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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때로는 미친놈 하나가 휘저어야 변화가 생긴다”

“때로는 미친놈 하나가 휘저어야 변화가 생긴다”
‘조양호 퇴진’ 선봉장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장 이상훈 변호사
[민중의소리] 조한무 기자 | 발행 : 2019-06-16 15:36:42 | 수정 : 2019-06-17 03:01:54


석 달 전, 대기업 총수가 주주총회 표결을 통해 이사회에서 쫓겨나는 희대의 사건이 터졌다. 고 조양호대한항공 회장 얘기다. 자본시장 구조 내에서 주주의 손으로 총수 방만경영을 견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고 조 회장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지금, 또다시 ‘달라질 건 없다’는 무력감과 냉소의 기운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노인 폭행’으로 공분을 산 조원태 씨가 그룹 지주사 한진칼 회장 자리를 꿰찼고, ‘물컵 갑질’ 조현민 씨가 같은 회사 전무로 경영에 복귀했다. ‘땅콩 회항’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명품 밀수’ 1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으면서 경영 복귀설이 솔솔 나돌기 시작했다.

맨 처음 ‘조양호 퇴진’ 깃발을 꽂고 선봉에 나섰던 이상훈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장(변호사)은 시민단체나 개인의 단발적인 운동으로는 재벌총수를 제대로 견제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시민단체 활동은 영속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다른 주체를 중심으로 한 상시적인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자본시장에서 재벌을 견제·감시할 양대 축으로 노동조합과 투자자를 꼽았다.

▲ 이상훈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장(변호사)가 지난 5일 오후 서울 공덕 서울복지재단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철수 기자


참여연대·경제개혁연대·민변 ‘삼각대’ 누비는 올어라운드 플레이어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와 동 대학원 법학과(상법 전공)를 나와 1995년 제37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상훈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1년 차이던 1996년 참여연대에서 처음으로 시민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녹색당 공동위원장 하승수 변호사 손에 이끌려 참여연대에 들어갔다고 회상했다.

“연수원 동기이자 학교 선배인 하승수 변호사가 좋은 단체가 있다며 끌고 갔다. 김기식 전 금감원장, 박원석 전 정의당 의원께 인사드리고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특별한 문제의식은 없었다. 하 변호사 레이더망에 걸려서 끌려갔다.”

‘특별한 문제의식은 없었다’는 말과 대조적으로 이 변호사 활동은 왕성했다. 1994년 9월 설립된 참여연대가 초창기 기반을 닦던 시기 그는 일을 가리지 않았다. 단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에도 주로 경제팀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다양한 분야에 개입했다.

“간사님들과 편하게 지냈다. 시키는 일을 다 했다. 정보공개 등 실무적인 업무를 했고 분야도 시민노동, 공익법 등 필요하다고 하면 두루두루 결합했다. 일을 거부하는 성격이 아니다.”

이 변호사는 전공을 살려 시민경제위원회에서 김균 고려대 교수, 고 김기원 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장하성 주중 한국대사, 김상조 공정위 위원장 등과 활동하게 된다. 그 사이 초기에는 정책적인 측면에서 제도와 법규를 위주로 검토하던 위원회가 주주권 활동으로 중심을 옮기는 변화도 있었다.

“1997년 참여연대에 들어온 장하성 교수님과 변호사들이 회의를 하다가 대표소송 얘기가 나왔다. 그때 교수님이 ‘이런 게 있네, 우리는 왜 안하지’라며 관심을 가졌다. 자연스레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 운동으로 주주권 활동이 맞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실제 행동으로 옮겨졌다.”

참여연대가 가장 먼저 나선 사건은 제일은행 경영진에 부실화 책임을 묻는 대표소송이었다. 참여연대는 소액주주 52명을 원고로 제일은행 전직 행장 및 이사에게 400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주주대표소송에서 1998년 1심 재판부로부터 원고 측 승소 판결을 받았다. 이듬해 제일은행 소액주주 지분 전량이 감자돼 기존 원고의 자격이 상실되자 제일은행이 원고로 대신 참가했다. 제일은행은 손해배상청구 금액을 10억원으로 낮췄고, 대법원에서 최종 원고 측 승소가 확정됐다. 소액주주 지분 감자로 어수선하게 마무리됐지만, 불법행위로 인한 회사 손실에 대해 경영자가 개인재산으로 배상토록 한 획기적인 판결로 기록됐다.

이후 참여연대는 삼성 이건희 회장(뇌물제공 및 계열사 부실지원), 현대차 정몽구 회장(계열사 부실지원) 등 재벌총수를 상대로 대표소송을 제기했다. 주총에 참여해 토론하고 주주권을 행사하는 등 활동도 전개했다.

이 변호사는 2006년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가 경제개혁연대로 분화된 이후에도 두 단체를 오가며 활동을 이어간다. 참여연대와 경제개혁연대는 주주권 활동에 있어 국외주주와의 결합에 대한 약간의 생각 차가 있었다. 국외 주주와의 결합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연대에 남았고, 적극적인 결합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경제개혁연대로 넘어갔다. 장하성 교수는 대표적인 경제개혁연대 인사인데, 자신의 이름은 딴 ‘장하성 펀드’를 조성할 때 외국 자본과 결합하기도 했다.

“국외 주주와 어디까지 결합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참여연대가 주주권 활동에 나섰을 때 굉장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외국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뭔가 사건이 있으면 국내외 주주로부터 결합 제안이 왔고 참여연대는 선별을 해야 했다. 국내 주주는 주로 개미(개인투자자)들이어서 순수성이 의심됐다. 단기 수익만 낸 뒤 치고 빠질 우려가 있었다. 반면 국외 주주는 주로 기관이었는데, 참여연대라는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단체가 외국 자본과 결합해 국내 기업을 공격한다는 데 대한 부담이 있었다. 국내 주주는 잘못하다가 주가조작에 얽힐 수 있고, 국외 주주 경우 매국노라는 프레임에 빠질 수 있었다.”

이 변호사 개인적인 입장은 경제개혁연대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나 참여연대 쪽에 남은 인사가 상대적으로 너무 적어 양쪽에서 두루두루 활동하게 된다.

이 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서도 족적을 남겼다. 그는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당시 야간집회 금지 조항의 위헌 결정 사건을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으로 꼽았다. 당시에는 야간 집회에 참석하기만 해도 불법으로 처벌을 받아야 했다. 민변은 변호인단을 꾸려 야간집시법 위헌 소송에 나섰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를 떠올리면 10년 전 민변의 노력은 한국 역사의 변곡점에 있어 법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일조한 셈이다.

“시민들의 가장 평화로운 의시표현 수단인 촛불집회를 과거에는 불법으로 탄압했다. 가족단위로 나와 촛불을 드는 게 불법이라니. 한 공무원은 형사기소 된 이후 유죄가 선고돼 징계를 받았다. 야간집시법 위헌이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로 이어진 걸 보면 사회가 조금씩 진보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 박근혜 취임 4주년인 지난 2017년 2월 25일 오후 서울 세종대로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을 비롯한 노동자, 농민 등 시민들이 박근혜의 탄핵과 구속, 자유한국당 해체, 특별검사 수사기한 연장 등을 촉구하며 열린 17차 촛불집회에서 촛불파도 퍼포먼스를 갖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노조·투자자 양대 축으로 하는 재벌 상시 감시·견제 체계 구축해야”

이 변호사는 민변에서의 활동을 통해 노조와의 접점을 넓혀갔다. 노동운동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등 사건이 그에게 주어졌다. 노조와 동고동락한 경제학 전공자이자 변호사인 그는 노조를 ‘자본시장에서 재벌을 감시하는 중요한 존재’라고 평가했다.

“자본주의에서는 필연적으로 격차가 발생한다. 빈부격차뿐 아니라 권력 격차도 있다. 기업을 보면 권력이 점차 위(총수)로 집중된다. 자본주의를 유지하면서 격차를 완화하고 방만경영을 감시하는 게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틀이다. 한국 재벌의 가장 큰 문제는 총수 권력 남용을 견제할 수단이 검찰 구속 이후 법원 판결 외에는 없다는 점이다. 아주 극소수의 위법행위만 시범적인 본보기 형식으로 다루는 건 적절하지 않다. 검찰과 법원에 의존해서는 상시적인 감시 체계를 구축할 수 없다. 노조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노조와 결합해 활동했다.”

2004년부터 2007년 iTV(현 OBS경인TV) 노조와 함께 방송 종료부터 개국까지 3년간을 같이 움직이며 경영진의 기업 사유화 반대 투쟁에 힘썼다. 또한 현대증권(2016년 KB금융에 매각) 노조의 주주활동을 지원하고 대표소송을 맡아 진행했다.

“노조가 기업 총수 잘못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안전하고 건전하게 지속가능한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 다른 노조와도 주주권 활동을 함께 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보통 노조 위원장은 임기제다. 3년 내에 성과를 내야 한다. 주주권 활동은 단기간에 성과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경영진의 소득·권력 집중을 감시할 수 있는 한 축이 노조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이 변호사는 자본시장의 또 다른 축으로 투자자를 꼽았다. 특히 기관과 연기금 역할을 강조했다. 이들이 안정적으로 주주권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건전한 자본시장 플레이어를 양성해야 상시적인 재벌 감시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때로는 미친놈 하나가 휘저어야 변화가 생긴다”

노조와 기관·연기금을 양대 축으로 하는 재벌 감시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이 변호사 철학은 ‘조양호 퇴진’ 운동으로 이어졌고 한국 자본시장에서 역사적인 성과를 거뒀다. 이 변호사는 ‘조양호 퇴진’이 실패하면 앞으로 한국 주주권 활동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할 만큼 대한항공이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당시 대한항공 상황을 봤을 때 조양호 퇴진이 실패하면 다른 주주권 활동도 안 된다고 판단했다. 조건이 다 갖춰졌다. 조양호 연임안은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통과되는 특별결의안건이었고, 총수일가 방만경영에 대한 인지도도 높았다. 주주구성도 붙어 볼 만했다. 이처럼 완결적인 배경을 가진 사건은 드물다.”

이 변호사는 ‘조양호 퇴진’ 운동을 독자적으로 추진했다. 그간 시민단체 밖에서 위임장 대결 사건을 여러 건 수임한 경험도 있었고 이를 재벌 견제에 결합해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그렇지만 참여연대와 민변 등 단체의 내부 결재 절차를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시민단체 외에도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으로서 추진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수탁자책임위 구성을 보니까 뭔가 적극적으로 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복지부 공무원이나 일부 위원들은 뒷짐을 지면서 오히려 주주권 행사에 따른 결과물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듯했다. 이렇게 좋은 사건을 위원회에서 추진하려고 시도하다가 진을 빼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누군가 미친놈이 하나 들어가서 휘저어야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혼자 깃발을 꽂았다.”

이후 참여연대가 함께 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민변에서도 선후배 변호사들이 내부 설득을 통해 공식적으로 이름을 걸고 같이 활동하게 됐다. 물론 대한항공 직원연대 지부도 힘을 보탰다.

이 변호사는 조현민 전 진에어 부사장이 한진칼 전무로 경영 복귀한 데 대해서는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한진그룹 경영에는 노동자와 가족 등 수천·수만명의 생계가 걸려있는데,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현민 전무가 지주사 임원이라는 중요한 직위를 너무 쉽게 꿰차고 들어왔다는 얘기다.

▲ 대한항공 정상화를 위한 주주권 행사 시민행동 회원들이 지난 3월 27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제57기 대한항공 정기주주총회가 끝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이 부결됐다. ⓒ김슬찬 기자


소외된 농업 위해 홍성 농변 만들 것
하림 등 식품기업의 농가 착취 들여다볼 계획

현재 이 변호사는 서울시복지재단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장으로 활동 중이다. 이 자리는 그에게 새로운 출발 배경을 마련해줬다. 그는 지난 2012년 4월 뇌출혈로 쓰러져 2년 반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나가기도 싫고 세상사람 보기도 싫었다. 지금껏 함께 시민활동을 해왔던 동료들이 ‘도저히 못 봐주겠다’며 끌어내려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선후배 변호사들이 계속 병문안을 왔다. 계속 밖으로 나오라고 해도 안 되니까 복지재단에 자리가 있으니 면접을 한번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 막판까지도 안 나가려고 하니까 면접 하루 전에도 병원에 찾아오더라. 여기서 안 나가면 이 바닥에서 선후배 얼굴을 더는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이 들었다. ‘동굴에 그만 갇혀 있어라’라는 말을 듣고 면접을 봤다.”

센터는 소외계층의 소송을 무료로 진행해주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른바 ‘사법접근성 강화’라고 하는데, 주로 법률구조공단이 수행하고 센터는 공단 업무를 지원하거나 공단이 챙기지 못하는 사건을 맡는다. 대표적으로 주민등록등본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소송을 대리하는 일이 있다. 출생신고가 안 된 사람들은 주민등록등본이 없어 복지·행정서비스에서 배제되기 때문에 권리구제 차원에서 주민등록을 돕는 것이다.

이 변호사는 향후 계획을 묻는 말에 ‘홍성으로 갈 것’이라고 답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하 변호사, 경사노위 본위원회 공익위원인 김진 변호사와 나이가 들면 시골에 가서 편하게 쉬면서 살자는 약속을 했고 한다. 하 변호사가 가장 먼저 홍성에 자리를 잡았고 이 변호사는 2년 전부터 주말마다 홍성에 간다. 이들이 진짜 쉬면서 세월을 보낼 리 만무하다. 이 변호사 머리는 이미 홍성에서의 활동을 그리고 있었다.

“지역단체 활동을 할 것이다. 특히 방치된 분야다. 정리가 좀 되면 ‘농업 변호사 모임’(농변)을 만들 생각이다. 전공을 살려 농업의 산업화·계열사 문제를 다룰 생각이다. 하림이 대표적이다. 농축산 농가를 하청사로 두고 이익을 빨아들이고 있다. 하림을 비롯한 대기업이 독단적으로 유통체계를 장악했다. 농민은 끌려갈 수밖에 없다. 거래구조 개선이 시급하다. 노조가 없다 보니 부각이 안 될 뿐이다.

▲ 이상훈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장(변호사)가 지난 5일 오후 서울 공덕 서울복지재단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철수 기자


출처  [만민보]‘조양호 퇴진’ 선봉장…“때로는 미친놈 하나가 휘저어야 변화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