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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윤기진 황선 부부 “마치 칼날 위를 걷는 기분… 권태기를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

“마치 칼날 위를 걷는 기분… 권태기를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
영화 ‘불안한 외출’ 12월 10일 개봉
“조계사에 계신 한상균 위원장에게 영화를 꼭 보여드리고 싶다”

[민중의소리] 권종술 기자 | 최종업데이트 2015-12-05 10:49:34


사람들은 흔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장편영화 몇 편쯤 될 거라 말하곤 한다. 누구에게나 사연 없는 인생이 없고, 누구에게나 그 사연은 절절하고 구구하다. 윤기진 황선 부부가 살아온 지난 시간도 그렇다. 남편인 윤기진 씨는 학생운동으로 인해 10년간의 수배와 5년의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둘이나 낳았지만, 함께 살지 못한 사연. 감옥에서 풀려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감옥에 가고, 또 풀려나고, 이번엔 남편이 아닌 부인 황선 씨가 또 구속됐다 풀려나는 시간은 파란만장하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파괴당한 일상,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불안한 외출’(감독 김철민)이 오는 12월 10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 개봉을 앞둔 윤기진 황선 부부를 만났다. 두 사람은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불안한 자신들의 삶에 대해 “마치 칼날 위를 걷는 기분”이라며 "권태기를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윤기진 씨는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이 영화를 꼭 보여드리고 싶다”며 “얼마 전 옷이 찠기는 수모까지 당하시는 걸 보면서, 그 모멸감과 아픔이 상상이 됐다. 지금 수배받으며 몸을 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남의 일같이 않았다”고 말했다.

황선 씨는 “영화를 만든다고 할 때는 내 삶이 보편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까 자신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감할 수 있겠구나 하고 자신감을 얻었다”며 “이 나라가 왜 거꾸로 가는지에 대한 답을 이 영화가 약간은 구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 다큐멘터리영화 '불안한 외출'의 주인공 윤기진 민권연대 공동대표(왼쪽)와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가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민중의 소리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양지웅 기자


“내 생각대로 만들 지 않은 게 다행… 하마터면 재미 없었을 뻔”

 질문  : 주인공으로서 영화 ‘불안한 외출’을 본 소감은 어떠했나?

 윤기진  : 처음 김철민 감독이 영화를 찍는다고 했을 땐 ‘이런 걸 누가 봐’라고 생각하면서 반대했다. 하지만 막상 영화로 만들어진 걸 보면서 많이 울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하기 전에 영화를 처음 봤다. 특히 수배와 감옥 생활로 보지 못했던 딸들의 과거 영상을 영화로 볼 수 있어 좋았다. 국가보안법 문제를 내용에 치중해 다루진 않았지만, 우리 부부의 삶과 일상을 통해 보다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황 선  : 처음 영화 찍는다고 했을 때 의식을 안 했다. 흔한 기록 영상 정도로만 여겼다. 흔한 투쟁 영상으로 생각했다. 사실 영화가 될까 하고 의문이 있었다. 제안을 받았을 땐 영화로 만들어지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못 했다. 영화는 계속 찍고 있었지만 어떻게 나올진 몰랐다. 그러다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에서 관객들과 함께 처음으로 봤다. 많이 울었다. 특히 지금도 영화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게 되는 장면이 있다. 1996년 연대에서 학생들이 잡혀가는 모습, 결혼식에서 남편이 우는 대목, 아이들이 저를 접견하는 뒷모습 등 눈물이 매번 흐른다. 살면서 그렇게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생각지 않았는데, 내 삶의 기록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다니 창피하기도 했다.

 질문  : 영화를 보기 전엔 국가보안법 체제와의 처절한 사투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가벼우면서도 절절해서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어떤 방향으로 하자는 이야기가 김철민 감독과 있었나?

 윤기진  : 만약 내 의견대로 만들어졌다면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처음엔 다큐멘터리지만 주인공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내용의 흐름이나 편집방향은 철저히 감독의 생각대로 했다. 내가 워낙 생소한 사람이고, 나에 대한 이미지가 하도 강렬해서 해명하고 싶었다. 한총련과 범청학련 등이 이적단체가 아니라고 설명하고 싶었다. 그런 의견을 제시했지만, 전혀 반영이 안 됐다. 가족과 사람을 다룬다는 말을 감독이 강조했는데 솔직히 첨엔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영화로 만들어진 걸 보니 내 생각대로 만들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재미가 없었을 뻔했다.

▲ 다큐멘터리영화 '불안한 외출'의 주인공 윤기진 민권연대 공동대표(왼쪽)와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가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민중의 소리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손을 잡고 있다. ⓒ양지웅 기자

 질문  :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은 어떤가?

 황 선  :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상영을 앞두고 마치 종북 찬양 영화가 상영되는 듯 9시 뉴스에까지 보도가 나왔다. 그래서 걱정도 많았다. 그런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2번의 상영을 했는데 모두 만석이었다. 해외 인사들도 좋은 반응을 보였다. 무사히 영화가 상영됐다. 하지만 이후 11월 하순 제가 신은미 씨와 한 토크 콘서트를 정권이 문제 삼으면서 영화를 상영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그리고 토크 콘서트를 빌미로 구속되면서 영화는 다시 만들어졌다. 시간이 지나 이제야 다시 서울인권영화제와 전주인권영화제 등에서 상영하게 됐고, 극장 개봉까지 이어지게 됐다.

 윤기진  : 나는 영화를 보고서 좋았는데 관객들의 반응은 어떨지 불안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할 때 외국인 두 분이 보시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격려를 해주시는 걸 보면서 놀랐다. 우리 사회를 잘 모르는 외국인들도 공감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여든 살이 넘은 어르신이 따님 손에 이끌려 영화를 보셨다. 진보니, 운동이니 이런 건 모르고 사신 분인데 영화를 보고 감동하셨다고 나중에 민이와 겨레 용돈까지 보내주셨다. 지역 공동체 상영을 하면 연세 지극한 어르신들, 고등학생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들이 공감해줬다. 진보 단체 활동을 하는 남편따라 우연히 영화를 본 분이 있었다. 영화를 본 뒤에 뒤풀이까지 참석하셔서 남편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하시기도 했다.


“여행담 수준의 발언 빌미로 검찰은 징역 5년 구형”

 질문  : 국보법이 가져다준 아픔이 부부로 끝나는 게 아니라 모든 가족으로까지 확산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윤기진  : 아버지가 국정원을 만나 저를 자수시키려고 한다는 걸 일찍부터 알았다. 1999년부터 집 근처에 아예 2명이 상주를 했다. 아버지와 친해지려고 동창에 고향 친구까지 찾아 보냈다. 당시 숨어다니는 상황이어서 옆에 있다면 아버지를 설득이라도 하고 해명도 하고 할 텐데 답답했다. 여동생이 해고됐을 때는 충격이 컸다. 또 학교에서 저랑 관계된 동기와 선배, 후배들 대부분이 고초를 겪었다. 군에 입대하면 100% 기무사에 끌려갔다. 영창은 안 가도 그것만으로 군대생활은 힘들어지게 된다.

 황 선  : 국가보안법은 한국 사회에서 그 어떤 범죄보다 주변의 삶까지 미치는 영향이 크다. 빨갱이라는 멍에는 가장 지독한 아픔이 된다. 가족뿐 아니라, 이웃과 친구 관계에 이르기까지 다 변형시켜 버린다.

▲ 다큐멘터리영화 '불안한 외출'의 주인공 윤기진 민권연대 공동대표(왼쪽)와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가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민중의 소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양지웅 기자

 질문  : 두 사람 재판 상황은 어떤가?

 윤기진  : 감옥에서 쓴 편지가 문제가 돼 1심에서 지역 1년 6개월을 받았고, 이후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됐고, 지금은 대법원에 2년 6개월째 계류 중이다. 재판 선고가 너무 길어져서 약간 불안한 상황이다.

 황 선  : 콘서트와 관련해 구속까지 됐지만, 공소장의 많은 부분은 남편의 편지와 관련된 부분이다. 편지를 받아서 인터넷에 올렸다고,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라고 주장하며 부부가 공범이라고 했다. 그런데 제작 혐의까지 두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재판을 하면서 공소변경을 통해 제작은 뺐다. 압수수색 때 가져간 것 대부분은 남편 편지, 제가 십몇 년 전에 쓴 시 등이다. 이런저런 걸 모아 지난 11월 27일에 검찰은 징역 5년을 구형했다. 1심 선고 공판은 내년 1월 22일 열린다.


“20년 전 일기장까지 꺼내서 벌인 전형적 마녀재판”

 질문  : 황 선 씨와 재미교포 신은미 씨가 한 토크 콘서트가 이른바 종북콘서트로 몰린 상황에 놀랐다. 토크 콘서트 내용은 과거 같으면 통일부에서 주최한 행사에서도 들을 수 있을 법한 내용이다.

 황 선  : 지난 2013년 통일부에서 신은미 씨를 모셔다가 이번 토크쇼와 같은 내용을 영상 찍어서 홈페이지에 교육 자료로 올려놨다. 근데 ‘종북’ 소동이 일어나고 나서 통일부가 홈페이지에서 동영상을 내렸다. 지우기 전에 내려받은 동영상이 있어서 이번 재판에 증거로 제출하기도 했다. 전 세계 그 어느 나라를 여행하고, 그 나라에 대한 소감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데 유독 북과 관련해선 여행담 수준의 발언조차 용납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다.

 질문  : 공소장을 보면 토크 콘서트가 테러까지 유발했으니 토크 콘서트를 처벌하고 막아야 한다는 적반하장식의 주장이 등장한다.

 황 선  : 지난 11월 총궐기 집회 상황이랑 유사하다.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부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데 아무도 사과를 안 하면서 폭력 시위가 문제라고만 한다. 폭력 시위를 모든 사건의 원인으로 몰아간다. 이에 부응해 공권력은 출석요구서를 남발하고 있다. 지난해 신은미와 황 선에게 테러가 벌어졌는데, 공권력은 두 사람이 테러를 유발했다며 오히려 우리 집을 압수 수색을 했다.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 등이 거들고 나서면서 구속과 추방이 이어졌다.

 질문  : 편지와 일기장이 국가보안법 위반의 증거로 제시됐다. 마치 개인의 머릿속까지 뒤집어 보는 느낌이다.

 황 선  : 압수한 일기장은 1998년 방북해서 쓴 것이다. 어머니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기록이었다. 당시엔 남쪽으로 오면서 경황이 없어서 짐을 챙기지 못했다. 그러면서 일기장도 두고 왔다. 그 일기장과 짐을 당시 방북에서 만났던 북측 친구들이 보관하다가 2005년 평양에서 출산했을 때 평양산원에 직접 찾아와 전해 준 것이다. 당시에 통관도 무사히 통과했고, 그동안 수차례 압수수색 과정에서도 손대지 않았던 일기장이 국가보안법 위반 증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하고, 앞뒤 문맥을 잘라 자기들 유리한 대로 여론전에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조국 산천이 아름답다’는 북을 조국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로 뒷 문장을 보면 남쪽을 조국이라 칭하는 대목이 나온다. 뒤는 자르고, 앞만 남겨서 왜곡하는 식이다. 이런 왜곡을 두고 법정에서도 다투고 있다. 20년 전 일기장을 꺼내 들고 벌이는 전형적인 마녀재판이다.

▲ 다큐멘터리영화 '불안한 외출'의 주인공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가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민중의 소리에서 인터뷰 중 윤기진 민권연대 공동대표를 바라보고 있다. ⓒ양지웅 기자


“페이스북 좋아요 누르기조차 주저하게 된다”

 질문  : 종북으로 지목당하고 공격당하면 아무도 옆에 서지 않는다.

 윤기진  : 종북몰이는 국보법이 없으면 생길 수 없는 일이다. 정권의 탄압에 맞서 모두가 단결해서 싸워야 함은 모두가 잘 안다. 하지만 ‘종북이냐’, ‘아니냐’는 이야기가 끼는 순간 상황이 달라진다. ‘종북이냐’는 질문이 나오면 ‘나는 종북이 아니야’라고 말해도 그 순간 맞잡은 손이 풀린다. ‘종북이냐’는 질문이 나오면 이건 상식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질문이라고 맞받아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한총련 출신이다 보니 전대협 출신 선배들과 인연도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끊겼다. 특히 정치인으로 있는 분들과는 더욱 그러하다. 사진 한 장도 맘대로 못 찍고, 페이스북에서 ‘좋아요.’ 누르기도 주저하게 된다.

 황 선  : 그래도 관계가 끊기는 건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다수의 국민에게 무의식에 공포로 자리한다는 게 무섭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구나.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구나가 공포와 함께 체득된다. 그게 가장 무섭다. ‘종북이냐’는 질문은 몰상식한 일로 치부돼야 하는데 지금도 진보진영에서 이 질문을 용인하는 이들이 있다. 경계를 나누고, 따로 세우고, 분리한다. 진보진영 스스로가 이 논리에 빠져들면 안 된다. 국가보안법과 빨갱이몰이, 종북몰이가 가진 쓸모는 분단 기득권 세력들이 더욱 잘 안다. 7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국가보안법 논리는 더욱 견고해졌다. 부정부패, 친일 친미 분단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도 유지하는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질문  : 신혼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셈이라고 말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외출이 계속되고 있다.

 윤기진  : 2011년 출소하면서 마치 신혼생활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당시에 신혼처럼 열심히 살겠다고 인터뷰를 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현실이 다가왔다. 말 그대로 처음 살다 보니 부딪히는 게 많았다. 청소, 식사, 생활습관까지 너무 생소했고, 많이 부딪혔다. 그러면서 사소한 다툼도 많아지려는데, 감옥에 갔다가 다시 무죄로 나오면서, 다시 신혼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권태기를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

 황 선  : 우리 부부의 삶을 돌아보면 마치 꽃이 없이 열매만 맺은 ‘무화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은 만들어졌는데 실제 생활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이 고생한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이 사람의 잘못이 아닌데 그동안 비운 자리, 그 지난 시간에 대해 섭섭함을 보상받고 싶은 심리가 내게 있었다. 나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면 모든 게 후련해질 것이라 기대했다. 시누이는 오빠가 돌아오면 그동안 오빠의 몫까지 했던 그 무엇으로부터 해방될 거라 기대했다. 그런 부분들이 겹치면서 많이 힘들었다. 여기에 출소는 했지만 언제 들어갈지 모른다는 긴장이 더해졌다. 아슬아슬 마치 칼날 위를 걷는 시간 같았다.

 윤기진  : 재판 스트레스가 심했다. 내게 주어진 이 평안함이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은 긴장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이런 시간이 반복되면서 힘들었다.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2심 선고를 앞두고 재판이 한 달 연기되니깐 저는 못 느꼈는데 표정에서 확 드러났다. 담담하게 싸워왔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긴장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질문  :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 영화를 어떤 이들이 보았으면 하나?

 윤기진  : 그때그때 보여주고 싶은 이들이 달라진다. 처음엔 지난 1990년대,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 동시대를 살아가며 함께 싸웠던 이들이 같이 봤으면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영화가 한총련 또는 학생운동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느꼈다. 시대를 살아가며 농민도, 노동자도 각자의 지점에서 고립도 되고, 고통도 받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들과 공감을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꼭 보여드리고 싶은 분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다. 얼마 전 옷이 찢어지는 수모까지 당하시는 걸 보면서, 그 모멸감과 아픔이 상상이 됐다. 지금 수배받으며 몸을 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남 일같이 않았다. 꼭 영화를 같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 선  : 광명에서 공동체 상영을 할 때 아무 인연 없이 플래카드를 보고 영화를 보러 오신 동네 어르신들이 계셨다. 오셔서 영화를 보시고 이렇게 사는 이들이 있는 거에 놀랐다면서 사진까지 함께 찍고 가셨다. 이런 분들이 보셔도 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만든다고 할 때는 내 삶이 보편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까 자신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감할 수 있겠구나 하고 자신감을 얻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기회가 많게 보장되진 못하고 있다. 전국에 개봉관이 10개 남짓이다. 다큐멘터리가 개봉관을 잡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해도 너무 적다. 시간마다 좌석을 꽉꽉 메워도 볼 수 있는 이들은 한정된다. 그런 어려운 조건이지만 많은 이들이 봤으면 한다. 이 나라가 왜 이렇게 가지, 왜 1970년대 유신 시절로 회기 위한 거지, 한국사 교과서를 왜 국정화하는지 등 이 나라가 왜 거꾸로 가는지에 대한 답을 이 영화가 약간은 구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영화 ‘불안한 외출’ ⓒ기타


출처  [인터뷰] 윤기진 황선 부부 “마치 칼날 위를 걷는 기분… 권태기를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