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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통합진보당 탄압

정당 해산 쿠데타와 초등 교과서

정당 해산 쿠데타와 초등 교과서
정은교의 인문학 교실
[민중의소리] 정은교 서울 강신중학교 교사 | 발행시간 2014-12-21 10:42:32 | 최종수정 2014-12-21 10:42:32


예상하기 싫은 시나리오였지만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에 대해 정당해산 결정을 내렸다. 필자는 그 결정 자체에 대해서는 “너희가 그럴 수 있어?”하고 핏대를 세울 기분과 기운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이런 사태를 막아낼 시간이 있었는데 새누리당 정권이 정당해산을 요구하고 나섰을 때가 그때였다. 그때 통합진보당 당사자들뿐 아니라 민주노총과 여러 사회운동단체가 소매 걷고 거리로 나서서 “민주주의에 조종(弔鐘)이 울렸다!”며 대대적으로 저항의 물결을 일으켰어야 한다. 헌재가 대체로 새누리당과 정치적 성향이 비슷하긴 해도 민중 사회세력이 얼마나 반발할지 눈치는 봤을 터인데(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가상(假像)이 의심을 사면 난처해지므로), 그들이 거리낌없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을 보면 민중의 저항이 별것 아니라(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자칫하면 분노보다 패배감(무력감)에 휩싸일 염려가 적지 않다.

그렇다고 그때 우리가 힘을 쓰지 못한 것을 지금 자책(自責)할 때는 아니다. 그런 반성은 진작 했어야 할 일이고, 앞으로도 틈틈이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볼 일이지만 아무튼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조봉암의 유령이 다시 나타나는, 도무지 있을 법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진 마당에 ‘우리는 어떡할 거냐’ 하는 채찍질의 질문이 당장 우리에게 다가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장 할 일은 분노의 대상과 폭을 넓히는 일이다. 민중의 자유와 행복을 앗아가는 짓거리들이 어디서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샅샅이 살필 때라야 정당해산의 폭거에 대해 분노할 기운도 새로 얻는다. 이를테면 대한항공의 재벌 2세 조현아가 제 비위를 거슬린 부하 직원을 내쫓으려고 비행기를 제 맘대로 되돌린 행위와 헌재가 ‘우리 지배세력의 뜻을 거스르는 존재들은 언제든 국가로부터 내쫓는다’고 선포한 행위는 완전히 똑같다.

민중을 (잘했든 못했든) 대변해온 정당에 대해 재갈을 물리는 쿠데타가 한국에서 버젓이 벌어진 것은 제국주의 열강(列强)이 요즘 노골적으로 파시즘체제로 바뀌어가는 추세 속에서 가능했다는 사실도 놓쳐서는 안 된다. ‘마그나 카르타’를 제정한 민주주의의 나라라는 영국은 올해 들어 극우정당인 영국독립당이 제1당으로 올라섰고, 대한민국의 맹방이라는 일본은 최근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평화헌법을 걷어치울 개헌의석에 거의 근접한 의석(290석)을 드디어(!) 얻었다. 엠네스티 같은 곳에서 한국 헌재를 아무리 비판한다 해도, 그런 비판여론은 제국주의 열강 내에서 소수의견에 불과하다.

통합진보당의 불행을 우리의 불행으로, ‘내 일’로 떠안으려면 얼른 눈을 좌우로 돌려서 우리가 분노해야할 것들이 또 무엇인지 죄다 눈에 담아야 한다. 한국의 지배세력은 천안함과 세월호의 진실을 은폐하는 데에 거의 성공을 거둔 것 같다. 철탑에 올라가 울부짖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도 우리 사회에는 거의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연금 개혁’을 비롯해)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지배세력의 공격이 곳곳에서 벌어진 지는 이미 오래다. 이 모든 사태를 ‘하나’로 합쳐서 바라볼 때라야 우리는 헌재의 쿠데타를 ‘내 일’로 다시 받아안게 된다.

▲ 헌법재판소가 정부의 정당 해산심판 청구를 인용해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한 19일 오후 서울 동작구 대방동 진보당사 앞에서 열린 진보당 해산 심판 규탄 대회에서 당원들이 민주주의 근조를 주장하는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정의철 기자


거짓 교과서를 불사르는 싸움도 시급하다

한국의 지배세력이 최근 학교 교과서를 저희들 입맛대로 뜯어고치려고 덤벼든 것도 민중이 시급히 알아야 할 ‘내 일’의 하나다. 한 가지만 끄집어내서 알린다. 교육부는 지금 초등 4학년이 6학년에 가서 배울 새 국정 사회(역사) 교과서 실험본을 갖고서 올 하반기 들어 여러 학교에서 실험 수업을 했다. (학술단체협의회, 전교조, 참교육학부모회 등이 최근 개최한 토론회 자료집 참고) 명색이 교과서인데, 그런 꼴볼견의 책이 없다.

한국의 지배세력이 무의식적으로 자기들을 일본제국주의와 동일시하는, 정신 나간 서술이 곳곳에 가득하다. “일제가 한국 의병을 토벌하고 소탕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조약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는 일본에 쌀을 ‘수출’했다.” 한국 지배세력의 아비와 할배들이 식민지 시절에 일본을 영원불멸할 조국으로 알았으며 그 뒤로도 일본을 정신적 조국으로 삼고 살아 왔다는 것, 걸핏하면 ‘일본에서 배우자’고 부르짖었던 그들의 발자취와, 지금의 초등 국정교과서(실험본) 집필진이 ‘일본 제국주의’를 주어(主語)로 삼아서 우리 근현대사를 서술한 것은 그 계급적 맥락이 완전히 일치한다.

그런데 더 분노를 자아낼 일은 한국의 지배세력이 책다운 책 하나 만들어낼 기본 실력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달랑 책 한 권에 단순한 오류(부정확한 사실 파악)만 해도 350개나 된다고 한다. 예컨대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를 그린 삽화는 그가 곤룡포(임금이 입는 옷)를 입은 것으로 그려져 있다. 2년의 시간을 들여 만든 책이 그 모양이다. 그런 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의 몰상식을 접하고, 우리는 정면으로 들이받아야 한다. “너희, 국가를 운영할 실력이 있기나 하니? 그만 거기서 내려와야 하지 않니?”

초등 실험교과서는 그들이 얼마나 안하무인(眼下無人)이요, 유아독존(唯我獨尊)인지도 살짝 보여준다. ‘누숙경직도’나 ‘임하투호’ 같은 생뚱맞은 낱말도 들어 있다! 이 말을 알아들을 분, 계신가? 인문사회 지식을 웬만큼 쌓은 필자도 못 알아들을 낱말을 초등 코흘리개들한테 천연덕스럽게 내리먹인다. “아, 저들은 우리 민중과 도무지 상종할 사람들이 못 되는구나!”하는 탄식이 절로 일어난다....

첫머리로 돌아가자. 우리는 민중이 수십년 간 싸워서 얻어낸 결사(結社)와 표현의 권리를 하루 아침에 도둑맞았다. 요즘 그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지금의 한국 지배세력을 존경하라!’고 다그치는 교과서를 마구 들이밀고 있다. 아이들이 ‘공부하기 싫다’고 툴툴대면? (그들의 자랑스런 문화 유산인) 회초리를 다시 들고 설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체벌 금지’를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민주화 30년이 도로아미타불이 됐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미래마저 위협받기 시작한 때다. 어찌 우리가 잠잠할 수 있을까.


출처  [정은교의 인문학 교실] 정당 해산 쿠데타와 초등 교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