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김원봉과 동아일보

김원봉과 동아일보
[미디어오늘 1204호] 사설 | 승인 : 2019.06.16 13:25


1920년 부산경찰서 박재혁, 1920년 밀양경찰서 최수봉, 1921년 조선총독부 김익상, 1923년 종로경찰서 김상옥, 1924년 도쿄 궁성 김지섭, 1926년 동양척식 주식회사 나석주. 모두 일제를 향해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이다. 이들 모두 독립운동가로 서훈 받았다. 그러나 정작 의열단장 김원봉은 아직이다. 심지어 김원봉과 동지이자 부부였던 박차정도 1995년 뒤늦게 서훈을 받았는데.

김원봉이 얼마나 대단한 사회주의자였기에 청와대마저 ‘서훈 못 준다’ 할까. 김원봉은 사회주의자들 눈엔 단지 급진적 자본가에 불과했고, 보수 민족주의자에겐 사회주의자로 보였다.

▲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단독 선거 및 단독 정부 수립 반대 대책에 관한 결정서 초안을 낭독하는 인민공화당 대표 김원봉. 사진=나무위키

밀양사람 김원봉은 1913년 서울에 올라와 중앙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민족지사들이 운영하다 재정난에 1915년부터 호남 지주 인촌 김성수가 인수해 경영했다. 이후로도 김원봉과 ‘동아일보’의 인연은 길게 이어졌다.

1898년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1916년 18살에 중국에 가 이회영 이시영 형제가 있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서 동지를 규합한 뒤 1919년 의열단을 결성했다. 반면 임시정부는 1년도 못 가 분열했다. 김원봉은 이승만의 정치노선에 맞서 임정을 뛰쳐 나온 이회영 신채호와 뜻을 같이 했다. 김원봉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한 신채호는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을 완성했다. 바로 의열단 선언이다.

김원봉은 적도 많았다. 친소관계에 지나치게 끌리기도 했다. 의열단원들은 1924년 의열단 고위 간부였다가 김원봉과 틀어졌던 사회주의자 윤자영이 이끄는 청년동맹회 사무실에 난입해 윤자영을 때리기까지 했다. 김원봉은 윤자영을 찾아가 사과했다. 곤궁에 처한 의열단은 자금을 구하려고 때론 비정상적 방법도 동원했다. 이렇게 해선 오래 갈 수 없었다. 김원봉은 1925년 들어 사실상 암살 노선을 폐기했다.

▲ 의열단과 의백(義伯) 김원봉을 다룬 신문기사. 사진=나무위키

김원봉은 1926년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장개석이 교장이었고 주은래가 선생으로 있었다. 장개석은 1926년까진 소련과 연대하면서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졸업 뒤 그는 장개석의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했다. 덕분에 그는 줄곧 장개석의 도움을 받았다. 반면 한번도 중국공산당엔 입당하지 않았다.

김원봉은 20년대 말부터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의열단 이론가 안광천과 늘 함께 했다. 그러나 안광천은 1928년 같은 고향이란 이유로 친일단체 창립선언문을 써주고, 치정 등의 문제로 조선공산당에서 제명당했다. 김원봉은 1932년엔 의열단이 만든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아내 박차정의 오빠이자 자신과 의형제였던 박문희를 입학시켰다. 박문희는 신간회 말기에 이광수최남선이 주장했던 “자치론도 검토해야 한다”고 발언해 물의를 일으켰다.

의열단은 1930년대 서울의 잇단 파업에 개입하려 했지만 파업을 지도했던 이재유는 의열단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거부했다.

저항시인 이육사는 중국으로 김원봉을 찾아와 의열단원이 됐다. 김원봉은 1939년부터 김구 등 임정 내 보수파와 통합을 모색했고 1944년 임정 내 군무부장이 됐다.

▲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암살’에 등장했던 약산(若山) 김원봉. 배우 조승우씨가 김원봉 역할을 맡았다.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는 해방 뒤 귀국한 그를 천대했지만, 동아일보는 그를 자주 크게 소개했다.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와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가 그의 중앙학교 은사였다. 동아일보는 1920년대 초 의열단 투쟁을 다른 어떤 독립운동보다 상세히 보도했다.

해방 공간에서 떠밀려 북으로 간 그는 1958년 이후 사라졌다. 소설가 김학철은 그가 감옥에서 자결했다고 증언했다.


출처  김원봉과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