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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근로자’ vs ‘노동자’, 조선·중앙이 발끈하는 이유

‘근로자’ vs ‘노동자’, 조선·중앙이 발끈하는 이유
[민중의소리] 김영욱(30일에 끝내는 자본론특강 저자, 전 진보정치연구소 부소장) | 발행 : 2017-08-27 14:11:05 | 수정 : 2017-08-27 14:11:05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소속 박광온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노동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마땅한데도, 굳이 ‘근로’로 표현하고 있는 근로기준법 등 12개 법안 개정안을 발의한다”고 20일 밝혔다. 박 의원이 개정안을 발의하는 법안은 근로기준법과 근로복지기본법, 건설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 기간제 및 단기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등 12개다.

많이 늦은 일이지만 환영할 일이다. 나는 특히 사회적 개념에 가치중립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개념에는 당파성(黨派性)이 있고 어떤 집단이나 개인의 가치관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특히 자본가가 주류인 사회에서의 개념과 그들이 만들어 내는 프레임이 주류를 형성하고 자본가계급의 입장을 대변하게 된다.

경제개념은 아니지만 최근 ‘건국절’을 둘러싼 논란도 그러한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서로 다른 건국절을 주장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하나? 지금 감옥에 수감 중인 박근혜는 지난해 8.15 경축사에서 “오늘이 건국 67주년을 맞이하는 해”라고 했고 현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경축사에서 “2019년이면 건국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발언했다. 헌법에 명시된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법통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48년 이승만 단독 정부수립을 건국일로 볼 것인가의 문제다. 깊이 들어가 보면 건국절을 둘러싼 각각의 주장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각 당파 또는 세력의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


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발끈할까

그런데 근로를 노동을 바꾸는 법안 발의에 21일 중앙일보와 조선일보가 동시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중앙일보는 ‘팩트체크’라는 항목으로 박광온 의원의 발의 내용 중 ‘근로’의 기원이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잘못이라며 조선왕조실록을 들고나와 세종이나 성종시기에 ‘노동’보다 ‘근로’라는 단어를 더 많이 썼다며“조선왕조실록에는 ‘근로’라는 단어가 198회 등장한다”며 친절하게 그 수치까지 밝혀주는 수고까지 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노동'이냐 '근로'냐가 아니라 일과 일자리를 어떻게 지키고 늘리느냐는 것이다.”, “지금 문제의 핵심은 시대에 뒤처진 노동시장과 노사 관계를 어떻게 개혁해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를 다시 성장시킬 것이냐는 과제다.”라며 자못 애국지사적 논조로 나라 걱정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정작 근로를 노동으로 바꾸는 것이 왜 잘못인가 하는 핵심적인 이유에서는 비껴가고 있다.

조선일보는 전형적인 프레임전환으로 개칭(改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면해서 노동시장과 일자리가 더 중요하다는 식이고, 중앙일보의 팩트체크는 근로정신대 전에 조선시대에 쓰였다는 식으로 반일감정에 편승해 법안을 제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전형적인 물타기다. 조선일보나 중앙일보도 자신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노동’이란 개칭 작업이 맘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노동’이란 개념이 왜 잘못되었는지 제기해야 옳다. 변죽을 울리거나 프레임전환식으로 하는 것은 비겁한 펜일 따름이다.

▲ 12일자 조선일보 사설 ⓒ인터넷 캡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동안 ‘근로’, ‘근로자’라는 개념은 ‘노동’을 대신하여 노동자에게 복종적인 노동을 강요했으며 본질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모순이나 대립적인 양상을 누그러뜨리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우선 국어사전을 살펴보자.

근로자 (勤勞者)
근로에 의한 소득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

노동자 (勞動者)
1.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 법 형식상으로는 자본가와 대등한 입장에서 노동 계약을 맺으며, 경제적으로는 생산 수단을 일절 가지는 일 없이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삼는다.
2 육체노동을 하여 그 임금으로 살아가는 사람.


노동이 아닌, 노동력

사전적 의미로 노동자는 노동력이란 상품을 자본에 판매해 임금을 받아 생계수단으로 삼는 사람을 말한다. 반면 근로자는 계약관계와 무관하게 노동을 통해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다. 직업상 자영업자 계층은 근로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영업자를 노동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노동자 개념의 성립요건인 노동력의 교환과 계약이 없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짚어야 할 점은 우리가 노동자가 노동을 계약하는 게 아니라 노동력을 계약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노동은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이다. 그 때문에 노동을 판매한다는 것은 자신의 몸 전체(인격을 포함한)를 판매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를 마치 종이나 노예처럼 인신적으로 소유한다는 착각을 유발하게 된다는 점이다.

최근 종근당 회장의 운전사에 대한 인격적 모독 등 사장과 임원들의 각종 갑질은 이러한 ‘노동을 소유’한다는 잘못된 인식과 관습에서 출발한 것이다. 나 또는 20대 시절 중소기업을 다닐 때, 휴무인 일요일에 사장 집의 이삿짐을 거드는 일을 했다. 사원은 가족이라는 말도 있지만, 당시 서울대 공대를 나왔던 사장조차도 노동자를 ‘가족 같은 근로 직원’으로 본 것이지 계약당사자로서 노동자로 보지 않았다. 당연히 일요일의 가족 같은 이삿짐 노동은 당연히 무급이었다.

노동자는 ‘노동력’, 자신의 기술과 능력을 포함한 노동시간을 판매하여 계약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시간급을 기본으로 계약을 맺게 된다는 점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즉 소정 시간에 지출되는 ‘노동력’을 임금으로 교환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최근 문제 되는 ‘카톡 야근’ 근절은 아주 정당한 요구다.

통상 노동력의 한 시간 교환가치를 임금액수로 표현하고 사회적으로 임금의 최소 기준치를 정하는 것이 최저임금이다. 최저임금제도는 자본가의 일방적 저임금 정책을 막고 노동자가 이 사회에 생존하기 위한 노동력의 교환가치인 임금을 최소한도로 제도화한 것이다. ‘근면·성실하게 일한다’는 근로라는 개념으로는 교환가치를 기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로’라는 개념은 통상적 의미에서 어떠한 ‘열심히 일한다’는 것인데 이는 노동력과 임금의 교환을 뛰어넘은 일반 개념에 불과하다.

노동조합을 왜 근로조합이라고 하지 않고 노동조합이라고 하는가? 바로 임금노동자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대학교수나 강사는 노동자인가 근로자인가? 노동자다. 자신의 전문적인 분야에 대한 지식을 가르칠 것을 학교 측과 계약을 통해 임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고임금이냐 저임금이냐는 그다음 문제다. 사회과학적인 개념은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사람들은 다 노동자다.

▲ 민주노총 최종진 위원장 직무대행이 24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에서 열린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 면담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양지웅 기자

조선일보가 사설에서 지적한 ‘노동시장의 후진성’이나 ‘노사관계의 개혁’의 핵심은 자본가의 노동조합 인식을 개선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유성기업처럼 노조파괴를 일삼거나, 삼성 재벌처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동조합은 안 된다’ 식의 전 근대적인 노동조합 관념을 바꾸지 않고서는 올바른 노사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

한쪽으로만 노동자의 희생만 강요해서는 자본가 자신도 존재할 수 없다. 한국의 노동 현실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전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노동인구의 절반이 넘어서는 비정규직, 매일 300명이 과로사로 목숨을 잃고 매해 2,400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이게 나라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백번 양보해 노동에 대한 존중은 그렇다 치더라도, 노동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데로부터 노동자에 대한 시각이 재정립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근로라는 개념을 노동으로 바꾸는 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노동자의 기본권을 확립하고 다져나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출처  [김영욱의 노동경제] ‘근로자’ vs ‘노동자’, 조선·중앙이 발끈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