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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보다 언론? 두 번 고통받는 이천 참사 유족들

유족보다 언론? 두 번 고통받는 이천 참사 유족들
[민중의소리] 강석영 기자 | 발행 : 2020-06-01 10:18:33 | 수정 : 2020-06-01 10:26:56


▲ 12일 오후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물류창고 화재 현장에서 유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2020.5.12. ⓒ뉴스1

한익스프레스 이천 물류창고 참사 브리핑장. 김현주(가명) 씨 앞을 가로막은 건 방송사 카메라들이었다. 성인 키만 한 삼각대가 줄지어 있으니 누가 브리핑하는지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조사과정을 제일 먼저 알아야 하는 사람은 유족들이잖아요” 김 씨는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기다리기만 벌써 한 달째다. 지난 29일 김 씨가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안고 유족 70여 명과 청와대를 찾은 이유다. (관련기사 : ‘이천 참사’ 한 달, 사망 원인 알 수 없어 장례도 못 치르는 유족들)

우연한 화재가 아니라 ‘예견된 산재’라고 한다. 억울한 죽음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이가 왜 희생돼야 했는지,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유족들은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진상규명이 제대로 돼야 고인을 떠나보내고 남은 삶을 살 수 있다. “합동분향소가 너무 휑해요. 벌써 이렇게 (관심이) 사그라지고 흩어지면…” 김 씨는 불안하다. 수사기관 입만 쳐다보다가 예전처럼 ‘꼬리 자르기’ 처벌로 끝나는 게 아닐지 걱정스럽다.

▲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 유가족들이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중대재해(이천 화재) 책임자 처벌 촉구 및 규탄 기자회견에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0.05.29. ⓒ김철수 기자

김 씨에겐 지적장애를 앓는 남동생이 있다. 아직 아버지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분향소 생활이 답답한 동생은 집에 가자고 보채기만 한다. 동생이 불안해할까 봐 눈물도 꾹꾹 눌러 담아야 했던 김 씨다. “어제는 동생이 자다 깨서 아빠 꿈을 꿨다며 아빠 보고 싶다고 말하는데 너무 막막했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빨리 뭐라도 돼서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그런데 아버지 생각하면 아무것도 해결된 것 없이 돌아갈 수 없어요”

김 씨 아버지는 4월 유일하게 만근을 했다. 현장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아버지가 동생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한 것 같다고 김 씨는 전했다. 김 씨 아버지는 화재 당시 지상 2층에서 작업해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발견됐다. (발화 지점으로 추정된 지하 2층에서 발견된 시신들의 훼손 정도는 심각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버지 유품이 담긴 봉투를 열었는데 탄내랑 유독가스가 너무 심해서 목이 따갑고 기침이 계속 나는 거예요. 그걸 직접 맡은 아버지는 어땠을까요”


“아무것도 모른 채 기다리기 힘들다”
뉴스로 조사과정 접하는 유족들
12년 전보다 후퇴한 유족의 ‘알 권리’

‘유족보다 언론’이 우선되는 상황에 김 씨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 수사 상황을 묻는 유족들의 질문에 “수사 중이라 확인해 줄 수 없다”라는 답변만 한 달째 반복되고 있다. 반면 언론은 사건 초기부터 화재 조사보고서를 공개했고 화재 원인을 추정했다. 김 씨가 제일 화났던 순간은 화재 당시 지하 2층을 비춘 차량 블랙박스를 언론을 통해 접했을 때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요? 유족도 모르는 이야기가 정론처럼 보도되고 있어요”

유족의 알 권리는 12년 전보다 후퇴했다. 이 사건 ‘판박이’라고 지목된 2008년 두 차례 이천 물류창고 참사 당시 일주일 내외로 중간 수사결과 발표가 있었다. 유족 대책위원회 총무인 나성우 씨는 “아무 정보 없이 기다리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단 5%라도 좋으니 (수사과정을) 오픈해달라고 요청했는데 한마디도 못 들었어요. 정보를 얻을 통로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정부 관계자가 말하는 해결책도 허울뿐으로 느껴지죠”

유족들의 동의 없이 부검이 이뤄진 사례도 있었다. 시신이 훼손돼 신원확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부검 소식 먼저 전해졌다. 공식 사망 소식도 듣지 못한 유족들은 부검을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시신을 이송 중이라는 말에 즉각 반발했다. 돌아온 말은 “절차상 문제가 없다”라는 것뿐이었다. “우리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면 이렇게 화낼 이유가 없죠” 나 씨는 유족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비판했다.

장례식은 하염없이 미뤄지고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랑하는 이를 보낼 순 없었다. “당신이 왜 돌아가셨는지,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살 건지 알려드려야 저승 문턱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나 씨는 또다시 다가올 이별의 순간만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시신 훼손 정도가 큰 탓에 부패 속도가 빨라 화장부터 치러야 했다. 첫 번째 이별이었다. “장례를 지낼 때 또 이별해야 하잖아요. 한 번 이별도 아픈데… 유족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에요”

▲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 유가족들이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중대재해(이천 화재) 책임자 처벌 촉구 및 규탄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0.05.29. ⓒ김철수 기자


유족들 의심에서 시작된 진상규명
개인 잘못 아니라 구조적 원인 밝히려면
“유족들 직접 조사 참여해 진상규명 권리 보장”

유족들은 알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직접 진상조사에 참여하겠다고 요구했다. 수사기관은 만류했다. 건물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족들이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다. ‘유족이 조사에 참여한 경우는 없다’라는 말에 진짜 이유가 숨어있다. 4차 합동 감식 당시 유족들이 조사 참여를 강력하게 주장해 건물 초입까지 들어갔던 것이 전부다.

전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감정에 치우쳤다는 이유로 재난 피해 유족들은 진상조사 과정에서 배제되고 있다. 그러나 유족의 참여로 진실에 다가간 사례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권미정 김용균재단 사무처장은 “세월호 피해자들이 가진 의심이 침몰 원인을 조사하게 했고, 대구 지하철 참사 피해자들의 의문이 화재 책임을 기관사의 잘못으로만 몰아가면 안 된다는 걸 밝혀냈다”라고 말했다.

유족들의 의심에서 개인의 잘못이 아닌 구조적 원인이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고 김용균 씨 사고도 마찬가지다. 김 씨는 태안화력발전소 석탄이송용 벨트컨베이어 밀폐함 점검구 안으로 상체를 집어넣고 작업을 하던 중 벨트와 롤러 사이에 끼여 사망했다. 회사 관계자는 ‘김 씨가 하지 말라는 행동을 했다’라며 김 씨에게 원인을 돌렸다. 이 말에 김 씨 어머니 김미숙 씨의 의심이 시작됐다. ‘왜 상체를 넣어야만 했을까?’ 김 씨 사건 특별조사위원회 결론이 원하청 고용구조와 권한 체계로 도달할 수 있었던 시작점이었다.

이번 참사가 산재로 지목된 이유는 건설 현장의 ‘다단계 불법 하도급’, ‘초저가 낙찰’ 때문이다. 발주사→시공사→전문건설사→하도급사(불법)→개인 하도급사(불법)로 이어지는 구조에서 안전·보건관리 부실로 10년 주기 집단 사망이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진상조사가 개인의 잘못으로 귀결될 경우 발주사·시공사는 빠져나가고 현장 노동자만 가해자로 처벌받을 수 있다. 2008년 이천 참사 당시 용접 불씨가 원인이 됐다는 이유로 용접공이 구속기소 돼 실형 선고를 받았다.

권 사무처장은 “유족의 전문성 부족은 함께 현장에 들어가는 전문가들의 설명으로 해결될 수 있다. 재단은 유족이 유족 또는 노조가 추천하는 전문가와 함께 조사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라며 “지금의 전문성은 잘못됐다. 노동부 관계자 등 전문가들은 법과 규정만 따지고 있다. 이런 경우 피해자가 결국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유족의 조사 참여는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 유가족이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중대재해(이천 화재) 책임자 처벌 촉구 및 규탄 기자회견에서 영정을 어루만지고 있다. 2020.05.29. ⓒ김철수 기자


“산재 피해자는 시혜 대상 아니다”
“문제해결 주체인 유족들 권리 보장해야”

권 사무처장은 산재 피해자를 ‘권리를 침해당한 자’라고 규정했다. 작업하는 노동자가 개인적으로 조심하면 발생하지 않는 일이 아니라, 노동자의 권한을 넘어선 구조 속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점에서, 기존 사회 문제로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와 생명권, 행복권 등을 침해당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에 “산재 피해자들은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고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주체들”이라고 권 사무처장은 강조했다. 그는 피해자들에게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받을 권리 ▲대응과 수습과정에서 인도적 처우를 받을 권리 ▲사고원인조사 과정에 참여하는 등 진상규명의 권리 ▲모이고 말하고 요구하고 행동할 권리 ▲의심과 혐오 받지 않을 권리 ▲지원을 통한 치유 받을 권리 등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천 참사 유족들은 ‘돈 때문에 떼쓴다’라는 의심과 혐오까지 시달리고 있다. ‘시체 팔이’ 한다는 댓글까지 봤다는 나 씨다. “매일 저녁 6시 정기추도식 초반엔 두 세분씩 쓰러졌어요. 사람이 통곡을 한번 해보면 얼마나 체력을 떨어뜨리는지 알 수 있어요. 링거 맞으면서 하루하루 버티고 있죠. 저만해도 10kg 이상 빠졌어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요. 이런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죠”

유족들의 바람은 책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로 다시는 똑같은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 씨는 말했다.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유족들이 바라는 건 우리와 같은 유족이 또 나오면 안 된다는 거예요. 1998년 부산 사고가 있었고, 2008년 이천 사고가 있었어요. 지금 언론에서 나오는 모든 개선책이 2008년에 이미 다 나왔어요. 지금 상태라면 2030년에 분명히 우리 같은 유족들이 또 있을 겁니다”


출처  유족보다 언론? 두 번 고통받는 이천 참사 유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