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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베일 벗은’ 국정교과서, 조목조목 뜯어보니…

‘베일 벗은’ 국정교과서, 조목조목 뜯어보니…
친일파 서술 대폭 줄이고, 박정희 경제성장 강조
중학교 <역사2>에서 친일파 기술은 10줄도 안돼
박정희 정부 경제성장은 10쪽에 걸쳐 상세히 기술

[한겨레] 정유경 김미영 이아라 기자 | 등록 : 2016-11-28 15:18 | 수정 : 2016-11-28 17:55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역사 국정교과서가 28일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에 입각한 균형 잡힌 교과서”이자 “미래 세대를 위한 올바른 교과서”라고 정부가 강조해 온 교과서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특정 이념으로 치우친 편향성을 바로잡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고 말했다. 교과서는 이미지 파일로 공개됐으며 <한겨레>가 텍스트로 옮겼다.


친일파 기술 부분 축소

국정 교과서 중학교 <역사2>에서 친일파에 대한 기술은 1쪽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름이 등장한 인물도 이광수, 노천명, 김기진, 최린 등 문인 위주다. 친일 행위에 대한 언급도 뭉뚱그렸다. 반면 현행 검정교과서 가운데 하나인 금성출판사는 “이광수나 최남선과 같은 저명한 문인들은 조선 민중들에게 징병과 학도병에 지원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등 자신들의 문학적 재능을 조선 청년들이 전쟁터로 나가게 하는 데 이용하였다. 홍난파와 현제명 등은 일제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노래를 작곡하였고, 김은호와 김기창 등은 일제의 침략 전쟁을 옹호하는 그림을 그렸다. 화신 백화점 사장 박흥식을 비롯한 친일 자본가들은 국방 헌금을 내거나 비행기와 무기를 구입하여 일본군에 헌납하였다”고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 중학교 <역사2> 104쪽. 친일파에 대한 기술이 10줄 뿐이다.


(중학교 <역사2>, 104쪽)

3-4-7 친일파가 친일 반민족 행위에 앞장서다

일제는 한국인을 침략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친일파를 활용하고 친일 단체를 양산하였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식민 정책에 협력하거나 군용기 등의 군수품을 헌납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를 일삼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전시 체제 하에서 이광수, 노천명, 최린 등 많은 지식인, 예술인, 종교인들이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황국 신민화 정책을 선전하거나 옹호하였으며, 침략 전쟁에 대한 협력 및 일본군 입대를 권유하는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는 등 친일 활동을 하였다.

(고등학교 <역사>, 229쪽)

특히 이광수, 박영희, 최린, 윤치호, 한상룡, 박흥식 등 많은 지식인, 예술인, 종교인, 경제인이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황국 신민화 정책을 찬양하는 활동에 나서며 신문이나 잡지 등에 황국 신민화 정책을 선전, 옹호하거나 전쟁 협력 및 징병을 권유하였다. 또한 조선 임전 보국단과 같은 친일 단체의 순회 강연회나 좌담회 등에 적극 참여하였다. 일제에 협력하는 종교계 및 친일 경제인 등이 군용기를 헌납하기도 하였다.

▲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229쪽. 친일파 대신 ‘친일 세력’ ‘친일 반민족 행위자’ 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누가 무엇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적는 대신, “이들은…”으로 뭉뚱그렸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 성과 강조

중학교 <역사2>에서는 6쪽에 걸쳐 박정희 정부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경제적 성과에 촛점을 맞췄다. 고등학교 <역사>는 박정희 정부의 ‘혁명공약’을 별도 박스로 함께 다뤘다. 박정희 정부의 성과는 260쪽부터 총 10쪽에 걸쳐 서술했다. 새마을 운동에 대한 소개도 상세히 실었다. 교육부는 “기존 교과서가 경제성장의 성과보다 부작용에 초점을 맞췄다면, 올바른 역사교과서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충분히 서술하였다”고 밝혔다.

▲ 중학교 <역사>, 143쪽. 안보위기와 함께 경제 개발을 다루고 있으며,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도표와 포항제철 착공식 사진을 실었다.


(중학교 <역사2>, 141쪽)

4-5-1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김종필 등을 중심으로 한 약 3천여 명의 군인들이 사회적 혼란과 장면 정부의 무능, 그리고 공산화 위협 등을 명분으로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주요 인사들을 체포하고,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장악하였다. 5·16 주도 세력은 반공, 자유 우방국과의 유대 강화, 경제 재건, 통일, 그리고 민정 이양 후 업무 복귀 등을 ‘혁명 공약’으로 내세웠다.

(142쪽)

4-5-3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다

박정희 정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정부는 부족한 자본을 해외에서 도입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 국내 자금을 동원하기 위해 은행을 통제하였다. 경부 고속 도로를 건설하고, 산업의 기초인 철강을 생산하기 위해 포항 제철을 세웠다. 또한 한국 과학 기술 연구소(KIST)를 설립하고 해외에 있던 과학 기술 분야 석학들을 초빙하여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힘썼다. (중략) 그 결과 수출은 제1, 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에 연평균 36%라는 속도로 증대되었다.

(145쪽)

4-6-2 위기와 갈등 속에 경제가 도약하다

박정희 정부는 1973년 중화학 공업화를 선언하고 그 육성에 박차를 가하였다. 철강, 조선, 기계, 화학, 전자, 비철 금속 공업 등을 집중적으로 지원하였고, 업종별로 대규모 공업 단지를 조성하였다. 그 결과 대형 유조선을 건조하였고, 자동차를 수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중략) 한편 정부가 중화학 공업 제품을 중심으로 수출 진흥 정책을 펼치자 수출이 증가하여 1977년에 수출 100억 달러 목표를 달성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 기업은 재벌로 성장하기도 하였으나, 정경 유착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자살 하는 등 노동자의 권리 보장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다.

(고등학교 <역사>, 261쪽)

5·16 군사 정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정변을 일으켜 주요 인사들을 체포하고, 방송국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사회적 혼란과 장면 정부의 무능, 공산화 위협 등을 정변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5·16 군사 정변의 주도 세력은 혁명 공약을 발표하고,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군사 정부는 국회 및 정당·사회 단체를 해산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한편 부정 축재자 처벌, 농어민 부채 탕감 등을 추진하였다. 또한 국가 안전 보장을 명분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는 국내 정치에 개입하여 정치 자금을 마련하였고 이 과정에서 증권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증권파동 : 1962~1963년에 중앙정보부가 대한 증권 거래소를 장악하고 주가 조작 등을 통해 부당 이득을 챙긴 사건을 말한다.)

5·16 군사 정변 주도 세력은 혁명 공약에서 민정 이양 후 군으로 복귀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약속을 어기고 민주 공화당을 창당하여 민정 참여에 나섰다.

◆ 역사 돋보기 / 5·16 군사 정변 주도 세력이 내세운 ‘혁명 공약'

1.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의 재건에 총격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 집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들의 과업을 성취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는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268쪽)

새마을 운동의 전개

1960년대 이후 경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농촌과 도시간의 소득 격차가 커지고,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이 공동화되고 소외되자, 정부는 이중 곡가제를 실시하고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1971년에 정부는 전국의 마을에 시멘트를 제공하여, 마을 환경을 개선하도록 하였다. 새마을 운동은 정부의 독려로 시작되었지만, 농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농촌의 자립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새마을 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정신을 강조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도로 및 하천 정비, 주택 개량 등 농촌 환경을 개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유신 체제 유지에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2013년 유네스코는 새마을 운동 관련 기록물을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하였다.


박정희 정부 하에서의 안보 위기 강조

중학교 <역사>에서는 김신조, 울진 삼척 무장공비, 주한미군 철수 등 국내 안팎의 안보 위기를 서술한 다음 박정희의 3선 개헌이 이어진다. ‘위기와 갈등 속에 경제가 성장하다’ 등의 소제목들도 눈에 띈다. 고등학교 <역사> 역시 박정희 정부를 다루는 장에서 북한의 대남 도발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동백림 사건·통일 혁명당 사건 등은 작은 글씨로 별도 주석을 달았다.

▲ 고등학교 <역사> 263쪽. 동백림 사건 등 박정희 정부 하에서의 안보위기와 경제성장을 엮어서 소개했다. 경부고속도로의 사진이 실렸다.


(고등학교 역사, 263쪽)

2-1 박정희 정부의 출범과 경제 개발 계획의 추진

계속되는 안보 위기

1967년과 1968년 김일성 정권의 대남 도발은 6·25전쟁 이후 최고조에 달하였다. 1967년 7월 동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관을 중심으로 유럽에 거주하던 교포들과 유학생들을 포섭하려고 했던 ‘동백림사건’이 있었다. 1968년 1월 21일에는 평양에서 밀파된 특수 부대원들(김신조 포함 31명)이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하여 검문에 나서 최규식 종로 경찰서장 등을 사살하면서 총격전을 벌였다. 같은 해인 1968년 11월 울진 삼척 지역에 120여 명의 무장 공비들이 침투하였고, 북한과 연계된 통일 혁명당이 적발, 검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정부는 향토 예비군을 창설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을 실시하는 등 반공 정책을 강화하였다.

1. 동백림 사건 : 1967년 중앙정보부는 유럽에 거주하고 있던 지식인, 유학생 등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관과 연계된 간첩 활동을 벌이다 적발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사건 관련자들 중에는 평양에 가서 조선 노동당에 입당한 경우도 있었지만, 중앙정보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한 측면도 있었다.

2. 통일 혁명당 : 평양의 조선 노동당과 비밀리에 연계되어 있던 한국 내의 지하당으로 최고 책임자 김종태는 사형에 처해졌다. 통일 혁명당 사건은 6·25 전쟁 이후 이 당시까지 한국 내에서 발생한 간첩단 사건들 중 최대 규모였다.


재벌의 등장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 공업 육성 챕터 뒤에 대기업과 기업인들을 별도로 소개했다. 이병철, 정주영이 등장했다. 박정희가 박태준 회장과 함께 포항 제철 제2고로에 불붙이는 사진을 함께 실었다.

▲ 고등학교 <역사>. 포항제철 제2고로에 불붙이는 박정희의 사진이 실렸다.


(고등학교 <역사>, 267쪽)

이 과정에서 재벌이라고 불리는 대기업 집단이 성장하여 여러 업종에 걸쳐 많은 계열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재벌은 충분한 자금과 인력을 바탕으로 투자 규모가 큰 중화학 공업과 신규 사업에 진출하였다. 이를 토대로 한국의 대기업은 이후 미국, 유럽 등 세계적 기업들과 성장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대기업으로의 경제력 집중이 심화되었고, 정경유착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금융 산업은 중화학 공업에 자금을 공급하기 위한 정부 규제가 강화되면서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 역사 돋보기 /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인

유일한(1895~1971)은 일제 강점기에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질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였으며, 기업 활동을 통해 모은 대부분의 재산을 공익 재단에 기증하여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의 아름다운 가치를 보여주었다.

이병철(1910~1987)은 삼성 물산, 제일 모직 등의 기업을 세우고 1960년대 전자 산업의 발전 가능성을 파악하여 삼성 전자를 설립하였다. 1980년대에는 반도체 산업에 투자하여 한국이 정보 산업 기술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기여하였다.

정주영(1915~2001)은 현대 건설, 현대 자동차, 현대 중공업 등 한국의 수출 산업을 이끈 기업들을 창업하였다. 특히 그가 대규모 조선소 건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영국 투자 은행에 보여주며 “우리는 이미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었다.”라고 설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대한민국 건국 1948년” 뉴라이트 주장 반영

국정교과서에서 가장 첨예한 대립을 빚었던 지점이다. 뉴라이트 학자들은 이승만 정부 수립일(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이라고 주장해 1919년 임시정부의 계승을 주장한 기존 학자들과 맞섰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 정부 수립 기념사에서 “대한민국 30년 대통령 이승만”이라고 끝맺은 바 있다.

(중학교 <역사2>, 129쪽)

제헌 헌법에 기초에 대한민국 정부가 구성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고등학교 <역사>, 250쪽)

제헌 헌법에 따라 국회에서 이승만과 이시영이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선출되었고, 광복군 지도자 이범석을 국무총리(국방부 장관 겸임)로 하는 내각이 조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구성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1948.8.15). 대한민국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 자유선거에 의해 수립된 국가였다.

▲ 고등학교 <역사> 250쪽. 교육부는 “기존 검정 교과서의 (1948년)‘대한민국 정부 수립’ 표현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로잡았다”고 발표했다.


▲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7단원 마무리 부분.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표기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을 별도의 박스로 기술했다. ‘제2의 한일협정’이라고 비판받는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 문제는 다루지 않았으나, 과거 독일의 ‘기억·미래·책임 재단’이 강제노역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한 사례를 “역사 화해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본의 진전된 사과 없이 보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의 ‘불가역’적 협상의 결과물로 탄생해 피해자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국내 ‘화해·치유 재단’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그 외에 ‘세계 속의 대한민국’ 장에서 “한국의 국격이 높아지면서 세계적 지도자로 진출하는 한국인도 늘어났다” “한류라는 용어도 생겨났다”고 소개했다.

(고등학교 <역사>, 290쪽)

한일 간에는 백제와 왜의 친선 관계, 조선 통신사와 같은 우호의 역사가 있었지만, 왜구의 침입, 임진왜란, 침략 전쟁, 식민지 지배와 같은 불행한 역사도 있었다. 우호적 역사는 계승하고 불행한 역사는 반성하는 가운데 진실에 입각한 역사 인식을 통해 평화와 공존의 길로 나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독일은 나치 강제 수용소에 ‘나치 강제 노동 자료 센터’를 만들어 현장을 보존하고, 여성 성 노예 수용소에 추모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기억·미래·책임 재단’을 설립하여 강제노역자, 재산 피해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등 역사 화해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 고등학교 <역사> 290쪽. 2015년 위안부 협상 타결에서 일본의 진전된 사과 없이 보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의 ‘불가역’적인 협상을 해 비판받는 점, 피해자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화해·치유 재단’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출처  ‘베일 벗은’ 국정교과서, 조목조목 뜯어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