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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휴일에 연차 소진’ 합의한 ‘유령 노동자 대표’, 누가 뽑았나?

‘공휴일에 연차 소진’ 합의한 ‘유령 노동자 대표’, 누가 뽑았나?
노조 조직률 10%…대부분 사업장 선출 기준 없어
‘어용·유령 노동자 대표’가 임금과 노동시간 등 합의
“노동자 대표 대표성 확보할 법적 규정 필요”

[한겨레] 오연서 기자 | 등록 : 2019-03-05 16:00 | 수정 : 2019-03-05 17:19


▲ 5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경사노위 앞에서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 주최로 ‘경사노위 해체하라!’ 기자회견이 열렸다.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 제공.


#1.

자동차 정비회사에서 일하는 정비사 ㄱ 씨는 지난해 12월 연차 휴가를 내려다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16일 남은 거로 알고 있던 연차가 이미 다 소진됐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회사는 ㄱ 씨가 이미 올해 연차를 다 썼다며 연차를 쓰면 하루 치 일당이 깎인다고 통보했다. ㄱ 씨가 따지자, 회사는 그동안 국경일을 포함한 ‘빨간 날’에 쉰 것이 연차를 사용한 것으로 인정됐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대표가 공휴일 연차 대체에 합의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취업규칙에도, 근로계약서에도 국경일을 연차로 대체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ㄱ 씨는 회사에 노동자 대표와 연차 대체를 합의한 서면 합의서를 보여 달라고 했지만 보여주지 않았고, 노동자 대표가 누구인지 물어도 알려주지 않았다. ㄱ 씨는 그동안 “명절 같은 국가 공휴일에는 자동차 검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회사도 문을 닫아 당연히 ‘빨간 날’은 다 쉬었다”며 “이를 연차를 사용한 것으로 한다고 합의한 노동자 대표가 누구인지, 언제 합의한 건지 그 과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2.

육아휴직을 끝내고 회사로 복직한 ㄴ 씨는 복직하자마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영업부장이 ㄴ 씨에게 “회사가 어려워 희망퇴직자 신청을 받고 있으니 면담을 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영업부장인 줄로만 알았던 그가 알고 보니 회사가 지명한 노동자 대표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노동자 대표는 “맞벌이냐”, “피부양자가 몇 명이냐”고 ㄴ 씨의 신상에 관해 물었다. ㄴ 씨가 노동자 대표에게 “회사가 얼마나 힘든지 재무제표나 순이익을 보여 달라”, “회사가 정상화되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했느냐”고 물어봤으나 노동자 대표는 답변을 거부했다. ㄴ 씨는 결국 경영상 해고자 우선순위로 꼽혀 희망퇴직을 했다. ㄴ 씨는 “영업부장은 노동자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직원들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회사와 해고자 우선순위를 정하고, 희망퇴직자 신청을 받겠다고 메일을 보냈다. 노동자 대표가 회사를 대변하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노동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5일 공개한 ‘어용·유령 노동자 대표 제보 사례’ 가운데 일부다. 직장갑질119에 제보한 이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노동자 대표와 합의했다는 이유만으로 회사가 노동 시간과 임금, 휴가와 퇴직급여 등을 마음대로 정해 피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어용 노동자 대표’, ‘유령 노동자 대표’로 인한 피해 사례들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노동자 대표와 반드시 서면으로 합의해야 하는 7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7개 사항은 △탄력적 근로시간제 △선택적 근로시간제 △연장근로 제한의 예외 △보상휴가제 △근로시간 계산의 특례 △근로시간 및 휴게시간의 특례 △연차유급휴가 대체 등이다.

회사가 경영상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할 때나 임산부와 연소자에게 야간 휴일근로를 시키기 위해 장관의 인가를 받기 전에는 회사가 노동자 대표와 협의해야 한다. 회사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과 가산임금, 휴게시간, 연차유급휴가 원칙의 예외를 적용할 때 노동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엄격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문제는 이처럼 임금과 근로시간 등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직결된 내용을 회사와 합의하는 노동자 대표가 누구인지 모르는 노동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과반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 ‘노동자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가 노동자 대표가 된다고만 규정할 뿐 구체적인 선출 방식과 자격, 임기 등을 정하고 있지 않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서도 마찬가지다.

국내 노조 조직률이 10%에 불과한 현실에서, 노조가 없는 90% 사업장에선 회사가 임의로 노동자 대표를 선정해도 사실상 막을 방법이 없다. 노동자 대표가 사실상 회사가 선정한 ‘어용’이라거나 노동자들도 잘 모르는 ‘유령’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탄력근로제 합의안’에도 등장하는 노동자대표

이런 문제 때문에 앞서 지난달 19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발표한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 확대 합의문’에 적힌 노동자 대표의 역할이 쟁점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로 줄어들 수 있는 노동자의 임금을 보전하기 위한 방안이 노동자 대표와 회사의 합의로 무력화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합의문을 보면, 3개월을 초과하는 탄력근로제를 도입할 때 노동자 대표와 회사가 서면 합의를 하면 △근로일 간 11시간 연속 휴식시간을 보장하지 않아도 되고 △임금보전 방안을 노동부 장관에게 신고하지 않아도 된다. 양쪽이 협의만 하면 △사용자가 주 단위 노동시간을 정하고 시행 2주 전에 하루 노동시간을 사전 통보하지 않아도 된다. 회사가 ‘어용 노동자 대표’, ‘유령 노동자 대표’를 앞세워 회사 입맛에 맞게 노동시간을 늘려 노동자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노동계는 반발하고 나섰다. 5일 오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노동위원회, 법률원(민주노총·금속 노조·공공운수노조·서비스연맹) 등 노동법률단체는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회사와 노동자 대표와의 서면 합의로 임금보전 방안을 마련하면 신고 의무조차 면제되는데, 합의 방식, 임금보전 기준이 없다. 한 마디로 있으나 마나 한 규정”이라며 “노동자 대표 선출 및 합의 방식에 대해서도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비정규직 이제 그만 1100만 공동투쟁’도 이날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경사노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1시간 휴게시간도, 임금보전 방안도, 2주 전 노동시간 통보도 ‘노동자 대표와의 서면 합의’로 무력화할 수 있도록 했다”며 “노조가 없는 사업장에서 ‘노동자 대표와의 서면 합의'는 ‘사용자 맘대로’의 다른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자 대표 대표성 강화해야

전문가들은 노동자 대표의 대표성을 강화하고, 노동자 대표와 회사 간 서면 합의에 노동자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한 법적 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직장갑질119 최혜인 노무사는 “노동자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는 공정성과 민주성이 대표성 취득 과정에 담보돼야 한다”고 밝혔다.

노동자 대표와 회사의 합의 내용에 대해서도 “노동자 대표 서면 합의와 취업규칙, 단체협약이 충돌할 경우 무엇이 우선하는지 불명확하고 유효기간이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아, 한번 서면 합의를 하면 수년간 해당 합의의 효력이 유지된다”며 “서면 합의의 성격과 효력, 유효기간을 별도로 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출처  ‘공휴일에 연차 소진’ 합의한 ‘유령 근로자 대표’, 누가 뽑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