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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 중 적폐’ 노동자 죽이는 손배가압류···2017년엔 사라질까

‘적폐 중 적폐’ 노동자 죽이는 손배가압류···2017년엔 사라질까
[경향신문] 김상범 기자 | 입력 : 2017.01.27 10:29:02 | 수정 : 2017.01.27 10:40:57


▲ 민주노총 사업장 대상 연도별 손해배상 청구액|손잡고 제공


“지금 통장에는 단돈 50만 원도 없어요. 그런데 90억 원이라니. 꿈꾸는 것만 같고 아무런 짐작도 가지 않는 돈이죠.”

90억 원,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황호기씨(46)가 지난 7년 동안 지고 살아온 손해배상소송 금액이다. 그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막대한 손해배상 액을 떠안게 된 것은 공장 점거농성 때문이었다. 2010년 7월 대법원이 현대차 불법파견 판결을 내리자 사내하청노조는 그해 11월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울산 1공장에서 25일간 점거농성을 벌였다. 현대차는 생산 차질을 이유로 농성 참가자들에게 200억 원에 이르는 무더기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

이윽고 황 씨의 월급계좌는 가압류가 걸렸다. 유일한 생계수단을 봉쇄당한 것이다. 이듬해 해고당한 뒤에는 가압류 계좌로 들어오던 임금마저 받을 길이 없어졌다. 2013년 10월 울산지방법원은 “사내하청노조가 생산시설을 폭력적으로 점거한 것은 민사상 배상할 책임이 있다”며 황 씨 등 22명에게 90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노조는 항소했지만, 설 연휴 이틀 전인 지난 25일 부산고등법원은 원심을 확정판결했다.

22명이던 손배소 대상자는 항소심이 진행되는 동안 황 씨를 포함 4명으로 줄었다. 회사는 손해배상을 협상 도구로 사용했다. 사내하청노조가 줄곧 요구해온 정규직 전환 대신 ‘신규채용 입사’ 조건을 받아들이고,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취하까지 약속한 노동자에게 회사는 손배소 취소라는 ‘당근’을 내밀었다. 당장 생계수단이 막막하고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액수에 압박을 느낀 동료들이 하나둘 합의안을 받아들였다.

공장점거에 참여했던 하청노조원 가운데서는 황 씨 혼자 남았다. 나머지 3명은 연대투쟁을 했던 정규직 노동자들이다. 황 씨는 “항소 인지대만도 1억 원에 가까운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정부의 손해배상청구에 반대하며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다시 노숙농성에 돌입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2009년 직원 2,400여 명을 감축하는 구조조정에 맞서 77일간 공장 옥쇄파업을 벌였다. 경찰은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손해에 대해 노동자들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11억6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지연이자까지 합하면 15억 원이 넘는 액수다. 광화문 광장에 놓인 자동차 모형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국가손배 현황’이 적혀 있다. |쌍용차지부 제공



경영진 사진에 신발 던졌다고 “모욕당했다”…진화하는 ‘손배 폭탄’

2000년대 초반 노조 탄압을 목적으로 본격 등장한 ‘손해배상 폭탄’은 규모 면에서나 질적으로나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민주노총 집계에 따르면 2002년 300억 원대 수준이던 손해배상청구 총액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듬해인 2014년 1,691억 원으로 정점을 찍었다. 지난해는 20개 사업장 기준 1,521억 원에 달하는 손배소가 걸렸다. 최근에는 생산 차질·시설물 훼손 같은 유형의 피해뿐만 아니라 모욕·명예훼손 같은 무형의 피해까지 주장하며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초박막 액정표시장치(TFT-LCD) 제조업체 하이디스가 대표적이다. 금속노조 하이디스지회는 대만 ‘이잉크’사의 기술유출과 정리해고에 항의하며 2015년 대만 원정투쟁을 벌였는데, 사측은 노조가 경영진 사진에 신발 던지기 퍼포먼스를 한 것이 ‘모욕’에 해당한다며 1억 원 배상을 청구했다. 지난 25일 수원지법은 노조가 사측에 250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구호와 피켓, 조합 소식지 문구에 대해 정신적 피해를 주장하거나, 하청노조가 노조 명칭에 원청 이름을 사용했다며 ‘이름값’을 청구하기까지 한다. 시민단체 ‘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손을 잡고(손잡고)’는 “‘걸면 걸린다’는 말이 적합할 정도로 손배 청구이유가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라며 “작은 문구 하나, 목소리조차 맘 놓고 낼 수 없는 한국 노동권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지난 17일 국회 정론관에서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의원, 정의당 이정미 의원, 민주노총 등이 노조법 개정안(노란봉투법) 입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정당한 쟁의행위 문턱 낮추자…손배 남발 막기 위한 ‘노란봉투법’

물론 쟁의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 권리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3조는 “사용자는 이 법에 의한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해서 손해를 입은 경우에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에게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계는 손배소 남발 실태의 책임이 ‘법에 의한 정당한 쟁의’의 문턱을 높게 설정한 사법부에 있다고 본다. 점거농성 같은 쟁의방식을 불법으로 보거나, 민영화 반대·공정방송 요구 같은 쟁의행위의 범위도 협소하게 받아들여져 불법으로 결론 나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정치권과 노동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 18일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손배소와 손배가압류 남발을 막기 위한 노조법 개정안(노란봉투법)을 발의했다. 2014년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47억 원 배상 판결이 내려지자 시민들이 십시일반 소액을 기부했던 ‘노란봉투 캠페인’에서 이름을 따 왔다.

개정안은 합법적 쟁의활동 범위 확대, 노동자 개인에게 손해배상청구 금지, 손해배상 액수 상한선 설정 등의 내용을 담았다. 19대 국회에서도 같은 법안이 발의됐으나 새누리당 반대로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한 채 폐기된 바 있다.

손잡고 등 시민단체들은 '노란봉투법'(노조법 개정안) 20대국회 입법청원서를 하고 있다. 윤지선 손잡고 활동가는 “손배청구로 전세보증금이 압류당하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까지 끊는 시급한 상황”이라며 “‘사람은 살려야 한다’는 절실한 문제의식이 노란봉투법에 반영돼 있다”고 말했다.

▲ 손잡고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노란봉투법’ 입법 청원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출처  ‘적폐 중 적폐’ 노동자 죽이는 손배가압류···2017년엔 사라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