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골방의 혁명가 혹은 돈키호테
전쟁시 주요 시설 진입과 무기 조달 논의한 ‘이석기 녹취록’, ‘내란음모죄’ 증거로 공개돼
유권자 기억 속 ‘종북’ 딱지 붙는 통합진보당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한겨레] 김외현 기자 | 등록 : 2013.09.03 15:15 | 수정 : 2013.09.03 15:28
시계를 잠시 되돌려보자. 박근혜 정부 출범 이래 지난 8월 중순 남북 간에 개성공단 정상화 합의 전까지, 남북관계는 경색 일로로 치달아왔다. 2월에 북한은 3차 핵실험을 했고, 3월엔 정전협정 무효화를, 4월엔 영변 핵시설 재가동을 선언했다. 뒤이어 개성공단을 폐쇄했다. 한-미 합동훈련과 그에 반발하는 북한의 전쟁 위협이 반복됐고, 한반도엔 전쟁 위기가 엄습했다.
경색 일로를 달리던 와중의 강연회
누군가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낙관하며 평소 같은 삶을 살았고, 누군가는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대비’에 나섰다. 외국의 저명한 종군기자들이 한국에 속속 입국한다며 전쟁이 임박했다는 보도도 있었고, 한국인들은 전쟁 위기에도 이상하리만치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는 외신 기사도 있었다. 다른 한편엔, 한 연예인이 방송에 나와 전쟁 공포에 ‘벙커 부지’를 보러 다닌다고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상반기는 그런 시절이었다.
4월 중순까지 고공행진을 거듭하던 위기 지수가 잠시 소강상태를 맞은 5월12일 일요일 저녁 서울 마포구 마리스타교육수사회 강당에 13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도시-농촌 직거래 행사’인 줄 알고 장소만 빌려줬다는 수사회가 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대관료가 저렴한데다 서울에 위치했음에도 숙박이 가능하다는 등의 이유로 진보 진영 정당 및 단체의 전국 규모 행사가 종종 열리는 곳이다. 모임에서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강연이 있었다.
모임의 성격과 이날 행사 내용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엇갈린다. 통합진보당 쪽에선 김홍렬 경기도당 위원장이 도당 임원들과 혐의해 소집한 당원모임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석기 의원을 강사로 초빙해 전쟁 반대와 평화 실현을 위한 목적으로 정세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서울을 둘러싼 경기도 모임을 서울에서 연 게 이상할 건 없다. 외려 편하다. 이때가 전쟁 위기로 치닫는 것으로 인식되던 시점이라는 걸 고려하면, 주제도 시의적절해 보인다. 이 의원은 8월30일 기자회견에서 “(강연에서) 모든 전쟁을 막으려고 했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민족의 공멸이 있기 전에 평화를 실현하자는 뜻이었다”고 했다.
반면 이들에게 내란 음모 혐의를 적용하고 있는 국가정보원은 이들이 반국가 성격의 지하단체인 ‘RO’라는 조직으로, 이날 모임의 성격은 “남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비밀 회합이었다고 보고 있다. RO는 ‘혁명 조직’(Revolutionary Organization)을 줄인 거란 설이 유력하지만, 고유명사인지 보통명사인지는 불분명하다. 국정원은 RO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1992~97)의 잔존 인원들이 조직 재건을 위해 만든 모임으로 본다고 한다. 평소엔 ‘산악회’라는 이름을 썼다는 얘기도 있지만, 실제 등산을 다니는 모임인지는 알 수 없다.
체제에 불만이 가득한 청년 몽상가들?
8월30일 <한국일보> 등 일부 언론을 통해 공개된 이날 모임의 녹취록은 국정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상황 인식은 마찬가지다. 이 모임을 주도하는 것으로 지목되는 이 의원의 발언 몇 대목을 녹취록에서 그대로 옮기면, ①“전쟁이 구체화되고 살인과 살의와 모략과 민족적 재난을 일으킬 수 있는 침략의 마수와 침략의 노골적인 생각이 적나라하게 논의되고 있는데” ②“우리가 총보다 꽃이라는 것을 지향하는 것은 분명하나, 때에 따라서는 꽃보다 총이라는 현실 문제 앞에” ③“남녘의 혁명가는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과연 무엇을 할 것이냐”는 게 뼈대다. 쉬운 말로 옮기면, ①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시기에 ②평화가 아닌 무력 수단도 동원될 수 있는 현실에서 ③우리는 무엇을 할 거냐는 인식이다.
다만, 주목해야 할 것은 전쟁 발발시 ‘어디로 피신할 것인가, 어떻게 피란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반 시민들과 달리, 이들은 ‘혁명가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물음을 부여잡고 논했다는 것이다. 곧 전쟁 시기 사회 혼란을 계기 삼아 혁명을 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의원의 발언 곳곳에서도 전시를 틈타 사회 변혁을 꾀하려는 의지는 뚜렷해 보인다.
“군사적인 위협 국면이 더 조성되면 뭐든 이룰 수 있는 거야.”
“지배세력이 60여 년 동안 형성했던 현 정세를 무너뜨려야 돼요.”
“우리가 자주된 사상, 통일된 사상, 미국놈을 몰아내고 새로운 단계의 자주적 사회, 착취와 허위 없는 그야말로 조선민족의 시대의 꿈을 만들 수 있다.”
“그야말로 끝장을 내보자. 그래서 이 끝장내는 역사의 진행에 새로운 전환기를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바탕으로 다가오는 전투를 준비하는….”
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추상적으로 혁명을 논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다. ‘골방에서 혁명을 논하던 식민지 청년들’이란 상투적 표현엔 ‘탁상공론’에 가깝다는 비아냥마저 섞여 있다. 심지어 전쟁 위기로 일컫는 상황에서, 전쟁 탓에 강제 징집당할 위기에 처하는 등 불만이 가득한 청년들의 몽상이었다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과연 그랬을까?
다시 5월12일 모임으로 돌아가보자. 이석기 의원은 “물질·기술적 준비 체계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고 말한 뒤, “나중에 동료들과 토론에서 한번 고민해보세요”라고 한다. 녹취록을 보면, 이날 모임은 이석기 의원의 강연 뒤 질의응답이 있었고, 자유토론과 권역별 토론, 그리고 권역별 토론 내용 발표가 이어졌다. 이석기 의원은 강연 이후 토론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8월30일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끝에선 이 의원이 마무리 발언을 했다. 여느 조직이 실시하는 워크숍과 형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녹취록의 권역별 토론에선 경기 남부 권역의 이상호 경기진보연대 고문의 발언 분량이 가장 많다. 이 고문의 주요 발언은 크게 주요 시설 파괴 방안과 무기 마련 두 갈래로 나뉜다.
① 주요 시설 파괴 방안
“위장을 하고, 우리가 전시에 차단해야 하는 활동에 대해서는 타격을 주자. 통신을 얘기한 거고, 그다음에 이제 유류고….”
“평택에 있는 유조창, 이게 세계에서 가장 큰 (유류) 저장소예요. …탱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니켈합금이에요. 총알로 뚫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거든요.”
“(가장 중요한 통신시설은) 혜화동하고 분당에 있는데, 거기에는 쥐새끼 한 마리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진공상태가 돼야 되기 때문에 몇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하는 문제가 있고….”
“안에 있는 사람하고 협조관계가 있으면 안에 있는 사람한테 안내를 받거나 그 사람하고 같이….”
② 무기 마련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 장난감총 있잖아요. 그게 80만~90만원짜리(급으로) 들어가게 되면 가스 쇼바(완충기)가 있는데 개조가 가능하며….”
“인터넷에서 무기를 만드는 것들에 대한 기초는 나와 있어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중학생들도 인터넷에 들어가가지고 폭탄을 만들어가지고 사람을 살상시킬 만큼….”
내란 음모, 목적성·계획성·실행능력 갖춰야
그의 발언을 요약하자면, ‘주요 시설에 타격을 줘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진입이 어려우니 내부 동조자를 찾아야 한다’ ‘장난감총을 개조하거나 인터넷 정보를 활용해 무기를 만들자’는 얘기다.
이 고문은 토론이 끝난 뒤, 각 권역 대표자들과 더불어 결과 발표에 나선다. 그는 “항일의 시기에 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시기에도 (총기를) 만들어 썼는데, 손재주가 있고 결의가 있으면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했다”고 했다. 다른 권역 대표들은 “연락 체계, 후방 교란, 무장과 파괴는 어떻게 할 거냐에 대해서 팀을 구성하고 대응책을 준비해가야 한다” “자기의 하나뿐인 목숨도 걸어야 되고, 동지들과 함께 생사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확인했다” 등의 발언을 내놨다.
국정원은 이같은 발언을 주요한 근거로 RO 관계자들에게 내란 혐의를 적용했다. 이상호 고문의 발언은 그의 혐의로 옮겨졌다. 그는 “경기도 남부 소재 유류저장시설 및 통신망 등 주요 국가기간시설의 방호 현황과 구체적 파괴 방안 등에 대해 협의·통모 후 이를 전 조직원 앞에서 발표하는 등 내란을 예비·음모”한 혐의로 지난 8월28일 국정원에 체포됐다.
형법 제87조는 “국토를 참절(베고 끊음)하거나 국헌(헌법과 헌법질서)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것을 ‘내란’으로 보고, 실제 내란에 이르지 않았다 해도 이를 위해 예비(물자 준비 등) 또는 음모(계획 및 공모)한 경우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이나 유기금고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내란의 ‘수괴’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 형을 받게 된다. 헌법은 대통령도 내란죄를 범하면 재직 중이라도 형사상 소추를 받도록 규정한다.
죄목이 무거운 만큼, 실제 적용은 엄격해야 한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내란죄가 구성되려면 △국헌 문란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겠다는 목적성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는 계획성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실행 능력 등을 갖춰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 교수는 8월29일 인터뷰에서, “농담 삼아 ‘이 세상을 바꿔보자, 엎어보자’ 이렇게 한다고 내란 음모가 되는 게 아닌 것처럼 구체적인 계획과 능력이 있을 것이 요구된다. (이번 사건은) 조건이 전쟁이 발발할 경우라고 돼 있는 걸로 봐서는 시기적으로 명확하게 특정돼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수준에서 (계획이) 수립돼 있는 단계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우리나라가 불법적인 무기류에 대한 유통 규제가 상당히 엄격한 편이다. 그래서 실행 능력이 현재 확보돼 있는 상태인가 하는 것도 상당히 의문이 있는 상태다. 그런 걸로 보면, (내란 목적이 있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 내란음모죄에 해당한다고 이야기하긴 어렵지 않나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내란 실행 능력, 즉 국정원이 지목한 이른바 RO가 동원할 수 있는 조직력 및 무장력에 대해서는 국정원이 충분한 증거를 내놓을 필요가 있다. 5월12일 모임에서 나온 발언과 관련해, “장난감총, 비비탄총 개조하여 무장하고, 손재주로 총기를 깎아 만들고, 중학생들도 만든다는 사제 폭탄 제조법을 익히고… 딱 소설 속 돈키호테의 무장 수준”(진중권 동양대 교수)이란 비아냥이 나온다.
“딱 소설 속 돈키호테의 무장 수준”
국정원은 ‘감청 영장’을 발부받아 2010년부터 RO 조직원들의 휴대전화 및 전자우편을 감시하는 등 3년 간 내사를 진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기간 얼마나 수사에 진전이 있었는지 이목이 집중된다. 또 녹취록 작성 주체가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내용에서 동영상 파일 확장자(mp4)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동영상이 있을 거란 추측도 나온다. 추가 녹취록이 나올지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그러나 국정원이 구체적인 증거물을 더 이상 제시하지 못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8월29일 자신의 블로그에 “만약에, 녹음 파일 하나와 익명의 정보원 진술, ‘종북 성향이 의심되는 문건 몇 개’ 정도가 다라면, 그래서 결국 ‘내란음모죄’에 대한 유죄판결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이번 사건 3년간의 활동은 불법적인 ‘표적 사찰’, ‘정치 탄압’, ‘공작정치’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책임은 대통령 사퇴와 정권 퇴진 및 국정원 해체 후 정보기관 재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국정원이 수사 결과를 밝히지 않으면서 사실상 언론을 통해 피의사실을 잇따라 공표한 데 대해서도 문제제기가 이뤄질 수 있다. 이석기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사법절차가 진행되면 이같은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당당히 임하겠다. 그러나 내란 음모나 반국가 단체 동조라느니 하는 날조 모략과는 한 치 타협 없이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내란 음모냐 아니냐가 어땋게 판가름나느냐와는 무관하게, 통합진보당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진보당은 2011년 12월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그리고 진보신당 탈당파가 합쳐 만든 정당이었다. 이름에 ‘통합’이 들어간 이유다. 이듬해 4월 총선에서 13석(지역 7석, 비례 6석)을 얻어 원내 3당으로 성공적인 원내 진출을 했지만, 비례대표 경선 부정 의혹 속에 극심한 당권 투쟁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의원 절반가량이 탈당해 진보정의당(현 정의당의 전신)을 만들면서, 의석수는 6석으로 줄었다.
당시 선거 부정 의혹을 한 몸에 받았던 이석기 의원은 해당 사건 관련 검찰 기소 명단에선 제외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 의원은 민혁당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재조명을 받고 자주파(NL) 내 이른바 ‘경기동부연합’의 실세로 지목되는 등 극심한 ‘종북’ 논란을 겪었다. 국회의원으로서 정상적인 의정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지가 의문시될 정도였다.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하더라도
이번 ‘내란 모의 의혹’은 이 의원 개인이 아닌 통합진보당 전체의 문제가 됐다. 국정원과 검찰의 수사, 그리고 재판 과정 및 결과와는 무관하게, 진보당은 당장 내란을 획책했다는 의혹만으로 막대한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됐다. 설령 국정원이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하더라도 진보당이 오롯이 ‘공안 탄압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종북’ 프레임(틀)의 힘은 강력하고 사회 전반의 보수화 경향 속에 이 프레임은 날로 막강해져서, 유권자의 기억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1년 전 ‘이석기 의원은 앞으로 정상적인 의정 활동을 할 수 있을까’라고 했던 질문에 대해, 국정원은 오늘 ‘내란 사건’이란 답변을 내놓고 있다. ‘진보당은 앞으로 온전한 정당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라는 오늘의 질문에는 언제 누구로부터 어떤 답변이 돌아올까?
출처 : 골방의 혁명가 혹은 돈키호테
전쟁시 주요 시설 진입과 무기 조달 논의한 ‘이석기 녹취록’, ‘내란음모죄’ 증거로 공개돼
유권자 기억 속 ‘종북’ 딱지 붙는 통합진보당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한겨레] 김외현 기자 | 등록 : 2013.09.03 15:15 | 수정 : 2013.09.03 15:28
▲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8월2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원단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하루 전인 28일 국가정보원은 이 의원 사무실에 대한 첫 압수수색을 시도했으나 이 의원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겨레 이정우 |
시계를 잠시 되돌려보자. 박근혜 정부 출범 이래 지난 8월 중순 남북 간에 개성공단 정상화 합의 전까지, 남북관계는 경색 일로로 치달아왔다. 2월에 북한은 3차 핵실험을 했고, 3월엔 정전협정 무효화를, 4월엔 영변 핵시설 재가동을 선언했다. 뒤이어 개성공단을 폐쇄했다. 한-미 합동훈련과 그에 반발하는 북한의 전쟁 위협이 반복됐고, 한반도엔 전쟁 위기가 엄습했다.
경색 일로를 달리던 와중의 강연회
누군가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낙관하며 평소 같은 삶을 살았고, 누군가는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대비’에 나섰다. 외국의 저명한 종군기자들이 한국에 속속 입국한다며 전쟁이 임박했다는 보도도 있었고, 한국인들은 전쟁 위기에도 이상하리만치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는 외신 기사도 있었다. 다른 한편엔, 한 연예인이 방송에 나와 전쟁 공포에 ‘벙커 부지’를 보러 다닌다고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상반기는 그런 시절이었다.
4월 중순까지 고공행진을 거듭하던 위기 지수가 잠시 소강상태를 맞은 5월12일 일요일 저녁 서울 마포구 마리스타교육수사회 강당에 13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도시-농촌 직거래 행사’인 줄 알고 장소만 빌려줬다는 수사회가 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대관료가 저렴한데다 서울에 위치했음에도 숙박이 가능하다는 등의 이유로 진보 진영 정당 및 단체의 전국 규모 행사가 종종 열리는 곳이다. 모임에서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강연이 있었다.
모임의 성격과 이날 행사 내용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엇갈린다. 통합진보당 쪽에선 김홍렬 경기도당 위원장이 도당 임원들과 혐의해 소집한 당원모임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석기 의원을 강사로 초빙해 전쟁 반대와 평화 실현을 위한 목적으로 정세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서울을 둘러싼 경기도 모임을 서울에서 연 게 이상할 건 없다. 외려 편하다. 이때가 전쟁 위기로 치닫는 것으로 인식되던 시점이라는 걸 고려하면, 주제도 시의적절해 보인다. 이 의원은 8월30일 기자회견에서 “(강연에서) 모든 전쟁을 막으려고 했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민족의 공멸이 있기 전에 평화를 실현하자는 뜻이었다”고 했다.
다만 주목해야 할 것은 전쟁 발발시 ‘어디로 피신할 것인가, 어떻게 피란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반 시민들과 달리, 이들은 ‘혁명가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물음을 부여잡고 논했다는 것이다. |
체제에 불만이 가득한 청년 몽상가들?
8월30일 <한국일보> 등 일부 언론을 통해 공개된 이날 모임의 녹취록은 국정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상황 인식은 마찬가지다. 이 모임을 주도하는 것으로 지목되는 이 의원의 발언 몇 대목을 녹취록에서 그대로 옮기면, ①“전쟁이 구체화되고 살인과 살의와 모략과 민족적 재난을 일으킬 수 있는 침략의 마수와 침략의 노골적인 생각이 적나라하게 논의되고 있는데” ②“우리가 총보다 꽃이라는 것을 지향하는 것은 분명하나, 때에 따라서는 꽃보다 총이라는 현실 문제 앞에” ③“남녘의 혁명가는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과연 무엇을 할 것이냐”는 게 뼈대다. 쉬운 말로 옮기면, ①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시기에 ②평화가 아닌 무력 수단도 동원될 수 있는 현실에서 ③우리는 무엇을 할 거냐는 인식이다.
▲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8월28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 이석기 의원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 대표는 “유신시대에 써먹던 용공조작극”이라며 국정원을 규탄했다. 한겨레 이정우 |
다만, 주목해야 할 것은 전쟁 발발시 ‘어디로 피신할 것인가, 어떻게 피란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반 시민들과 달리, 이들은 ‘혁명가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물음을 부여잡고 논했다는 것이다. 곧 전쟁 시기 사회 혼란을 계기 삼아 혁명을 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의원의 발언 곳곳에서도 전시를 틈타 사회 변혁을 꾀하려는 의지는 뚜렷해 보인다.
“군사적인 위협 국면이 더 조성되면 뭐든 이룰 수 있는 거야.”
“지배세력이 60여 년 동안 형성했던 현 정세를 무너뜨려야 돼요.”
“우리가 자주된 사상, 통일된 사상, 미국놈을 몰아내고 새로운 단계의 자주적 사회, 착취와 허위 없는 그야말로 조선민족의 시대의 꿈을 만들 수 있다.”
“그야말로 끝장을 내보자. 그래서 이 끝장내는 역사의 진행에 새로운 전환기를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바탕으로 다가오는 전투를 준비하는….”
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추상적으로 혁명을 논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다. ‘골방에서 혁명을 논하던 식민지 청년들’이란 상투적 표현엔 ‘탁상공론’에 가깝다는 비아냥마저 섞여 있다. 심지어 전쟁 위기로 일컫는 상황에서, 전쟁 탓에 강제 징집당할 위기에 처하는 등 불만이 가득한 청년들의 몽상이었다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과연 그랬을까?
다시 5월12일 모임으로 돌아가보자. 이석기 의원은 “물질·기술적 준비 체계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고 말한 뒤, “나중에 동료들과 토론에서 한번 고민해보세요”라고 한다. 녹취록을 보면, 이날 모임은 이석기 의원의 강연 뒤 질의응답이 있었고, 자유토론과 권역별 토론, 그리고 권역별 토론 내용 발표가 이어졌다. 이석기 의원은 강연 이후 토론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8월30일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끝에선 이 의원이 마무리 발언을 했다. 여느 조직이 실시하는 워크숍과 형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녹취록의 권역별 토론에선 경기 남부 권역의 이상호 경기진보연대 고문의 발언 분량이 가장 많다. 이 고문의 주요 발언은 크게 주요 시설 파괴 방안과 무기 마련 두 갈래로 나뉜다.
① 주요 시설 파괴 방안
“위장을 하고, 우리가 전시에 차단해야 하는 활동에 대해서는 타격을 주자. 통신을 얘기한 거고, 그다음에 이제 유류고….”
“평택에 있는 유조창, 이게 세계에서 가장 큰 (유류) 저장소예요. …탱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니켈합금이에요. 총알로 뚫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거든요.”
“(가장 중요한 통신시설은) 혜화동하고 분당에 있는데, 거기에는 쥐새끼 한 마리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진공상태가 돼야 되기 때문에 몇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하는 문제가 있고….”
“안에 있는 사람하고 협조관계가 있으면 안에 있는 사람한테 안내를 받거나 그 사람하고 같이….”
② 무기 마련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 장난감총 있잖아요. 그게 80만~90만원짜리(급으로) 들어가게 되면 가스 쇼바(완충기)가 있는데 개조가 가능하며….”
“인터넷에서 무기를 만드는 것들에 대한 기초는 나와 있어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중학생들도 인터넷에 들어가가지고 폭탄을 만들어가지고 사람을 살상시킬 만큼….”
내란 음모, 목적성·계획성·실행능력 갖춰야
그의 발언을 요약하자면, ‘주요 시설에 타격을 줘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진입이 어려우니 내부 동조자를 찾아야 한다’ ‘장난감총을 개조하거나 인터넷 정보를 활용해 무기를 만들자’는 얘기다.
이 고문은 토론이 끝난 뒤, 각 권역 대표자들과 더불어 결과 발표에 나선다. 그는 “항일의 시기에 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시기에도 (총기를) 만들어 썼는데, 손재주가 있고 결의가 있으면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했다”고 했다. 다른 권역 대표들은 “연락 체계, 후방 교란, 무장과 파괴는 어떻게 할 거냐에 대해서 팀을 구성하고 대응책을 준비해가야 한다” “자기의 하나뿐인 목숨도 걸어야 되고, 동지들과 함께 생사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확인했다” 등의 발언을 내놨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내란죄가 구성되려면 △국헌 문란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겠다는 목적성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는 계획성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실행 능력 등을 갖춰야 한다고 설명한다. |
형법 제87조는 “국토를 참절(베고 끊음)하거나 국헌(헌법과 헌법질서)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것을 ‘내란’으로 보고, 실제 내란에 이르지 않았다 해도 이를 위해 예비(물자 준비 등) 또는 음모(계획 및 공모)한 경우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이나 유기금고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내란의 ‘수괴’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 형을 받게 된다. 헌법은 대통령도 내란죄를 범하면 재직 중이라도 형사상 소추를 받도록 규정한다.
▲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오른쪽)이 3월22일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다. |
죄목이 무거운 만큼, 실제 적용은 엄격해야 한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내란죄가 구성되려면 △국헌 문란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겠다는 목적성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는 계획성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실행 능력 등을 갖춰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 교수는 8월29일 인터뷰에서, “농담 삼아 ‘이 세상을 바꿔보자, 엎어보자’ 이렇게 한다고 내란 음모가 되는 게 아닌 것처럼 구체적인 계획과 능력이 있을 것이 요구된다. (이번 사건은) 조건이 전쟁이 발발할 경우라고 돼 있는 걸로 봐서는 시기적으로 명확하게 특정돼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수준에서 (계획이) 수립돼 있는 단계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우리나라가 불법적인 무기류에 대한 유통 규제가 상당히 엄격한 편이다. 그래서 실행 능력이 현재 확보돼 있는 상태인가 하는 것도 상당히 의문이 있는 상태다. 그런 걸로 보면, (내란 목적이 있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 내란음모죄에 해당한다고 이야기하긴 어렵지 않나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내란 실행 능력, 즉 국정원이 지목한 이른바 RO가 동원할 수 있는 조직력 및 무장력에 대해서는 국정원이 충분한 증거를 내놓을 필요가 있다. 5월12일 모임에서 나온 발언과 관련해, “장난감총, 비비탄총 개조하여 무장하고, 손재주로 총기를 깎아 만들고, 중학생들도 만든다는 사제 폭탄 제조법을 익히고… 딱 소설 속 돈키호테의 무장 수준”(진중권 동양대 교수)이란 비아냥이 나온다.
“딱 소설 속 돈키호테의 무장 수준”
국정원은 ‘감청 영장’을 발부받아 2010년부터 RO 조직원들의 휴대전화 및 전자우편을 감시하는 등 3년 간 내사를 진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기간 얼마나 수사에 진전이 있었는지 이목이 집중된다. 또 녹취록 작성 주체가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내용에서 동영상 파일 확장자(mp4)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동영상이 있을 거란 추측도 나온다. 추가 녹취록이 나올지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만약에, 녹음 파일 하나와 익명의 정보원 진술, ‘종북 성향이 의심되는 문건 몇 개’ 정도가 다라면, 이번 사건 3년간의 활동은 불법적인 ‘표적 사찰’ ‘정치 탄압’, ‘공작정치’에 다름 아닐 것이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8월29일 블로그 |
내란 음모냐 아니냐가 어땋게 판가름나느냐와는 무관하게, 통합진보당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진보당은 2011년 12월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그리고 진보신당 탈당파가 합쳐 만든 정당이었다. 이름에 ‘통합’이 들어간 이유다. 이듬해 4월 총선에서 13석(지역 7석, 비례 6석)을 얻어 원내 3당으로 성공적인 원내 진출을 했지만, 비례대표 경선 부정 의혹 속에 극심한 당권 투쟁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의원 절반가량이 탈당해 진보정의당(현 정의당의 전신)을 만들면서, 의석수는 6석으로 줄었다.
당시 선거 부정 의혹을 한 몸에 받았던 이석기 의원은 해당 사건 관련 검찰 기소 명단에선 제외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 의원은 민혁당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재조명을 받고 자주파(NL) 내 이른바 ‘경기동부연합’의 실세로 지목되는 등 극심한 ‘종북’ 논란을 겪었다. 국회의원으로서 정상적인 의정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지가 의문시될 정도였다.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하더라도
이번 ‘내란 모의 의혹’은 이 의원 개인이 아닌 통합진보당 전체의 문제가 됐다. 국정원과 검찰의 수사, 그리고 재판 과정 및 결과와는 무관하게, 진보당은 당장 내란을 획책했다는 의혹만으로 막대한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됐다. 설령 국정원이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하더라도 진보당이 오롯이 ‘공안 탄압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종북’ 프레임(틀)의 힘은 강력하고 사회 전반의 보수화 경향 속에 이 프레임은 날로 막강해져서, 유권자의 기억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1년 전 ‘이석기 의원은 앞으로 정상적인 의정 활동을 할 수 있을까’라고 했던 질문에 대해, 국정원은 오늘 ‘내란 사건’이란 답변을 내놓고 있다. ‘진보당은 앞으로 온전한 정당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라는 오늘의 질문에는 언제 누구로부터 어떤 답변이 돌아올까?
출처 : 골방의 혁명가 혹은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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