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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20만원 때문에 찍었지만…언제 공약 지켜진 적 있나?

20만원 때문에 찍었지만…언제 공약 지켜진 적 있나?
[토요판/르포] 기초연금 공약 파기 노인 민심
[한겨레] 윤형중 기자 | 등록 : 2013.10.04 20:23


▲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묘공원에서 열린 ‘기초연금 노인 만민공동회’에 참석한 노인들은 “대통령이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은 참석한 노인들이 발언을 경청하는 모습이다. 박종식 기자
▶ “정말 죄송합니다.” 박근혜가 어르신들 앞에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65살 이상 모든 어르신들에게 20만원씩 주겠다던 기초연금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처음 공약을 제안했을 때처럼 대한노인회 임원들을 만났고, 이심 대한노인회 회장은 “대통령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화답했습니다. 다른 어르신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고궁의 담장 위로 가을빛이 선명한 하늘이 펼쳐진 1일 오후 2시께,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 서쪽 담장에 위치한 ‘원서동 노인정’에선 서상덕(81)씨가 혼자 신문을 보고 있었다. 쭈뼛쭈뼛 인사하는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와. 젊은 사람이 무슨 일이야?”

“한겨레신문사 기자인데요. 어르신들이 기초연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여기 앉아봐.”

서씨와 둘이 마주앉았다. 서씨는 노인정 바로 맞은편에 있는 원서공인중개사를 운영한다고 했다. 돈도 벌고 있고, 재산도 있어서 현행 기초노령연금을 받진 않고 있다고 전했다. 기자의 질문에 최근 기초연금에 대한 생각을 털어놨다.

“아무리 공약을 했어도 나라가 파탄나면 안 되잖아. 대통령이 실수를 했더라도 국가가 먼저지. 나 같은 사람에게도 20만원을 주면 좋지만,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먼저잖아.”

“그래도 공약이었는데 이렇게 취임 7개월 만에 지키지 못하겠다고 하는 게 불만 아니세요?”

서씨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공약이라는 것이 별로 지켜진 적이 없어.”


문재인이 먼저 공약을 내걸었다는 주장

원서동 노인정에서 50m쯤 떨어진 구립 계원경로당을 찾았다. 여자노인정인 이곳은 열다섯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대여섯은 화투를 치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기자가 들어서자 화투에 집중하고 있는 모임을 제외한 십여명의 시선이 모아졌다. 소개를 하고, 기초연금에 대한 생각을 묻자 가장 안쪽에 있는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박근혜가 옳아.”

가까이 앉은 윤금녀(90)씨가 말을 이었다.

“주면 좋은데 안 주면 어쩔 수 없지. 난 지금 받고 있는 9만6000원이 꽤 도움이 돼. 지금처럼 돈 많은 사람에게 안 주면 되는 거지. 이건희 회장도 주고, 강남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주면 되나.”

문재인·안철수 단일화 합의 날, 기초연금 약속한 박근혜
취임 7개월 만에 공약 뒤집었지만 노인들의 여론은 양분됐다

“대통령이 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돈 없는데 어쩌겠어. 나라가 먼저”
“공약 이행하려면 얼마 드는지 뻔히 알면서 사기를 쳤다”


옆에 앉은 오아무개(78)씨는 정치에 불만이 많아 보였다.

“전두환, 노태우에게 돈 다 받아내면 그거 줄 수 있지 않나. 그래서 전두환이는 돈을 다 내긴 한 거야? 박근혜도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잖아. 선거 때 문재인이가 먼저 준다고 해서 따라한 거잖아.”

기자의 질문에 노인정은 떠들썩해졌다. 인사를 드리고 나와 종묘공원으로 향했다. 걸어서 20여분 걸리는 거리였다. 공원 근처에 이르자 공터에는 바둑판과 바둑을 두는 노인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기원을 방불케 했다. 군데군데 훈수를 두는 무리들과 그냥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종묘공원 후문으로 가는 길가에는 막걸리 한 그릇이나 큰 종이컵으로 소주 한 잔이 1000원인 가게에서 술 한잔 걸치는 모임들도 상당수 있었다. 공원 후문에 이르러 혼자 앉아 있는 김아무개(89)씨에게 말을 걸었다. 김씨는 부인과 쪽방에서 둘이 살면서 기초노령연금 9만6000원을 받고 있다고 했다.

“지금 받고 있는 연금은 혈압약에 쓰고 있지. 국민연금은 납입을 안 해서 못 받고 있어. 나 같은 사람은 어차피 20만원 받을 테니까. 걱정 없어.”

종묘공원 근처의 여론은 대개 비슷했다. 기자가 예닐곱차례 서로 다른 무리에게 물어도,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바둑판에 훈수를 두고 있던 황아무개(85)씨는 목소리를 높였다.

“박통이 청와대에 들어가 보니 곳간이 비어 있는 거야. 그러니 어쩌겠어. 공약을 수정해야지.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 해. 하늘에서 돈이 굴러떨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그게 문재인이가 먼저 한 공약이잖아.”

기자가 되물었다.

“어르신, 당시 새누리당, 민주당 모두 노령연금 공약을 냈고요. 모든 어르신들에게 20만원 주겠단 공약은 박근혜가 먼저 냈어요.”

“아니야, 문재인이가 먼저 냈어. 문재인이야.”

“그래도 약속한 건 지켜야 하지 않나요?”

“기자 양반, 대통령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야. 청와대 들어가 보니까 돈이 없는데 어쩌겠어. 나라가 먼저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야. 나라가 먼저 제대로 있어야 해.”

황씨는 더 목소리를 높였다. 이야기는 엉뚱한 곳으로 새고 있었다.

“지금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야. 공권력이 완전히 무너지고 있어. 국회의원이 최루탄이나 던지는데 가만히 놔두잖아.”


2007년에도 기초연금 20만원 약속한 박근혜

과연 기초연금 공약은 누가 먼저 제안한 걸까. 현행 기초노령연금의 수령액을 2배로 늘리겠다는 발표를 먼저 한 이는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였지만, ‘모든’ 65살 이상 노인들에게 20만원을 주겠다고 밝힌 이는 박근혜 후보였다. 문재인 후보는 소득 하위 80% 계층에게 기초노령연금을 2017년까지 점차적으로 늘려 현재의 2배(9만원에서 18만원)로 늘리겠다는 공약을 발표했고, 박 후보는 지난해 11월 초까지도 기초노령연금에 대해 구체적인 발표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재인, 안철수 의원이 대선후보 단일화 추진에 합의한 11월5일 박 후보는 오후 4시에 대한노인회를 찾아 깜짝 발표를 했다.

“월 20만원을 보장받으면서 별도의 연금까지 받아 최저생계비 이상 노후소득이 보장되는 기초연금을 도입하려 합니다.”

소득 구분 없이 모든 65살 이상 노인들에게 2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박 후보의 약속은 야당인 민주당보다도 더 나아간 정책이었다. 보수정당인 새누리당보다 더 선별적인 복지를 택했던 민주당은 결국 대선공약집 최종안을 발표한 지난해 11월11일 ‘소득 하위 80% 계층’이란 문구를 뺀 기초노령연금 공약을 발표했다. 민주당으로선 박 후보의 파격적인 복지 행보에 당황했고, 황급히 공약을 수정한 셈이다. 하지만 박 후보가 내놓은 기초연금 정책 최종안은 공약했던 내용과는 달리 야당인 민주당이 만든 초안과 비슷해졌다. 새누리당은 엉뚱하게도 이를 다시 공격의 소재로 삼기도 했다. 민현주 새누리당 대변인은 지난 9월24일 현안브리핑에서 “기초연금 대상자를 전 계층이 아닌, 소득 상위 20%를 제외하는 안은 민주당에서도 주장했던 내용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고소득 계층이 기초연금 수혜집단에 포함되지 않는 정부의 안에 대해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원색적 표현을 서슴지 않는 민주당의 언행은 이율배반적이며 함께 경쟁하는 정당이라 하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밝혔다. 야당보다 국민들에게 돈을 더 주겠다고 현혹하고서, 약속 불이행을 비판하는 야당을 향해 “원래 너네가 주려던 수준인데 왜 비판해”라고 윽박지르는 격이다.

기초연금은 정치권의 거짓말이 반복된 분야다.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선 경선이 벌어진 2007년 5월에도 대한노인회를 찾아 “노인들이 기초연금만으로 월 20만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대선 후보가 되지 못한 박근혜의 약속은 묻혔다. 이명박은 대선을 일주일여 앞둔 2007년 12월 10일 대한노인회에서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해 “임기 5년 안에 기초연금 20만원까지 올려주겠다”고 말했다. 이명박의 공약집 어디에도 없던 즉흥적인 약속이었다. 2008년 4월 총선을 앞둔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은 다시 기초노령연금 공약을 내세웠다. 이번에는 월 9만원의 4배인 월 36만원으로 늘리겠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공약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지금도 기초노령연금은 월 9만6000원이다.

박근혜가 내놓은 기초연금 최종안은 만 65살 이상의 노인 가운데 소득 하위 70% 계층에게 국민연금 가입기간에 따라 최대 20만원을 차등지급하는 방안이다. 기초연금 주무부처인 복지부의 진영 전 장관은 “국민연금과의 연계를 막지 못해 국민들에게 송구스럽다”며 장관직을 사퇴했다. 국민연금에 오래 가입할수록 기초연금 수령액이 적어지기 때문에 국민연금의 안정성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정부가 내놓은 기초연금 최종안을 둘러싼 노인들의 여론도 진보와 보수로 양분됐다. 2일 오후 1시, 종묘공원 후문 주차장에선 어버이연합이 개최하는 안보강연이 열렸다. 200~300여명의 노인들이 빼곡하게 앉아 안보강연을 듣고 있었다. 추선희(55)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은 “선거 때 공약보다 재정이 중요하다. 세금을 더 내기 싫어하면서 복지는 더 받으려고 하면 되겠냐”고 주장했다. 1시간 넘게 이어진 안보강연이 끝나자 어버이연합은 구호 제창을 제안했다. “종북좌파세력 척결, 전교조 해체, 자유 대한민국을 위하여 뭉치자! 싸우자! 이기자! 와!”

강연을 마치고 자리를 뜨려는 사람들을 붙잡고 질문을 던졌다.

“한겨레신문 기자인데요. 기초연금에 대해 좀 묻고자 하는데요.”

“한겨레? 좌파랑은 얘기 안 해.”

안보강연에 참석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갔다. 올해 처음으로 기초연금을 받는다는 박아무개(65)씨는 “이건희에게도 주는 건 말이 안 되지. 박근혜 말이 맞아”라고 말했다.

오후 3시엔 종묘공원 정문 쪽에서 ‘기초연금 노인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안철수(무소속), 심상정(정의당) 의원과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 등 야당 정치인들이 참석한 이 행사에는 소위 진보 성향의 노인들이 모였다.

김성호(74)씨는 “노인들이 이 나라를 위해 땀 흘리며 일한 세대지만, 지금 너무 살기가 힘들다. 노인자살률이 너무 높다. 공약을 이행하려면 얼마가 드는지 뻔히 알면서 사기를 쳤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다리가 불편한 3급 장애인으로 매달 49만8800원을 보조받고 있다는 박아무개(53)씨는 “나이 들어 지금보다 더 움직이기 어려워도 매달 20만원의 기초연금을 더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물거품이 됐다”고 말했다.

연단에 나간 정치인들의 말도 들려왔다. 안철수 의원은 “노인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초노령연금을 도입했는데, 지금 정부는 문제를 보지 않고 어떻게 하면 비용을 줄일 것인가만 보고 있다”고 지적했고,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은 “시내버스 첫차를 타보면 65세 이상 어르신들이 청소하러 가느라 만원이 된다. 정부는 이런 어르신들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셈”이라고 말했다. 행사를 주최한 노년유니온의 김선태(70) 위원장은 “제가 우리 동네(홍제3동)에서 한달에 20만원 주는 공공복지 일자리를 얻었는데 이마저도 일자리가 46명밖에 안 된다. 동네 3000여명의 노인들은 그런 일자리라도 얻으려 애를 쓴다. 그런 분들이 한달에 20만원씩 받는다고 하니 얼마나 기대를 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행사가 끝나자 앞자리에 앉은 분에게 말을 걸었다. 대화가 어렵다고 손을 내저었다. 필담을 시도하며 수첩을 건네자 ‘이름 이회인, 나이 95세’라고 적었다. 이씨는 귀가 어두워 더 이상의 대화가 어렵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리어카 할머니의 한마디 “뭐 어쩌겠어”

삶의 현장에 있는 노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서울 종로구 충신동 서울시선관위 앞에서 노점을 운영하는 권희만(75)씨를 2일 오전에 만났다. 평소에 사지도 않던 복권을 한장 사며 말을 걸었다.

“여기서 30년을 장사했는데 요즘엔 근처에 편의점이 많이 늘어 장사가 안돼요. 한달에 100만원 벌기도 힘들어요. 자릿세는 구청에 연 180만원씩 내고 있구요. 예전에 국민연금을 납입해서 지금 한달에 32만원씩 받고 있고, 기초노령연금은 무슨 이유인지 신청을 해도 못 받고 있어요. 투표할 땐 한달에 20만원씩 받을 거라 기대했는데 이젠 국민연금도 위태로워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되네요.”

동대문역 인근에서 지하철 택배업에 종사하는 홍윤표(76)씨는 일자리 정책을 강조했다.

“6개월 전부터 지하철 택배를 하고 있어요. 65세가 넘으면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으니까,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물건들을 배달하는 거죠. 하루에 잘 벌면 2만원도 넘게 버는데 오늘은 강남이랑 수유리에 한번씩 다녀오고 8000원밖에 못 벌었어요. 공약 불이행은 실망스럽지만, 노인 일자리에라도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어요.”

새벽 4시 버스 첫차를 타고 서울시내로 출근해 빌딩 청소 일을 하는 정아무개(62)씨는 “청소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돈백만원을 벌기 때문에 기초노령연금을 못 탄다. 그나마 나중에 국민연금 받을 걸 기대하고 있는데 국민연금이 기초연금이랑 연계되면 받는 돈이 줄어드는 게 아닐지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3일 오전 10시,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찻길에서 만난 이원의(85)씨는 폐지와 빈병을 가득 실은 수레를 위태로운 모습으로 밀고 있었다. 이씨의 옆으로 불과 50㎝~1m 간격을 두고 차들이 빠르게 지나쳤다. 이씨는 “매일 이렇게 살아서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생활고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8시까지 이렇게 폐지랑 빈병을 모아도 하루에 만원이나 벌까. 어젠 8000원밖에 못 벌었어. 아파서 못 움직이는 남편이랑 둘이서 반지하 방에서 살고 있는데 어쩌겠어. 수도세, 전기세가 한달에 4만원씩 나와서 세달 동안 연체됐어.”

이씨의 일을 도우며 30여분 걷자 고물상에 이르렀다. 고물상에선 이씨가 오전 7시부터 나와 3시간 반 동안 모은 폐지와 빈병의 가격을 매기기 시작했다. 작은 수레에 가득 실은 폐지와 빈병의 가격은 1400원이었다. 이씨는 다시 수레를 끌고 나와 폐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기초노령연금은 신청을 했는데 못 받고 있어. 전세 사는 집이 있다고 그런가 봐. 지난 대선 땐 누구에게나 다 20만원 준다고 해서 박근혜 뽑았는데 그게 어렵게 됐다며. 뭐 어쩌겠어. 지금까지도 안 받고 살았잖아. 지금처럼 계속 살아야지. 난 지하철 타고 염리동 우체국에 가서 폐지 받아야 해. 그만 가봐.”

이씨는 지하철 마포역으로 가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 유유히 사라졌다.


출처 : 20만원 때문에 찍었지만…언제 공약 지켜진 적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