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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신문, ‘을사늑약 114년’ 맞아 “모든 대가 끝까지 받아낼 것”

북 신문, ‘을사늑약 114년’ 맞아 “모든 대가 끝까지 받아낼 것”
“불법무법의 협잡문서, 70여 년 흘러도 아물지 않는 원한의 응어리”
[민중의소리] 신종훈 기자 | 발행 : 2019-11-17 11:24:21 | 수정 : 2019-11-17 11:24:21


▲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찍은 기념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114년을 맞아 “을사5조약은 아무런 법적 효력도 가질 수 없는 불법무법의 협잡문서”라고 비난했다.

노동신문은 17일 ‘불법무법의 협잡문서로 국권을 강탈한 날강도적 행위’라는 제목의 정세론해설 기사를 통해 “오늘 일본 반동들은 을사5조약을 날강도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데 악용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신문은 “그들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법적으로 유효’하며 ‘조선에서 일본의 식민주의는 인간적이었다’는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저들의 극악한 과거 범죄 행위들에 대한 국가적 책임에서 벗어나며 배상을 회피하려고 음흉하게 획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조목조목 나열했다.

그러면서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노리고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조선의 국권과 관련되는 조약들을 조선봉건국가의 조약체결 절차마저 강압적으로 뒤집어엎고 전권위임장과 비준이 없이 날조하는 강도 행위를 일삼았다”며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바로 을사5조약”이라고 꼬집었다.

신문은 “국권을 지켜보려는 고종 황제의 완강한 태도와 조선 인민의 격렬한 반일투쟁 기세,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 사이의 모순관계 등으로부터 위구(염려와 두려움)를 느낀 일제는 을사5조약 날조를 위해 총과 대포에 의거한 군사적 강권을 발동하는 강제적인 방법에 매달렸다”고 설명했다.

이어 “계획부터가 강제성을 전제로 했던 것만큼. 그 날조 과정 또한 불법무도한 위협과 공갈로 일관됐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신문은 “일제가 우리 인민에게 입힌 정신적 및 물질적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라며 “조선민족의 가슴에는 일제 식민지 통치의 수난기에 침략자에 의해 강요된 불행과 고통이 나라가 해방된 지 70여 년이 흐른 오늘도 아물지 않는 원한의 응어리로 남아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세월의 흐름은 결코 파렴치한 국권 강탈자의 죄악을 감소시킬 수도, 일제의 잔악한 조선민족 말살 역사를 지워버릴 수도 없다”고 꼬집었다.

신문은 “일본이 지난날 우리나라의 국권을 유린하고 강탈한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날뛰면서 반공화국 적대시 정책 실행에 광분할수록 그에 대한 모든 대가를 끝까지 받아내려는 우리 인민의 결심과 의지는 더욱 굳세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주체108(2019)년 11월 17일 로동신문

불법무법의 협잡문서로 국권을 강탈한 날강도적행위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을사5조약》을 강요한 때로부터 114년이 되였다.

오늘 일본반동들은 《을사5조약》을 날강도적인 식민지지배에 대한 법적책임을 회피하는데 악용하고있다. 그들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는 《법적으로 유효》하며 《조선에서 일본의 식민주의는 인간적이였다.》는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저들의 극악한 과거범죄행위들에 대한 국가적책임에서 벗어나며 배상을 회피하려고 음흉하게 획책하고있다.

《을사5조약》은 아무러한 법적효력도 가질수 없는 불법무법의 협잡문서이다.

국제조약의 체결은 주권국가들사이의 자원적인 의사합의를 기초로 하고있다.

《을사5조약》은 그 날조과정에 평등의 원리가 전혀 적용되지 못하였다. 조선봉건국가의 고종황제와 대신들은 자유로운 선택권을 보장받지 못하였으며 총칼로 무장한 일제의 로골적인 위협공갈속에 놓여있었다.

날조과정의 비법성은 조선봉건국가의 최고주권자인 고종황제의 비준을 받지 못한데서 집중적으로 표현되였다.

국가들사이의 중요한 조약이 반드시 국가대표자의 전권위임장과 비준을 필요로 하는 형식을 취하는것은 근대시기부터 국제조약체결에서 보편적인것으로 되고있다. 일본 근대초기의 권위있다고 하는 국제법학자들이 발간한 《국제법잡지》에 실린 일본을 포함한 각국의 외교협정형식이 그것을 보여주고있다. 당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규제하는 중요조약들은 전권위임과 조인, 비준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것이 국제적인 관례로 되여있었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독점적지배권을 노리고 1904년 로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조선의 국권과 관련되는 조약들을 조선봉건국가의 조약체결절차마저 강압적으로 뒤집어엎고 전권위임장과 비준이 없이 날조하는 강도행위를 일삼았다.

그 대표적인것의 하나가 바로 《을사5조약》이다.

국권을 지켜보려는 고종황제의 완강한 태도와 조선인민의 격렬한 반일투쟁기세, 조선을 둘러싼 렬강들사이의 모순관계 등으로부터 위구를 느낀 일제는 《을사5조약》날조를 위해 총과 대포에 의거한 군사적강권을 발동하는 강제적인 방법에 매달렸다. 계획부터가 강제성을 전제로 하였던것만큼 그 날조과정 또한 불법무도한 위협과 공갈로 일관되였다는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로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일본군자료들을 모아 편찬한 《륙군정사》에 실린 당시 조선주둔군사령관 하세가와의 보고서가 그를 실증해주고있다. 보고서에서 하세가와는 《을사5조약체결당시 일본군 기병련대와 포병련대까지 한양성내에 투입하여 완전장악했다.》고 하면서 조선강점의 제1공로자가 자기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고종의 반대로 황제의 서명과 국새날인을 받을수 없게 되자 일제는 조선봉건정부 외부대신의 인장을 훔쳐내여 제멋대로 찍는 비렬한짓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을사5조약》은 조약발효의 중요한 절차인 황제의 서명, 국새날인도 없이 날조되였다. 합법적조약으로서의 초보적인 형식조차 갖추지 못하였다.

국제사회가 《을사5조약》의 강제성을 시인하고 강력히 규탄한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1935년의 《하바드보고서》와 1963년 제15차 유엔국제법위원회에 제출된 《월더크의 보고》 등에는 《을사5조약》이 불법적이고 《절대적으로 무효》한것으로 규정되였으며 《일본군대를 동원한 강압적체결》이 그 근거로 제시되였다.

일제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총칼을 휘둘러 날조해낸 이런 날강도적인 《을사5조약》에 기초하여 《한일합병》이라는 전대미문의 국토병탄행위를 감행하였다.

일제는 불법무법의 《을사5조약》을 《법적근거》로 하여 극악한 조선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였다.

40여년간의 식민지통치기간 일제가 강행한 조선민족말살정책은 력사에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야만적인것이였다. 우리 인민은 피눈물나는 노예생활을 강요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에 의해 조선의 청장년들이 죽음의 전쟁터들과 고역장들에 끌려가 불행을 당하였다. 일제가 랍치, 유괴, 강제련행하여 전쟁판과 공사장들에 내몬 조선사람은 중일전쟁도발후에만도 840만여명에 달하였다. 강도 일제는 100여만명의 조선사람들을 살륙하였으며 20만명의 조선녀성들을 성노예화하는 특대형반인륜범죄를 감행하였다.

일제는 우리의 말과 글 지어는 조선사람의 성과 이름까지도 없애버리려고 간악하게 날뛰였으며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재부들과 우리 나라의 풍부한 자연부원을 닥치는대로 파괴, 략탈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일제가 우리 인민에게 입힌 정신적 및 물질적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것이다.

조선민족의 가슴에는 일제식민지통치의 수난기에 침략자에 의하여 강요된 불행과 고통이 나라가 해방된지 70여년이 흐른 오늘도 아물지 않는 원한의 응어리로 남아있다.

세월의 흐름은 결코 파렴치한 국권강탈자의 죄악을 감소시킬수도, 일제의 잔악한 조선민족말살력사를 지워버릴수도 없다.

일본이 지난날 우리 나라의 국권을 유린하고 강탈한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날뛰면서 반공화국적대시정책실행에 광분할수록 그에 대한 모든 대가를 끝까지 받아내려는 우리 인민의 결심과 의지는 더욱 굳세여지고있다.


출처  북 신문, ‘을사늑약 114년’ 맞아 “모든 대가 끝까지 받아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