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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음모, 정당해산, 소요죄까지…‘박근혜 신독재’ 시대 맞은 한국사회

내란음모, 정당해산, 소요죄까지…‘박근혜 신독재’ 시대 맞은 한국사회
[기획-통합진보당 해산 1년, 한국사회 어디까지 왔나 ①]
죽어있던 법 조항들 되살려 ‘독재정치’ 뒷받침

[민중의소리] 강경훈 기자 | 최종업데이트 2015-12-18 11:11:56


▲ 유신폐계 을미5적 박근혜.(자료사진) ⓒ뉴시스


사상 초유의 정당해산 사태가 벌어진지 어느덧 1년여가 지났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이후 이석기 전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을 시작으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과도한 집회‧시위의 자유 제한에서 비롯된 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소요죄 적용 등 1987년 이후 전례 없는 공안탄압으로 일관하면서 ‘독재 정치’를 공고히 하고 있는 모습이다.


‘독재정치용’ 법 조항들 남발됐던 과거

이석기 전 의원에게 덧씌워진 내란음모나 내란선동, 정당 해산, 경찰이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적용한 소요죄 등은 과거 군사독재 정권이 민주주의를 압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던 것들이다.

이승만 독재 정권 때 벌어진 이른바 ‘진보당 사건’은 박근혜 정권의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이어지는 맥락과 흡사했다. 당시 진보당 창당을 준비하고 있던 죽산 조봉암 선생은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30%의 득표율을 보였다. 이승만은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에 위협을 느꼈고, 1958년 1월 ‘조봉암이 북한 간첩에게 공작금을 받아 북한 지령에 따라 간첩행위를 해 대한민국을 음해했다’는 내용의 ‘진보당 사건’을 꾸몄다. 이승만 정권은 같은 해 2월 진보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당 해산 사건이었다. 조봉암 선생 등 진보당 지도부는 대거 기소됐다.

박정희 독재정권에서 ‘내란음모죄’는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을 위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됐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이다. 1971년 중앙정보부는 서울대 제적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국가 전복을 위해 내란음모를 모의했다고 발표하고 서울 지역 7개 학교에 군인을 진주시키고 8개 대학에 휴업령을 내렸다. 중앙정보부의 타깃이 된 이들은 전원 기소됐다. 재판부는 반국가단체 구성 위반만 무죄로 보고 형법상 내란예비음모, 폭발물 사용 예비음모 등을 적용해 전원 실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박정희 독재정권이 학생운동의 유력 지도자들을 사전에 탄압해 민주화 운동 세력을 약화시키고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기 위한 공안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조작한 사건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김대중 일당이 정권을 잡기 위해 민중을 선동해 일으킨 봉기’로 조작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재야 인사 20여명을 내란음모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군사법원은 김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문익환, 고은, 이해찬 등도 같은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2003년 10월 재심을 청구해 2004년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상균 위원장과 1차 민중총궐기 주도자들에게 적용하겠다고 공안당국이 엄포를 놓고 있는 형법상 소요죄 조항 역시 과거 군부 정권에서 민중들의 저항을 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됐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전두환 군부에 의해 끌려간 희생자들이 소요죄로 처벌받은 적이 있고, 전두환 집권 후반기 6.10항쟁의 불을 붙였던 인천 5.3항쟁의 주역들도 소요죄로 대거 검거됐었다.

5·3항쟁은 당시 제1야당인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당 총재가 ‘소수의 과격 좌익 학생세력들’ 등의 발언을 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에 반발한 재야와 대학생 등 약 1만여 명의 시위대가 1986년 5월 3일 신민당 인천 및 경기도지부 결성대회 개최를 방해하며 오후 1시부터 약 8시간 동안 격렬한 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충돌했다. 5‧3항쟁은 1980년 5월의 광주 이후 군사독재 정권에 대항한 가장 큰 민중 투쟁이었고, 숨죽여 지냈던 민중 진영이 독재 정권과 타협적 자세를 취하던 야당과 차별화를 선언하고 변혁 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독재정치’ 영위하던 수단들 그대로 부활…‘박근혜 신독재’ 시대 도래

위 사례들을 통해 알 수 있듯 과거 독재정권 휘하의 한국 사회에서는 ‘법치’의 개념이 굉장히 미흡했다. 정권은 지나칠 정도로 법 조항들을 왜곡‧과잉 적용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기본권을 유린당하던 민중들도 ‘법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1987년 6월 항쟁을 겪은 이후 9차 헌법 개정에 따라 기존의 권위주의적 정부형태가 민주화됐다. 개정 헌법은 대법관을 국회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해 실질적인 사법권 독립을 명시하고, 헌법재판소를 신설하는 등 ‘법치’를 한 단계 강화시켰다.

이후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쳐 민주주의가 일정 부분 성숙하면서 정치적 다원주의가 일반화되고 집회‧시위의 자유가 당연히 보장돼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자연스럽게 한국사회에서는 과거 군사독재 정권에서 남발했던 내란음모나 소요죄 적용 행태도 거의 사라졌다.

1987년 이후 사문화되다시피 했던 이들 법조항은 역설적이게도 30여년이 지나 되살아났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이 민주주의를 압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들 법 조항을 남발했던 모습과 판박이다. 박근혜 정부의 지휘 아래 사정기관과 사법부는 교묘한 논리를 들어 내란음모, 통합진보당 해산 등 초유의 사태를 현실화시켰다. 바야흐로 ‘박근혜 신독재’ 시대가 도래한 듯한 모습이다.

▲ 유신독제자 박정희와 박근혜. ⓒ뉴시스


우선 내란음모 사건을 들여다보자.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내란음모죄 성립과 지하혁명조직 ‘RO’의 존재 여부였다. 검찰은 이 사건 핵심 증인으로 지목한 국정원 프락치 A씨의 진술을 바탕으로 이석기 전 의원을 총책으로 둔 RO가 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또 ‘5.12 강연’ 도중 나왔던 일부 발언에 참석자들이 호응한 것을 두고 내란음모에 합의했으므로 실질적인 위험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내란음모 혐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시기 및 대상, 수단과 방법 등을 바탕으로 한 실행 가능성이 담보돼야 한다.

대법원은 위 두가지 부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RO의 경우 근거가 부족하다며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내란음모 혐의와 관련해서는 “토론을 넘어 실행에 나가자는 합의를 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내란에 이를 정도의 실질적 위험성도 없었다”고 판단했다. 다만 내란선동 혐의에 대해서는 별다른 법리적 논리 없이 혐의를 인정했다. 대법원은 ‘선동’이 감정을 자극하는 추상적인 표현으로도 가능하므로 이 전 의원 등의 발언이 ‘내란선동’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사법부의 최종 판단에 대해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선동’은 언어의 추상성과 다의성으로 인해 그 적용 범위가 무한히 확장될 위험성이 있어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반하고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가 크다. 선동으로 인해 상대방이 범행 결의에 이를 것을 요하지 않기 때문에 선동의 의미를 제한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봤다. 이에 따라 “내란선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내란음모죄의 경우와 같이 반드시 범죄행위의 시기, 대상, 방법 등 내란 행위의 윤곽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특정해 선동해야 한다. 선동을 문언 중심적 해석에 따라 넓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내란선동 혐의에 대한 판단은 내란음모 혐의에 준하는 엄격한 요건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작년 12월 19일 헌재가 내린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역시 허점 투성이었다. 헌재는 정당해산이라는 초유의 사건에 대해 북한식 사회주의라는 ‘숨은 목적’이 있다며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켰다. 이 ‘숨은 목적’을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는 물론 없었다.

헌재는 또한 진보당 구성원들의 활동에 대한 위헌성도 입증하지 못했다. 진보당의 북한식 사회주의 추구 근거로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을 들었으나, 당시까지 이 사건과 관련해 항소심 재판부는 내란음모 혐의를 무죄로 봤으며, ‘RO’의 실체도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헌재는 이 부분들을 그대로 인용하는 오류를 범했다.

당시 진보당 소송대리인이었던 이재화 변호사는 헌재 결정 직후 “진보당 목적과 활동의 위헌성을 입증하기 위해 퍼즐조각을 짜깁기 하듯 만들어냈다. 증거에 의한 판결문이 아니라 재판관들의 가치관과 편견을 가지고 쓴 공안소설이다”고 비판했다.

경찰이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소요죄를 적용한 건 이른바 ‘5·3 항쟁’ 이후 30여 년 만이다. 경찰은 한 위원장의 소요죄 혐의와 관련해 지난달 14일 1차 민중총궐기 때 벌어진 불법·폭력 시위는 민주노총 핵심 집행부와 관련 단체 간부들의 치밀한 사전 기획에 의해 준비됐다고 주장했다. 특히 집회 당일 오후 1시 30분부터 이튿날 0시 15분까지 6만8천여 명의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해 교통을 마비시키고, 경찰폭행 및 경찰버스 손괴 등 과격 시위를 벌여 광화문, 종로 일대의 평온을 심각하게 해쳐 소요죄 적용 요건이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당시 실제로는 서울시청광장과 광화문 광장 사이 500m도 되지 않은 거리의 일부 공간에서만 시위대-경찰 간 충돌이 발생했었다. 이때 발생한 폭행 및 손괴 행위는 일부 경찰관들과 경찰이 집회를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차벽에 한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공공의 평온을 해할 정도’였다고 보는 건 과잉 해석이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박주민 변호사는 “당시 집회 현장에서 일부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건 경찰과 직접적으로 대치하는 것이고, 당사자도 10만 명 중 몇백 명에 불과했다. 이를 두고 ‘일정한 지역의 평온을 해할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다고 하기엔 법리적으로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공소사실에 소요죄가 추가되더라도 법원에서 인정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 법률가들의 중론이다. 박 변호사는 “영장 단계에서 적용하지 않고 나중에 추가조사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없다는 것”이라며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을 100%라고 본다”고 단언했다.


출처  내란음모, 정당해산, 소요죄까지…‘박근혜 신독재’ 시대 맞은 한국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