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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Anti SamSung

이건희 ‘신경영’ 20년…삼성의 빛과 그림자

이건희 ‘신경영’ 20년…삼성의 빛과 그림자
한국의 삼성서 글로벌 삼성으로
[한겨레] 이형섭 기자 | 등록 : 2013.06.07 08:20 | 수정 : 2013.06.07 13:48


▲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에서 이건희 회장이 주요 임원과 해외 주재원 200여명을 앞에 두고, “지금처럼 해서는 잘해야 1.5류다. 자식과 마누라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신경영 선언’을 하고 있다. 삼성 제공

“회장이 되고 만 5년 몇개월간 계속 불량 안 된다, 불량 안 된다, 모든 것을 양을 없애 버리고, 질을 향해라. 그런데도 아직까지 양을, 양을, 양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에서 주요 임원과 해외주재원 200명을 앞에 두고, 이건희 회장이 상기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해 초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가전매장인 베스트바이에서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돼 있던 삼성 텔레비전을 두 눈으로 목격한 울분이 터져 나온 것이다. 삼성 제품은 당시 국내에서는 1위를 달렸지만, 해외시장에서는 ‘싸구려’ 취급을 받았다. 이 회장은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다.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고 선언했다. 이른바 삼성의 ‘신경영 선언’이다.

‘양에서 질로 전환하자’는 이 회장의 선언은 당시 그룹 내부에서도 많은 우려를 샀다. 이수빈 비서실장이 사장단과 함께 “양과 질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재고를 요청하자, 이 회장은 화를 내며 티스푼을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그만큼 이 회장의 결심은 단호했다. 이 선언 뒤 삼성전자는 불량품이 있을 경우 해당 생산라인 가동을 전면 중단하는 ‘라인스톱제’를 도입하는 등 품질 강화에 ‘올인’했다. 1995년 3월 ‘무선전화기 화형식’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당시 무선전화기 사업부는 무리하게 완제품 생산을 추진하다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았다. 이 회장은 “신경영 이후에도 이런 나쁜 물건을 만들고, 엉터리 물건을 파는 정신은 무엇인가”라고 질책하며, 불량품 15만대(150여억 원어치)를 수거해 화형식을 통해 전량 폐기 처분했다.

신경영 선언 이후 이 회장의 ‘말씀’은 삼성의 지상과제가 됐다. 6월부터 8월 초까지 프랑크푸르트, 스위스 로잔, 영국 런던, 일본 도쿄 등에서 이어진 회의와 특강에서 이 회장이 한 350시간, A4용지 8500장에 이르는 어록은 항목별로 정리돼 삼성의 행동강령이 됐다. ‘삼성헌법’이라 불리는 인간미, 도덕성, 예의범절, 에티켓 등 4개 강령과, 삼성인들이 항상 알고 행해야 한다는 ‘지행 33훈’ 등은 이렇게 탄생했다. 특히 임원들에게는 회장님이 말씀하신 ‘어록’이 계속 갱신돼 전달되며, 회사에서 이게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하는 의무가 지워진다.

삼성의 한 임원은 “외국에서 보면 무슨 왕조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점이 삼성 고유의 경영시스템으로 자리잡고 강점이 됐다. 무엇보다 실적을 봐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회장의 ‘말씀을 받들며’ 지낸 지 20년이 된 현재, 삼성의 성장은 눈부시다. 1993년 29조 원이었던 그룹 매출은 지난해 380조 원으로 13배 늘어났고, 세전 이익은 8000억 원에서 38조 원으로 47배, 직수출은 107억 달러에서 1572억 달러로 15배 늘어났다. 디(D)램 하나뿐이었던 삼성의 월드베스트(세계시장 점유율 1위) 제품은 20개가 됐다. 실적만 놓고 보면,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엄청난 성과를 거둔 셈이다.

1993년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꾸자”
이 회장 ‘말씀’ 삼성의 지상과제로
20년만에 매출 13배…눈부신 성장

“일본·미국식 경영 장점 결합 모델”
“이회장 입헌군주식 경영이 비결”
‘신화’ 이어질지는 아직 불투명해


이런 성공은 이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을 빼고서는 설명하기 힘들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서울대 경영대 송재용·이두용 교수는 “삼성은 전통적인 일본식 경영에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신경영을 도입한 이후 미국식 경영을 적극 접목하면서 두 가지 경영의 장점을 결합한 특유의 삼성식 경영을 만들어 냈다”고 분석했다. <삼성과 소니>를 펴낸 장세진 카이스트 교수(경영대학원)는 “삼성전자의 경쟁력은 무엇보다도 스피드이며, 이런 스피드는 삼성전자의 중앙집권적 의사결정 구조와 실행을 중시하는 기업문화 등 군대조직을 방불케 하는 일사불란한 조직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삼성의 성공 비결을 이 회장이 직접 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데서 찾는 의견도 있다. 이 회장은 재임기간 동안 1996년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고, 2005년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폭로 등의 사태가 연속적으로 터지면서 경영 전면에 나서지 못했던 기간이 상당히 길었다. 이 기간 내내 이학수 부회장 등이 그룹의 실무를 총괄했다. 이 회장이 직접 나서서 지휘했던 자동차 사업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이 회장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아니한다’는 입장을 취하며 실무 대부분의 전권을 이학수 부회장 등 전문경영인에게 맡겼고, 이런 구조가 삼성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신경영 선언’ 체제의 성공이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느냐다. 안 그래도 지난해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전체 상장기업의 30.4%에 이를 정도로 한국 경제의 삼성 의존도가 커졌고, 삼성전자 영업이익 중 67%가 스마트폰 분야에서 나오는 등 집중화 현상이 심화되는 등 위험신호가 켜진 상황이다. 이건희 회장 때 잘 작동했던 경영체제가 후계자인 이재용 부회장 체제에서까지 잘 작동할지도 미지수다. 재계 한 관계자는 “삼성 쪽은 부인하지만, 실제 이재용 부회장이 단독으로 이룬 경영성과가 없다는 게 정설이며, 이 회장만큼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그룹을 이끌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쉴 새 없이 위기의식을 부추기며 직원들을 독려하는 체제 아래 누적된 피로도도 문제다. 이건희 회장이 ‘위기론’을 설파한 이후 삼성그룹의 컨트롤 타워인 미래전략실은 현재 1년 가까이 새벽 6시 출근을 계속해오고 있다.





신경영 20년 그림자

“존경받는 기업돼야 한다”는 지시 지켜졌나
엑스파일·탈법 승계·무노조…
삼성-반삼성 구도 해결노력 없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신경영 어록’을 집대성한 ‘지행 33훈’의 제일 처음 항목은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파악하라”는 것이다. 삼성은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재계 관계자들에게 ‘삼성 신경영 20년’의 평가를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명과 암이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의 국가경제 기여도나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준 일 등은 분명히 평가해 줘야 하지만, 상당한 부작용도 낳았다는 것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삼성의 가장 큰 문제는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는 배금주의를 낳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예가 ‘엑스파일’ 사건과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의 비자금 폭로 사건이다. 엑스파일 사건은 이학수 삼성전자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나눈 대화를 국정원이 도청한 사건인데, 삼성이 정·관계 인사를 어떻게 관리하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삼성은 검찰에서 끝내 무혐의 처분을 받았고, 도리어 삼성한테 ‘떡값’을 받은 검사를 공개한 노회찬 의원만 올해 2월 의원직을 잃었다.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폭로 사태 또한 선대 회장이 물려준 재산이라는 삼성의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여 조세포탈 혐의로만 기소됐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을 통한 탈법 승계 문제도 여전히 삼성의 발목을 잡고 있다. 또다른 대기업 임원은 “삼성이 이재용 부회장에게 매끄럽지 않은 방식으로 지배구조를 승계한 일은 앞으로 여전히 삼성에 잠재 이슈로 남을 것이고, 이재용 부회장이 전면에 나섰을 때 문제가 계속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순환출자를 통해 일가가 그룹을 장악하고 있는 점도 계속 지적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비자금 문제의 여파로 2008년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날 때 “(지주회사 전환 문제를) 시간을 두고 검토하겠다. 다만 순환출자 문제는 삼성카드가 보유한 에버랜드 주식을 4~5년 내에 매각하는 등 계속 검토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주회사 전환 문제는 지금까지도 전혀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고, 삼성카드의 에버랜드 주식 역시 금융위가 금산법 위반으로 강제처분명령을 내린 이후에나 일부 매각한 뒤 5%가량을 아직도 갖는 있는 등 순환출자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삼성의 악명 높은 무노조 원칙이나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의 백혈병 문제 또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이 회장이 사업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사회 지도층으로서의 직분을 다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사회 내에서 삼성 대 반삼성의 구도가 짜여져 반목하고 있는데, 이를 앞장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지행 33훈’의 마지막 항목은 ‘존경받는 국민기업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지금 삼성은 그러할까.


출처 : 이건희 ‘신경영’ 20년…삼성의 빛과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