이 없었는데 요새는 늙어서 그런지 고민이 되더라. 삶을 어떻게 책임질 건가. 뭘 이루어 만들어 간다는 게 좋았던 것 같은데 이제 나이가 50이 넘으니 이러다 독거노인이 되어서 고독사 하는 거 아니야? 하는 고민이 들더라. 고려인을 위한 활동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언제까지란 기한은 없고 시간이 흐르고 자연스럽게 이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하지 않을까.”

김 대표의 얼굴엔 체념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기꺼이 걸어가리라는 의지를 담은 미소가 담겼다. 한의 세월, 혹독한 가난과 굶주림의 시간 속에 식민지와 항일 독립운동, 혁명의 시대를 달렸던 고려인이다. 긴 세월의 강을 지나 모국에 돌아와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이 안산에 있다.

▲ 고려인센터 ‘미르’.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

이 인터뷰 기사는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의 도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편집자


출처  고려인의 독립운동 역사가 지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