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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몰락 10년사] 국정원과 PD수첩

[MBC 몰락 10년사] 국정원과 PD수첩
[경향신문] 김재영 MBC PD | 입력 : 2017.10.07 16:02:01


▲ 9월 26일 최승호 전 MBC PD가 ‘방송사 블랙리스트’ 관련 피해자 조사를 받기위해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으로 들어서고 있다. 최 PD는 기자들에게 “이명박 정부 당시 국정원은 MB의 개인 정보기관”이라며 비판했다. / 이준헌 기자

·MB 정부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 관용이 없었고, 국정운영은 법치를 가장한 독재에 가까웠기 때문에 <PD수첩>이 다루어야 할 내용들은 차고 넘쳤다.

21세기 문명국가에서 공영방송의 한 시사프로그램이 국가정보기관으로부터 이토록 처참하게 장악당한 적이 있을까?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언론장악 문건에 대한 조사를 위해 검찰에 출석한 전직 <PD수첩> PD들은 비통한 마음이었다. 문건에 따르면 김재철·안광한 전 MBC 사장들과 측근들은 국정원의 ‘끄나풀’에 불과했다. 왜 MB 정부의 국정원은 이토록 집요하게 <PD수첩>을 장악하려 했을까?

이명박 정부는 2008년 출범하자마자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따른 거대한 촛불시위로 위기를 맞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30개월령 이상의 거의 모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라는 희대의 실책에는 눈을 감고, 위기를 오로지 <PD수첩>으로 돌렸다. 몇몇 기술적인 실수를 빌미로 프로그램을 공격했고, <PD수첩>을 압수수색하기 위해 검사와 수사관을 MBC로 보냈다. PD들을 체포하고, ‘공무원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기소를 했다. 다시는 권력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말라는 위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PD수첩>은 이후에도 굴하지 않았다. MB 정부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 관용이 없었고, 국정운영은 법치를 가장한 독재에 가까웠기 때문에 <PD수첩>이 다루어야 할 내용들은 차고 넘쳤다.


권력에 굴하지 않은 <PD수첩>

<PD수첩>은 이명박 정부의 불법적인 공권력 사용에 반기를 들었다. 2009년 1월 용산참사가 터졌는데, <PD수첩>은 경찰이 용역깡패들을 작전에 투입했다는 사실을 ‘용역깡패들이 물대포를 쏘는’ 장면을 포착해 증명해냈다. 공권력이 일부 건설자본에 포섭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고, 시민 안전을 위해 할 수 없이 무력진압을 했다는 논리는 설득력을 잃었다. 6월에는 노무현 대통령 서거국면에서 공권력이 광장을 경찰버스로 막고, 집회를 하는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는 폭력을 고발했다. 경찰은 심지어 일본인 관광객을 시위하는 사람으로 오인하고 때리고 체포할 정도로 포악했다.

<PD수첩>은 4대강 사업을 집중적으로 해부했다. 2009년 11월 엄기영 사장은 ‘특별생방송 이명박과 국민의 대화’를 위해 진행자로 예정되었던 손석희를 내쫓는 ‘성의’를 보였다. 이 자리에서 이명박은 ‘4대강 수질을 지키는 로봇물고기’를 소개했다. 이 생방송이 끝나고 며칠 후 <PD수첩>은 보란 듯이 4대강 사업의 실체를 알리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MB의 말은 거의 다 거짓말이었다. 정권 입장에서 엄기영 사장은 <PD수첩>을 정권의 입맛대로 ‘컨트롤’할 인물이 아니었다.

‘MBC 정상화’라는 타이틀을 가진 국정원 문건은 2010년 3월 2일 작성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날은 김재철 사장의 취임일이었다. <PD수첩> 제작진이 검찰에서 확인한 문건에는 <PD수첩>에 존재하는 좌파 PD와 작가 등을 내보내고 <PD수첩>을 고립시킬 수 있는 방안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김재철 사장은 실질적으로 국정원의 행동대장이었다.


PD수첩 정리작전

김재철 사장은 부임하자마자 국정원 문건대로 먼저 ‘광우병 사태’ 이후 <PD수첩>을 이끌던 김환균 CP를 정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MBC 시사교양국의 영혼은 살아있었다. 바뀐 국장과 후임 CP는 김재철의 ‘하수인’이 아니었고, ‘권력에 대한 감시’라는 명분과 PD들의 의지가 있으면 아이템에 성역은 없었고, 사장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2010년 5월에는 ‘검사와 스폰서’편을 통해 부패를 막아야 할 검찰이 도리어 부패의 본산임을 밝혀냈다. 6월에는 이명박 정부의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을 폭로했다. 8월에는 4대강 사업의 정당성을 뒤흔들 ‘4대강 수심 6미터의 비밀’ 방영을 앞두고 일촉즉발의 위기상황까지 갔다. 국토부는 법원에 ‘방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내면서 결사적으로 막으려 했지만 이유가 없다며 기각을 당해 방송을 막을 수 없었다. 김재철 사장은 존재를 과시해야 했다. 단체협약을 어기면서 MBC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사장 시사’를 내걸고 방영을 금지시켜 큰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김재철 사장은 더 물러설 수 없었고, 이제 직접 칼을 휘둘러야 했다. 2011년 3월부터 <PD수첩>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국정원 문건에는 <PD수첩>을 ‘보도본부’로 이양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김재철 사장은 더욱 세련된 묘안을 만들었다. 편성과 제작의 분리라는 원칙을 어겨가며 편성부문에 시사교양국을 얹어 편성제작본부라는 이상한 조직을 만들었고, 여기 수장으로 백종문 본부장을 임명했다. 직접 <PD수첩>을 담당하는 시사교양국장에는 윤길용을 임명했다. <PD수첩>에서 잔뼈가 굵었던 그들은 국정원 문건대로 <PD수첩>을 초토화시켰다.

먼저 최승호 PD를 비롯해 6명의 PD를 강제로 전출 보냈다. 이어 ‘개성공단 폐쇄 1년’을 다루려는 이우환 PD를 용인 드라미아로, 시사교양국 총회에서 사회를 보던 한학수 PD를 경인지사로 강제 전출 보냈다. 남아있던 시사교양국 PD들은 매일 아침 국장 앞에서, 저녁에는 로비에서 피케팅을 했다. <PD수첩> 젊은 PD들은 오전에는 피케팅을 하고, 오후에는 피케팅 당사자인 국장에게 아이템을 내고 까이는 아이러니한 시간을 보냈다. ‘MB 무릎기도 사건’, ‘내곡동 사저 논란’ 등 MB 정부가 불편해 할 아이템들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이명박이 임명한 ‘한상대 검찰총장 검증 논란’ 아이템의 경우, 담당 PD가 아이템 컨펌 여부를 알기도 전에 서초동 검찰청에서 이미 그 아이템이 ‘킬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황당하게도 담당 PD에게 소문이 들려왔다. 거짓말처럼 다음날 부장은 아이템을 불허했다. MB가 직접 독려한 ‘제주도 7대 자연경관 선정 논란’은 부장이 담당 PD의 기획서를 찢는 기행을 보여주었는데, 이후 제주도 7대 자연경관 선정이 사기극에 가깝다는 게 밝혀졌다. PD들은 끊임없이 싸웠지만, 국정원 문건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170일 파업이 끝나자 신념을 지키려 싸웠던 <PD수첩> PD들은 브런치 교육을 받는다는 신천교육대를 거쳐 비제작부서로 뿔뿔이 흩어졌다. <PD수첩> 작가 6명 해고가 잔혹극의 대미였다.

그렇게 2년여에 걸친 국정원·MBC 커넥션과 PD들의 싸움은 완벽하게 국정원·MBC 커넥션의 승리로 끝이 났다. 김재철·안광한·김장겸 밑에서 <PD수첩>을 망가뜨린 당사자들은 영전을 거듭했다. 백종문·윤길용·김철진·김현종 등은 모두 본사 임원과 지역사 사장을 수년씩 했고, 몇몇은 거기에 더해 좋지 않은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중 몇몇은 과거 ‘시대의 정직한 목격자, <PD수첩>’을 제작했던 PD들이었다. 백종문 현 부사장은 2003년 모교에서의 강연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PD수첩>에서 맞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랬던 이들이 왜 ‘국정원의 끄나풀’로 자신의 인생 행로를 끝장내는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아무런 단죄도 없이 시간이 흘러갈 것이라 믿었을까. 이런 질문들 옆에 그들과 비슷한 연배의 많은 선배들이 20년 터울의 후배들과 파업을 하며 언론자유를 외치는 모습이 보인다. 역사는 어떤 삶을 더 존중하고 기억할 것인가? 이제 촛불시민의 힘에 의해 탄생한 정부가 답할 차례다.


출처  [MBC 몰락 10년사⑬]국정원과 PD수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