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vs. 국정원 대선개입과 내란음모 사건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vs. 국정원 대선개입과 내란음모 사건
쇼크 자본주의 또는 광기 자본주의
[민중의소리] 김대규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 발행 : 2016-09-04 16:47:13 | 수정 : 2016-09-04 17:14:45


편집자주 - 9월 1일 관동(간토)대지진을 즈음해 김대규 교수의 기고를 게재합니다.

캐나다 맥길대학 부속병원에 이웬 카메론이라는 의사가 있었다. CIA의 은밀한 지원 하에 그를 찾는 환자들의 두뇌에 전기 '쇼크'를 가했다. 주로 산후우울증, 불안, 심지어는 결혼생활 문제로 이웬 카메론 박사를 상담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닥터 카메론은 외부로부터 자극을 차단하고 대량의 전기쇼크를 가하게 되면 인간을 백지상태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백지로 재탄생한 사람에게 새로운 내용을 학습시키면서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인격을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시도에 CIA는 큰 흥미를 느꼈다. 이런 쇼크요법을 세뇌기법에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실험의 피해자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바보가 되어 버리거나 식물인간이 되기도 하고 장기간 후유증에 시달렸다.


경제불황과 대지진에 ‘쇼크’를 처방한 일본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할 당시 일본은 극심한 전후 불황을 겪고 있었다. 원인은 크게 세 가지였다. 전쟁을 끝낸 열강들이 해외수출을 늘리면서 세계대전(1915~1918) 중에 이른바 ‘어부지리’로 이익을 내고 있던 일본의 수출이 급격히 감소한 것과 세계대전 시기부터 지속되어온 과잉생산, 그리고 주식과 선물시장의 이른바 ‘버블’이 터지면서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었다.

여기에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일본인들이 ‘쌀소동’이라 부르는 전국적인 폭동이 일면서 내각이 사퇴하는 등 인심이 흉흉했다. 전쟁 특수를 누리지 못한 노동자들이 대거 파업을 일으켰고, 급격한 도시화로 주요도시들의 도시 기능이 한계를 노출하고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내전에 개입하여 시베리아에서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지만 1922년 일본은 빈손으로 철병을 하였다.

이런 와중에 1923년 9월 1일 가나가와 현 서부지역을 진원지로 하는 진도 7.9의 큰 지진이 발생했다. 요코하마·도쿄를 비롯한 대도시에 큰 피해가 발생하고 지진 후의 화재로 인한 피해가 확대되었다. 사망자·행방불명자 10만 5천 명, 주택 전멸 10만 9천 건, 주택 일부 피해 10만 2천 건, 소실 21만 2천 건이라는 거대한 피해였고, 간토 지역 연안에는 쓰나미가 덮쳐서 아타미(熱海)에서는 파고가 12m에 달했다.

심한 흔들림에 놀라고 화재 화염에 쫓겨 도쿄의 도시 기능은 완전 마비가 되었다. 혼란 수습을 위해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내렸다.

체제 붕괴의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택한 방법은 이웬 카메론과 같은 ‘쇼크’ 처방이었다. 일본 내무성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한 대응방침을 각급 경찰서에 하달했다.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내무성의 하달 방침을 동경일일신문 등 몇몇 신문이 여과 없이 인용 보도하였고, 여기에 살을 덧붙인 유언비어들이 ‘따옴표(“……”) 형식으로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 등 대형 신문사에 게재되었다.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

경찰과 매스컴을 통해 확산된 소문은 그야말로 ‘쇼킹’했다. 일본 대중들에게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하는 ‘쇼크’였다.

▲ 집단학살 당하는 동경의 조선인들. ⓒ가야하라 하쿠도 작품


국정원 대선개입을 내란음모라는 쇼크로 탈출한 박근혜 정부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사건을 규탄하며 박근혜의 책임 있는 자세와 진상규명을 위한 특검을 촉구하는 촛불이 연일 번지고 있던 2013년 8월 28일. 국정원은 이 의원을 포함한 진보당 간부 10명의 집과 의원실 등 18곳을 전격 압수수색하고 3명을 체포한다. ‘내란음모’ 사건의 시작이었다.

매스컴은 ‘국회의원 내란 음모’와 ‘이석기’로 도배를 하였다. 너도 나도 뛰어든 자극적 보도 경쟁 속에 ‘공안당국 관계자’, ‘국정원 관계자’ 발 무수한 ‘따옴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루 만에 “언론에선 재판 끝”이라는 표현마저 나왔다.

체제위기를 맞은 일본과 한국의 두 정부가 대처한 방식은 대중의 의식을 백지로 만들려는 ‘쇼크’였다. 체제 위기가 거듭될수록 쇼크는 더 강해진다. 그 결과 대중은 바보가 되어 버리고 정치는 식물화되면서 체제 자체가 장기간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전전 일본이 그러했듯이 전후 일본과 작은 일본을 지향하는 이남의 정치체제도 이를 닮아 간다. 나오미 클라인은 자신의 책 ‘쇼크 독트린’에서 이런 체제를 ‘쇼크 자본주의’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광기 자본주의’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본다.


출처  [기고]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vs. 국정원 대선개입과 내란음모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