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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주민투표의 ‘효력’

영덕 주민투표의 ‘효력’
[민중의소리] 변홍철(시인, 『시와 공화국』 저자) | 최종업데이트 2015-11-17 10:40:28


“하지 말라고 투표를 안 하겠나”

지난 11월 11일 정오 무렵, 영덕 핵발전소 유치 찬반 주민투표가 진행 중인 달산면 제1 투표소 앞, 트럭에서 십여 명의 농민들이 내린다. 오전에 밭에서 일하다가 점심시간에 맞춰 함께 투표하러 온 주민들이다. 그중 한 아주머니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이웃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투표하지 말라는 놈들이 있는데, 이런 자유시대에 우리가 하지 말라고 투표를 안 하겠나.” 모두 이 말에 맞장구를 치며 웃는다.

중앙정부와 영덕군, 그리고 한국수력원자력은 이번 주민투표를 ‘불법투표’, ‘가짜투표’로 규정하고 엄청난 인원과 물량을 동원해 ‘투표 불참’을 독려해 왔다. 주민투표를 비방하고 왜곡하는 수천 장의 현수막과 포스터가 영덕군 전체에 나붙고, 투표 이틀 전에는 대형 애드벌룬까지 등장했다. 붉은 조끼를 입은 한수원 직원들이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장터를 누볐고, 공무원들까지 가세해 주민들에게 투표소에 나가지 못하도록 설득했다.

▲ 영덕 주민투표를 앞두고 투표반대 측에서 붙인 현수막. ⓒ변홍철


투표 바로 전날 저녁, 소문으로 떠돌던 한수원의 주민 음식 대접 현장이 적발되어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한수원은 눈도 끔쩍하지 않았다. ‘국책사업을 위한 일상적인 홍보’라고 그들은 주장했지만, 누군가의 표현대로 그것은 ‘한수원의 침공’ 같은 분위기였다.

이런 참담한 분위기 속에서, 투표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주민들 사이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게다가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날씨. 비록 핵발전소 유치에 반대하는 여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여론조사를 통해 확인했지만, 그 여론이 주민투표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그만큼 정부와 한수원의 비방과 방해는 악랄하고 집요했다.

하지만 이러한 염려와 온갖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영덕군 전체 20개 투표소에는 11일 새벽부터 주민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투표소마다 한수원 직원들이 서너 명씩 배치되어 주민들을 감시하고, 불법촬영을 하고, 소란을 유도하는 등 투표를 방해했지만, 주민들은 꿋꿋이 투표소로 나왔다. “하지 말라고 투표를 안 하겠나” 하는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민들은 그동안 핵발전소 유치 문제에 관해 단 한 번도 온전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반대 91.7%

핵발전소 그기 그래 좋으마, 이 동네에 세울라 카겠나?” 내가 투표소에서 주민들에게서 가장 자주 들은 말이다. 농민과 어민들만이 아니다. 강구면의 상가에서 만난 ‘횟집 사장님’으로부터 이런 말도 들었다. “강구에서 대게집, 횟집 하는 사람들은 내심 대부분 반대다. 핵발전소 들어오면 지역 이미지 나빠져서 장기적으로는 전부 망한다는 거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당장 관 눈치 보고 하니까 투표를 주저하는 거다.”

이러한 민심은 투표결과로 분명히 확인되었다. 11일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 12일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실시한 주민투표 결과, 투표인명부 18,581명 중에 11,209명이 투표를 하였고, 그 투표율은 60.3%에 이르렀다. 그리고 유치반대 91.7%, 유치찬성 7.7%, 무효 0.6%.

이것은 영덕군수가 핵발전소 유치신청을 군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진행하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의 예정부지 고시가 영덕 주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 영덕 원전유치 찬반 주민투표에 참여하는 주민들. ⓒ변홍철


정부의 예정부지 고시는 민의에 따라 철회될 수 있다. 또 지방자치단체는 유치신청을 내었다고 하더라도 주민의 의사에 따라 신청을 철회할 수 있다. 유치신청에 관한 사무는 국가사무가 아니라 지자체 사무이므로, 필요하다면 주민들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주민투표법에 따라 지자체장이 주관하는 주민투표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중앙정부와 영덕군수는 유치 찬반을 묻는 주민들의 투표를 거부했으며,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정부와 한수원의 방해 속에서 민간의 힘으로 투표인명부를 작성하고 투표관리까지 스스로 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정을 밟아 왔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무려 18,581명의 주민이 스스로 투표인명부에 등록하고, 그중 11,209명이 투표를 함으로써 민의를 분명히 드러냈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특히나 이곳 영덕이 현 정부와 여당에 대한 지지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보수적인 지역 중 하나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번 주민투표의 의의는 더욱 값진 것이다. 한마디로 주민자치의 승리요, 민주주의의 승리이다.


“투표 안 했다고 원전 찬성 아니다”

정부와 한수원이 ‘불법투표’, ‘가짜투표’ 운운하며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찬물을 끼얹어 놓고는, 이제 와서 법을 들이대며 투표의 ‘효력’을 문제 삼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노릇이다. 물론 주민투표법에는 투표율이 3분의 1이 넘어야 개표한다는 조항이 있지만, 이번 주민투표는 안타깝게도 주민투표법에 근거해 치를 수 없었던 민간 차원의 투표이므로 이 조항을 지금에 와서야 들이대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 이번 주민투표는 영덕군청의 비협조와 방해 속에서 부재자투표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영덕은 유권자 3만4천여 명 중 부재자가 최소한 7천 명 이상 있는 지역이다. 부재자를 제외하고 계산하면 이번 주민투표의 투표율은 40%를 넘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 와서 투표율을 두고 효력이 있느니 없느니 문제 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원천봉쇄’에 가까운 분위기 속에서 무려 11,209명의 주민이 투표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핵발전소 유치에 반대했든 찬성했든, 이 11,209명의 투표는 용기 있는 ‘시민 불복종’이자 ‘주권자 선언’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정부와 한수원은 아마 투표율이 더 높았더라도 온갖 핑계를 대며 투표의 ‘법적 효력’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영덕 주민들이 보여준 이러한 민심이 우리 사회에 미칠 ‘정치적 효력’이다. 영덕 주민들은 단지 투표용지 한 장이 아니라 온몸으로, 핵발전소를 거부한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나아가 농촌과 어촌 마을들이 다시는 서울과 대도시의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독립선언’을 한 것이다. 정부와 한수원은 그러한 민심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투표 안 하는 사람들은 전부 찬성하는 거라고 생각할까 봐, 퇴근하는 길에 투표하러 왔다. 투표 안 한 사람들이라고 전부 찬성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11월 12일, 영덕 주민투표 2일 차. 강구면 제2 투표소. 투표 종료를 채 한 시간도 남기지 않은 저녁 7시 이후. 30대 정도의 남성이 허겁지겁 투표소에 들어와, 본인 확인 절차를 밟으며 투표 사무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번에 투표하지 않은 주민들의 민심을 자유롭고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모두 확인할 수 있다면, 핵발전소 반대의 비율은 오히려 91.7%보다도 더 올라갈지도 모른다.

침묵이 찬성은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가만히 있으라”고 압박하고 회유해 온 정부와 한수원의 오만한 태도에 영덕 주민들은 치를 떨고 있다. 이번 주민투표 결과는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 경북 영덕 핵발전소 유치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개표를 앞둔 12일 오후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농업협동조합에 마련된 개표소에서 개표사무원들이 개표를 하고 있다. ⓒ뉴시스



‘법적 효력’과 ‘정치적 효력’

영덕 주민투표에 대한 기록과 그 결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견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언론이라고, 심지어 ‘진보언론’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 거대한 사건을 똑같은 논조로만 다룰 수 있겠는가.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풍경도 달라지는 법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이번 주민투표의 ‘법적 효력’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애초 주민 399명의 동의와 군의회의 동의로만 추진된 유치신청에 비해, 이번에 확인된 11,209명의 주민의 의사(그중 91.7%가 유치 반대)가 민심을 파악하는 데 훨씬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군의회는 의장과 모든 의원이 이번 주민투표를 지지했다.

풀뿌리의 힘으로 어렵게 성사시킨 주민투표를 인정하지 않고, 이미 확인된 민심을 무시하는 것은 더 큰 갈등을 불러올 뿐이다. 이번 주민투표 결과는 ‘법적 효력’과는 별개로 엄청난 ‘정치적 효력’을 우리 사회 전체에 미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중앙정부나 영덕군 행정이 어떤 이유에서든 이 투표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주민투표법에 따라 투표를 해, 공정하게 민심을 재확인하면 된다.

공은 정부와 한수원에게 넘어갔다.


출처  [변홍철 칼럼] 영덕 주민투표의 ‘효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