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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불러 시위진압 계획... 56년 전 박정희의 ‘흔적’

군인 불러 시위진압 계획... 56년 전 박정희의 ‘흔적’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1964년 6.3 한일협정 반대운동과 비상계엄
[오마이뉴스] 김종성 | 20.06.02 20:49 | 최종 업데이트 : 20.06.02 20:49


배우 박신양이 주연한 <싸인>(SBS)이란 드라마가 있다. 피살자 사체에 남은 흔적(sign)을 토대로 법의학자가 피살자의 최후 순간을 추적하며 범행을 재구성하는 드라마다.

그런 ‘싸인’이 박정희 정권 때도 많이 남겨졌다. 박 정권의 핵심 중 하나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 연회장에서 박정희를 쏨으로써, 박정희가 평소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는 흔적을 남겼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사진은 1980년 1월 23일 박정희 시해사건 항소심 2차 공판 당시 사진. ⓒ 연합뉴스

박정희 지지자들은 박정희가 국민 경제를 위해 불철주야 일했다고 주장한다. 또 한겨울에 난방비를 아끼고자 내복에 의지했다고도 말한다. 근검절약을 실천하고자 칼국수를 즐겨 먹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불철주야로 일한다던 그는 10월 26일 야간에 두 여성 등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총을 맞았다. 그에겐 이런 자리가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일주일에 몇 차례 대연회니 소연회니 하며 이런 술자리를 가졌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김재규는 홀로 사색에 잠겨 있는 박정희를 쏜 게 아니다. 근무 중인 박정희를 저격한 것도 아니다. 품위 떨어지는 술자리를 즐기던 박정희를 쐈다. 박정희가 어떤 사람인지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줄 만한 ‘싸인’을 남긴 셈이다.

박정희 정권의 부조리를 증명하는 ‘싸인’은 박정희 자신에 의해서도 남겨졌다. 그중 하나는 박 정권의 부조리뿐 아니라 한일관계의 부조리, 나아가 미국 주도의 한미일 삼각동맹의 부조리까지 동시에 부각시킬 만한 것이다.


1964~1965년 박정희가 남긴 ‘싸인’

▲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왼쪽부터 정일권 총리, 박정희,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주일대사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일본 극우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식민지배 문제가 다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한국은 이미 다 해결된 문제를 툭하면 다시 들고 나온다’며 대한민국의 국가 신뢰도를 문제 삼는다. 박정희 때 식민지배를 다 청산했고 박근혜 때 위안부 문제가 다 해결됐건만, 대한민국이 툭하면 국가간 약속을 깬다고 주장한다.

1965년 한일협정은 문제의 본질인 식민지배와 무관한 것이었다. 이 협정을 통해 일본이 식민지배를 사과한 것도 아니고, 배상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한일협정이 체결됐다는 사실을 근거로 과거사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여기고 있다.

미국은 자국과 한국·일본을 한데 묶는 동아시아 해양권의 삼각동맹으로 동아시아 대륙세력인 북한·소련·중국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러자면 한국과 일본이 지난날의 기억을 뒤로 하고 무조건 단결해야 했다. 힘 센 일본이 식민지배를 사과할 리 없으므로 미국은 힘없는 한국이 적당히 타협해주기를 희망했다. 이 같은 희망에 따라 박 정권은 1964년 5월까지 체결·비준을 끝낸다는 목표로 한일협정을 추진했다.

하지만 박 정권은 커다란 벽에 부딪혔다. 국민들의 저항이 매우 거셌기 때문이다. 한국의 여론주도층은 분명히 친미·친일 성향을 보였다. 하지만 한국 국민들은 한일관계에서만큼은 오피니언 리더들의 의견을 추종하지 않았다. 그만큼 35년간의 한(恨)이 절절했던 것이다. 적당한 한일 합의로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학생과 야당 중심으로 일어난 거센 저항운동 때문에 박 정권은 그해 5월은커녕 6월이 되도록 목표 달성에 근접하지 못했다. 1964년 6월 3일에는 1만 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진출하고 파출소가 불타는 일까지 있었다. 6.3 한일협정 반대운동이다.


1964년 6월 3일... 비상계엄 선포, 그 이면엔

▲ 서울 문리대에서 행해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 국가기록원

당시 시위대의 구호는 한일협정 반대의 차원을 넘어섰다. 시위대는 5.16 쿠데타, 매판독점자본, 외세의존적 대외관계까지 맹렬히 비판했다. 외세에 빌붙는 토착자본과 그들이 주도하는 대한민국 경제체제까지 비판했다는 것은 한일협정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국민의 뜻을 거역하면서 대일 굴종적 조약을 강행하는 박정희 정권을 보면서, 국민들은 대한민국 정치·경제의 근본적 모순을 떠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한일협정을 추진하는 집단에게 정권을 맡길 수 없다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국민들의 의지는 이렇게 강렬했지만, 박정희는 협정 체결을 밀어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국민 의사를 거역하고 있다는 ‘싸인’을 남겼다.

박정희는 정상적 방법으로는 저항을 이겨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1964년 6월 3일 오후 8시를 기해 서울 지역에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한일협정에 동의하지 않고 있음을 비상계엄 선포라는 역설적 방법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는 계엄 선포에 즈음한 담화 발표에서도 동일한 ‘싸인’을 남겼다. 담화문에서 그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학생 시위’ 정도로 폄하하면서도 이 시위의 규모가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역설적 방법으로 드러냈다.

그는 “오늘 20:00시를 기하여 정부는 수도 서울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라며 “지금 가정과 일터에서 이 예기치 않았던 나의 갑작스러운 결정을 듣고 있는 국민 여러분들은 놀라움과 함께 불안한 감을 금치 못할 것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라고 운을 뗐다. 박정희는 발표문 곳곳에 반대운동의 규모를 드러내는 흔적들을 남겼다. 담화문 속에 이런 대목들이 들어 있다.

“민의에 의해 선출된 정부를 부정, 도괴(전복)시키려는 불순한 경향”

“합헌적인 절차에 의해 수립된 정부에 대하여 전면적인 부정으로 도전”

“우선 정권을 무너뜨려놓고 보자는 비지성적이며 무책임한 행동의 연속”

“파국을 예방하기 위한 효과 있는 사전 조치가 절실”

“나는 결코 이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 한국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민의에 의하여 수립된 정부가 그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입증시키려는 것”

“국가 자체의 통치 기능과 대의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엄연한 명제”

담화문은 A4 용지 3장 분량이다. 길지 않은 담화문 속에 위와 같은 표현들이 많다. 위에 열거한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이는 박정희가 볼 때도 한일협정 반대운동이 정권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억누를 길이 없기에 국군까지 시위 진압에 내세우는 비상계엄 카드를 꺼내들게 됐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민주공화국은 왕실의 나라도 아니고, 소수특권층의 나라도 아니다. 그야말로 국민 전체가 공동 주인인 나라다. 이런 민주공화국에서 국민들이 저처럼 무섭게 들고 일어섰다면, 한일협정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의사와 무관하다는 점이 명확해질 대로 명확해졌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미국

주인이 원치 않는 계약을 대리인이 임의로 체결했다면, 주인 입장에서는 계약 무효를 주장할 수밖에 없다. 박 정권이 국민들을 억누르고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담화문 곳곳에서 반대 시위의 위력을 드러낸 것은 한일협정이 국민 의사를 위반한 것임을 증명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이 점은 또 다른 ‘싸인’에서도 드러난다. 한국 국민들의 의사를 억누르면서까지 한일협정을 강행한 주체가 박정희 정권 외에 더 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 6월 3일 계엄선포 직전에 있었다. 자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위해 한일협정을 요구하고 중재해온 미국이 그날의 계엄선포에도 관여했던 것이다. 계엄선포 과정을 설명하는 1964년 6월 4일 치 <경향신문> 기사 ‘서울에 비상계엄 선포’엔 이런 대목이 있다.

“박 대통령은 계엄선포에 앞서 이날 하오 4시 40분부터 약 2시간 동안 헬리콥터로 청와대에 온 버거 주한미국대사, 하우즈 유엔군총사령관과 계엄령 선포에 따른 병력 이동 문제 등을 협의했는데, 미측은 비상계엄 선포에 반대의사를 전혀 표명하지 않았다고 정부 고위 소식통은 말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 볼 때 미국이 계엄 선포를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이 세간에 알려지면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시위대의 기세를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어떤 의도로 정부 고위 소식통이 미국대사와 미군사령관의 계엄령 지지를 언론에 흘렸든 간에, 위 기사에 소개된 장면은 한일협정 체결을 위해 한국민을 억압한 공동 주체가 미국과 박정희 정권이었음을 보여준다. 한일협정이 한국민의 의지와 무관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한일협정이 대한민국 주권자들의 의사와 무관하다는 ‘싸인’은 박정희의 비상계엄 선포, 박정희 담화문 속의 위기의식, 미국 대사와 미군사령관의 행보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일협정이 대한민국 주권자들과 무관하다는 ‘싸인’이 이처럼 명확한데도, 일본 정부는 한일협정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됐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간 일본이 대한민국 국민들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했는지가 이런 태도에서도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다.


출처  군인 불러 시위진압 계획... 56년 전 박정희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