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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삼성그룹 2인자들의 오욕의 역사와 비참한 최후

삼성그룹 2인자들의 오욕의 역사와 비참한 최후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 | 발행 : 2017-08-21 09:34:32 | 수정 : 2017-08-21 09:34:32


아무리 사정이 다급하다 해도 삼성과 이재용 부회장이 최근 앞세운 ‘이재용 바보론, 최지성 1인자론’은 한국 기업 역사에 희대의 코미디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얼마나 절박하면 이따위 헛소리를 재판정에서 늘어놓는지 애잔한 마음까지 들 정도다.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이 사실상 그룹의 1인자였고, 이재용은 얼굴마담일 뿐이었다는 ‘최지성 1인자론’은 사실 반론조차 필요 없는 헛소리다. 제왕적 지배구조 시스템을 유지하는 한국 재벌들에게 바지사장은 1인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삼성은 다른 그 어떤 그룹에 비해 2인자의 권력이 강했던 그룹이긴 하다. 하지만 그 삼성에서조차 2인자들의 최후는 늘 비참했다. 그리고 삼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의 정점에 올랐던 다른 2인자들에 비해 최지성은 매우 빈약한 권력을 누린 2인자였다. 그런 최지성이 난데없이 “내가 1인자다”라고 주장하다니, 웃기려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이런 농담은 이제 좀 접어뒀으면 한다.


막강했던 2인자 소병해, 이건희에 의해 축출 당하다

삼성그룹에서 2인자라고 불리는 자들은 주로 비서실장, 구조조정본부장, 전략기획실장, 미래전략실장 등의 호칭으로 불렸다. 이건희 회장이 회장에 오른 시점은 1987년인데 이때만 해도 삼성에는 구조본이니 미전실이니 하는 총괄 조직이 없었다. 당시에는 회장 비서실이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다.

삼성의 역사에서 비서실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처음 휘두른 이는 ‘이병철의 분신’이라 불렸던 소병해 전 비서실장이었다. 소병해는 삼성 역사에 기록된 여러 2인자 중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

우선 그는 정주영의 최측근이었던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과 함께 가장 한국 재벌 역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2인자 권력을 구축했다. 또 한 가지, 소병해는 이병철 시대에 막강한 권한을 자랑했지만, 이건희 시대에도 3년이나 비서실장 자리를 지켰다. 2대에 걸쳐 2인자 자리를 누린 몇 안 되는 인물이라는 이야기다.

1942년생인 소병해는 1967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공채 8기로 삼성에 입사했다. 그리고 1974년 서른둘의 젊은 나이에 회장 비서실에서 일을 시작했다. 일본말이어서 쓰기가 적절치는 않지만 업계에서 보통 이런 인물을 ‘가방모찌’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의 가방을 메고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일본말이다.

▲ 호암 100주년 기념 영상에 등장한 이병철(전 삼성그룹 회장, '돈병철'이라고도 불림) ⓒ민중의소리

그리고 이 가방모찌들은 오너의 온갖 사생활까지도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오너의 사생활을 아는 것은 곧 권력이다. 그래서 가방모찌 출신들은 오너로부터 오랜 사랑을 받는다. 비서실에 자리를 잡은 소병해는 1978년 38살의 젊은 나이에 이병철의 비서실장에 오른다. 38세에 그룹 2인자라니, 이병철이 소병해를 얼마나 아꼈는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당시 회장 비서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간단한 의전 조직이 아니었다. 이때 비서실에는 팀만 무려 15개가 존재했고, 직원 숫자도 250명이었다. 비서실이 그룹을 총괄하는 지금의 미래전략실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소병해는 이병철이 세상을 떠난 1987년에도 여전히 비서실장 자리를 지켰다. 그의 나이 마흔 다섯 때 일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삼성의 새 리더는 삼남 이건희로 결정됐다. 이건희는 소병해와 동갑이었다.

이건희가 소병해를 3년 동안 비서실장으로 남겨둔 이유는 두 사람 사이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소병해는 ‘포스트 이병철 시대’를 대비해 동갑내기 이건희를 여러 차례 견제했고, 이건희는 이를 매우 불편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소병해는 이병철 살아생전 자기 조직을 가동해 이건희의 뒤를 캐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새로운 총수가 등극했는데, 전시대의 2인자가 공존하는 현실. 삼성그룹에서 1인자와 2인자 사이에 가장 팽팽했던 긴장감이 감돌았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짐작이지만 이건희가 집권 즉시 소병해를 내치지 못했던 이유는, 소병해가 그룹의 약점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건희는 시간을 두고 소병해를 내칠 기회를 찾았다. 이건희는 3년 탈상을 할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면서 소병해의 약점을 조사했다. 1990년 이건희는 기습적으로 소병해를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전보시켰다. 외견상 승진이었지만, 사실상 소병해를 그룹 핵심에서 몰아낸 축출이었다.

전보 사실을 발표하기 직전 이건희의 지시를 받은 삼성 비서실 직원들은 일제히 소병해 집으로 몰려가 소병해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서류와 자료들을 모조리 압수했다. 소병해가 회사 기밀서류를 무기로 삼아 폭로에 나설 것을 대비한 이건희의 ‘꼼꼼한’ 조치였다. 12년 간 2인자의 자리를 지켰던 막강했던 소병해의 시대도 이렇게 허망하게 저물었다.


티스푼 사건의 주인공 이수빈

소병해 다음으로 2인자라 불릴만한 권한을 가졌던 사람은 이수빈 현 삼성생명 회장이다. 이수빈 회장은 지금 삼성그룹 내에서 이건희와 함께 회장 직함을 쓰는 단 두 사람 중 한 명이다. 이건희가 비자금 사건으로 현직에서 물러났을 때 그룹 회장의 역할을 대신한 경험도 있다.

이수빈은 소병해가 축출된 이후 1991년 이건희 시대 제 3대 비서실장 자리에 올랐다. 특이한 것은 그가 이건희의 고교(서울사대부고) 4년 선배였다는 점이다. 세간에서는 이런 인연으로 이수빈이 막강한 권한을 누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수빈 시대는 의외의 사건으로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1993년 벌어진 이른바 ‘티스푼 사건’이 그것이다.

3년 만에 소병해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 이건희는 1993년 야심차게 자신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했다. 삼성이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라고 부르는 이건희의 개혁 선언이 그것이었다.

이건희는 아버지와 자신의 차별점을 강조하기 위해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200여명의 삼성 고위임원을 호출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 유명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라는 말을 남겼다. 이건희가 강조한 대목은 “과거 양(量) 위주의 경영에서 탈피해서 질(質)을 중시하는 경영으로 탈바꿈하자”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평범한 경영혁신 선언 같지만, 사실 이는 “나는 아버지와 다른 새로운 군주다”를 선포하는 일종의 등극식이었다. 창업자 이병철의 카리스마가 수 십 년 동안 지배했던 삼성에서, 아들은 집권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가 중시한 양 위주의 경영을 버리고, 내 시대에는 질 위주로 기업을 바꾸겠다”고 외쳤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이수빈 비서실장이 눈치 없이 회장의 선언에 토를 달았다. “경영에서 질도 중요하지만 양적 성장도 어느 정도 이뤄져야 합니다”고 발언한 것이다. 물론 회의에서 이 정도 반론도 제기하지 못하면 그건 회의도 아니다. 문제는 한국 재벌들이 이런 건강한 충언을 기분 좋게 들을 정도로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 자리가 마침 이건희가 야심차게 준비한 ‘아버지와의 차별성을 강조한 등극식’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분노한 이건희는 앞에 놓여있던 티스푼을 강속구로 집어던졌다. 당시 회의 녹음 파일이 존재했는데, 나중에 그 파일을 들은 사람들은 티스푼이 부딪치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이건희 회장이 찻잔을 내던진 줄 알았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2인자 따위가 자기의 야심찬 선언에 토를 다는 모습이 이건희의 격노를 불러온 것이다.

결국 이수빈은 얼마 안 있어 실각했다. 다만 이건희의 고교 선배였던 덕인지 이수빈은 오랫동안 삼성생명에서 전문경영인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수빈은 실질적 경영에서 손을 뗀지 오래지만 지금도 여전히 삼성생명 회장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재무통 이학수의 시대, 화무십일홍을 입증하다

이수빈의 공백을 메운 새로운 실세는 삼성그룹 역사상 소병해와 자웅을 겨룰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이학수 전 구조조정본부장이었다. 이학수는 이수빈 퇴임 이후 현명관 비서실장 등의 중간다리를 거쳐 1996년 비서실장 자리에 오른다.

소병해의 별명이 ‘이병철의 분신’이었다면 이학수의 별명은 ‘이건희의 오른팔’이었다. 삼성에서만 37년을 재직했고 1996년부터 2010년까지 장장 14년 동안 비서실장, 구조조정본부장, 전략기획실장 등을 거친 인물이다.

이학수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지만, 그가 그렇게 오래 삼성에서 2인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재무 전문가라는 사실이었다. 이학수의 비중이 그룹에서 갑자기 커진 때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였다. 이전까지 비서실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던 무소불위의 조직이 구조조정본부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도 1998년 4월의 일이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상당한 강도로 재벌개혁을 추진했다. 이건희는 아마 이때 깨달았을 것이다. 과거에는 주먹구구로 회계장부를 조작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앞으로 그런 방식으로 회삿돈을 떼먹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외국 자본이 대거 유입되면서 삼성에게는 과거처럼 주먹구구식 탈세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편법을 동원할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이학수는 이런 면에서 완벽한 스펙을 갖고 있었다. 그는 원래부터 제일모직 관리과 출신이었고 회장 비서실에서도 줄곧 재무담당 임원으로 일했다. 회사에서 빠져나가는 검은 돈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도 이학수였다.

이학수가 2인자로 등극한 이후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이 이재용에 대한 다양한 편법, 불법 증여 작업이었다. 1996년 이재용에게 처음 60억 원이 증여됐고, 이재용은 이학수의 전문적 ‘탈세 지식’에 도움을 받아 60억 원을 8조 원으로 불려 나갔다.

우리가 삼성 X파일 사건을 기억할 때 중앙일보 전 회장 홍석현의 이름만 떠 올릴 때가 적지 않다. 이회창 캠프로 돈을 전달하고, 검사들에게 떡값을 준 인물이 바로 홍석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기부의 도청파일을 잘 들어보면 홍석현이 삼성의 검은 돈에 대해 상의를 하는 상대 인물이 등장한다. 그가 바로 이학수다. 이학수는 이건희가 처남만큼 믿고 검은 돈 배달을 맡길 정도로 삼성의 검은 돈에 깊숙이 개입했다.

▲ 불법정치자금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사장과 이학수 삼성그룹 비서실장 ⓒmbc 화면캡쳐

일각에서는 이학수가 14년 동안 그룹의 2인자로 자리매김한 이유를 여기서 찾기도 한다. 소병해가 이병철의 사생활을 낱낱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면, 이학수는 이건희의 검은 돈 문제에 대해 샅샅이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이학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삼성전자 고문으로 물러났는데, 그의 파워는 여전히 강했다. 문제는 이학수 역시 소병해와 마찬가지로 2인자 주제에(!) 자기의 세력을 구축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건희가 공식적으로 물러나고, 이재용의 시대가 서서히 열릴 무렵 이학수는 자기 측근을 사장단에 대거 등용하며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이건희가 2선으로 물러났을 때 이학수의 세 불리기는 도드라졌다. ‘이학수 사단’이 구축됐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이건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2011년 이학수를 내동댕이쳤다. 이학수만 내친 게 아니라 이른바 이학수 사단도 피의 숙청을 당했다.

사장단 6, 7명이 해임됐고 그들과 가까웠던 임원들도 줄줄이 목이 달아났다. 보통 삼성 고위임원들은 퇴직 이후 2~3년 동안 급여와 사무실, 차량을 제공받는 이른바 ‘전관예우’가 있었는데, 이학수 사단은 이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 숙청이 너무 광범위하고 신속해서 삼성에서는 이 사건을 ‘신묘사화(2011년은 신묘년)’라고 부른다. 이학수의 시대는 이렇게 이건희의 결심 한 번으로 처참하게 저물었다.


1인자는커녕 2인자로도 많이 부족한 최지성

삼성 역사에 강력한 이름을 남긴 이들 세 명 2인자들에게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총수와 남다른 사적(私的)인 인연이 있다는 점이다. 일명 ‘가방모찌’였던 소병해는 이병철의 사생활을 잘 알고 있었다. 재무 전문가 이학수는 이건희와 이재용의 검은 돈 내역을 속속들이 알았다. 티스푼 사건으로 물러났지만 이수빈은 최소한 이건희의 고등학교 선배였다.

게다가 소병해, 이학수는 자기만의 조직도 거느렸다. 이런 막강한 2인자들도 결국 총수의 결심에 삽시간에 축출 당한다. 그런데 최지성은 도대체 무엇을 갖고 있는가? 최지성은 비서실 출신도 아니고, 재무통도 아니다. 그는 삼성전자에서 영업으로 잔뼈가 굵은 영업통이다. 총수 가문과 가까이 있을 기회조차 없었다.

2012년 최지성이 미래전략실장으로 선임됐을 때 업계에서는 “무난한 사람을 뽑았다”는 평가가 주류였다. 여기서 ‘무난’하다는 것은 이건희에서 이재용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시기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 사람을 이건희가 2인자로 세웠다는 이야기다. 권력 이양기에 2인자가 소병해나 이학수처럼 막강한 것을 이건희가 피하고자 했다는 뜻이다.

그런 최지성이 이재용 살리겠다고 “이재용은 얼굴마담이고 사실 내가 삼성의 1인자요” 하고 나섰다. 이게 얼마나 웃긴 일인가? 소병해나 이학수가 저런 말을 했으면 그나마 덜 웃겼을 텐데, 역대 2인자 중에서도 별 볼일 없는 축으로 평가받던 최지성이 1인자를 자처하다니!

25일 이재용의 선고공판이 열린다. 이 재판에서 삼성이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대국민 사기극, 즉 “죄는 1인자 최지성에게 묻고 얼굴마담 이재용은 풀어 달라”는 전략이 먹히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한국사회가 그 정도 상식은 갖고 있어야 한다.

특검의 논고문을 한 번 더 인용한다. 부디 이번만큼은 재판부가 한국 사회에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시라!


출처  삼성그룹 2인자들의 오욕의 역사와 비참한 최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