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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사격 사망 5·18계엄군 ‘시민에 의해 전사’로 조작

오인사격 사망 5·18계엄군 ‘시민에 의해 전사’로 조작
‘전사자’ 된 계엄군 사망자
[경향신문] 강현석 기자 | 입력 : 2020.05.11 06:00 | 수정 : 2020.05.11 06:19


묘비는 말없이 서있고… 1980년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됐다 사망해 서울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힌 한 계엄군 묘비에 ‘1980년 5월 24일 광주에서 전사’라고 적혀 있다. 이 계엄군은 부대 간 ‘오인사격’으로 숨졌는데도 군 당국은 ‘폭도들과 교전 중 사망’으로 사망확인조서를 조작하고 ‘전사’ 판정을 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됐다 군부대 간 오인사격으로 사망한 계엄군들의 사망 원인이 군 당국에 의해 “광주시민들에 의한 전사”로 조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계엄군들은 훈장을 받고 국가유공자로 등록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경향신문이 10일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진압작전 중 사망한 계엄군의 ‘사망확인조서’를 확인한 결과 ‘오인사격’이란 명백한 군 기록이 있는 계엄군 10명의 사망 경위가 조작된 것으로 파악됐다. 5·18 직후 계엄군이 작성한 군 사망자 명단을 보면 당시 숨진 계엄군은 모두 23명이다.

계엄군 상황일지에 따르면 5월 24일 광주에서는 오전과 오후 2차례나 계엄군 간 교전이 벌어져 군인 13명이 숨졌다. 이날 오전에는 31사단과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기갑학교가 광주인터체인지에서 서로를 시민군으로 오인해 교전을 벌이다 31사단 소속 군인 3명이 사망했다. 오후에는 송암동에서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던 공수여단과 매복 중이던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 사이에 오인사격으로 10명이 숨졌다. 군 측이 조작한 것은 이들 10명의 사망확인조서다.


당시 ‘사망확인조서’ 10명 확인
“지휘 체계 숨기려 사인 감춘 듯”

군인이 사망하면 해당 부대 군 사법경찰관(헌병대)의 사망 경위 조사와 부대장 확인을 거쳐 사망확인조서가 작성된다. 송암동 사망자 10명은 사망확인조서에 사망 원인이 사실과 다르게 ‘전사’로 기록됐다. 군은 이들이 ‘광주시민과 교전 중 전사’한 것으로 꾸몄다. 11공수 소속 부사관의 경우 “5월 24일 오후 1시 30분경 인적불상 폭도들에 의해 전사한 사실임”이라고 기록됐다. ‘사망 구분에 대한 소견’은 ‘전사’라고 적었다.

조작된 사망확인조서는 1980년 6월 이들에게 수여된 훈장과 국가유공자 등록의 근거로 사용됐다. 경향신문이 오인사격으로 숨진 11공수 부사관의 훈장 공적조서를 확인한 결과 ‘5월 24일 폭도의 흉탄에 순직’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인헌 무공훈장을 받았고 1계급 특진했다.

계엄군이 국가유공자로 등록되는 데에도 사망확인조서는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군사원호보상법 시행령에는 원호대상자(현 국가유공자)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전공사확인증 또는 전공상확인증’을 제출하도록 규정했다. 이들은 모두 ‘전사자’로 등록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5·18 연구자인 노영기 조선대 교수는 “계엄군은 광주시민들의 과격성을 부각시키고, 공수부대가 전교사의 지휘체계를 벗어나 있었다는 점을 감추기 위해 사망확인조서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계엄군 사망 경위에 대한 재조사를 하면 당시 공수부대의 지휘체계를 확인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계엄군, 책임회피 위해 조작
국가유공자 등록도 고려한 듯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진압작전에 참여한 계엄군은 2만317명에 이른다. 7공수, 11공수, 3공수 등 모두 3,405명의 국군 최정예 전투부대가 차례로 투입됐고 20사단 4,946명도 증원됐다. 광주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와 31사단 병력 1만1966명도 동원됐다.

사망한 광주시민은 356명이나 된다. 165명이 항쟁 기간에 사망했고 113명은 당시 입은 부상과 고문 후유증 등으로 고통 속에 살아가다 결국 숨졌다. 78명에 이르는 행방불명자는 40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모두 사망한 것으로 봐야 한다.

5·18 직후 계엄군이 작성한 ‘군 사망자 명단’에 따르면 광주에 투입됐다 숨진 계엄군은 모두 23명이다. 계엄군은 사망자별로 ‘사망확인조서’를 발급했다. 이 조서는 사망 경위를 군 사법경찰관(헌병대)이 조사해 기록한 첫 공식 문건이다.

문건에는 조사를 진행한 헌병대 책임자의 계급과 성명, 사망자 소속 부대장의 계급과 성명·서명이 들어간다. 계엄군은 “오인사격으로 사망했다”는 명백한 군 기록이 있는 10명의 계엄군 사망자의 조서를 ‘폭도(광주시민)들과 교전 중 사망’으로 조작해 ‘전사’로 분류했다. 군의 사망확인조서는 민간에서 발생한 ‘사망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경찰 조서와 기본적으로 성격이 같다.


5월 24일 오인사격 계엄군 13명 사망
계엄군 사망 원인 1위 ‘오인사격’
23명 중 13명… 모두 24일 발생

5·18 당시 계엄군 사망자는 공수부대에 집중됐다. 11공수에서 11명이 숨져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7공수 3명, 3공수 1명 등 15명의 공수부대원이 숨졌다. 20사단은 2명, 전교사 1명, 31사단 3명, 9전차 부대도 1명이 사망했다.

사망 원인별로 보면, 13명이 계엄군 간 오인사격으로 숨졌다. 5월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후 무장을 시작한 시민들과 교전을 벌이다 사망한 계엄군은 도청 진압작전을 포함해 5명이었다. 2명은 차량사고, 1명은 오발사고, 2명은 사망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

오인사격으로 인한 군 사망자 13명은 모두 5월 24일 발생했다. 그날 오전 31사단과 전교사 기갑학교는 광주인터체인지에서 서로를 시민군으로 오인해 교전을 벌였고 31사단 소속 군인 3명이 숨졌다.

공수부대도 오인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계엄군은 이날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있던 3개의 공수부대를 모두 광주비행장에 집결하도록 했다. 공수부대는 5월 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 광주 외곽으로 이동해 광주를 외부와 고립시켰다. 봉쇄작전은 20사단이 넘겨받았다. 비행장에 모인 공수부대는 특공조를 조직해 5월 27일 전남도청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11공수 1,200여 명은 그날 오후 1시 30분쯤 장갑차와 수송차량 45대에 나눠 타고 광주비행장으로 철수하던 중 송암동 부근에서 매복 중이던 전교사 소속 육군보병학교 교도대 병력과 교전을 벌였다. 11공수 이동 행렬을 ‘시민군’으로 판단한 보병학교 교도대는 대전차 화기 등을 동원, 기습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11공수 8명과 지원을 나간 7공수 1명, 전교사 1명 등 계엄군 10명이 숨지고 4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2007년 국방부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이었던 노영기 조선대 교수는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는 전교사에 배속됐지만 제대로 지휘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5월 24일에만 두 차례의 오인사격이 발생했다”면서 “부대 간 소통이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10명 첫 사망확인조서 무더기 조작
10명 사망자 몰린 11공수부대
매복했던 교도대 기습에 타격
“지휘통제 제대로 안 이루어져”

‘송암동 오인사격’으로 숨진 군인들의 사망 원인은 무더기로 조작됐다. 당시 계엄군의 각종 문건에는 ‘광주 송암동에서 계엄군 간 오인사격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군사령부 상황일지 5월 24일자에는 “14시 5분 계엄군 오인 총격사고”라며 사고 상황이 적혀 있다.

전교사 전투상보에도 “14시 15분 11공수 병력 비행장으로 철수 중 봉쇄 부대인 보교와 충돌사고”라고 기록됐다.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에도 비교적 당시 상황이 세세하게 적혀 있다. 오인사격의 당사자였던 11공수도 전투상보에 당시 상황을 기록해뒀다.

하지만 송암동에서 숨진 계엄군 10명의 사망 경위를 처음 기록한 사망확인조서에는 모두 “인적 불상의 폭도들에 의한 전사”로 기록했다. 11공수 박모 상사의 사망확인조서에는 “전남 광주 무장폭도 소요사태 진압차 계엄군으로 출동되어 5월 24일 13시 30분경 인적 불상 폭도들에 의해 전사한 사실임”이라고 적혀 있다. 이 사망 경위는 특전사 헌병대 김모 대위가 확인했고 최웅 11여단장 확인이 들어가 있다.

조작된 사망확인조서는 5·18 직후 군 사망자들에게 추서된 ‘훈장’의 공적으로 기록됐다. 경향신문이 1980년 6월 10일 군 당국이 작성한 훈장 추서 관련 문건을 입수해 확인한 결과 사망확인조서의 내용과 일치했다. 인헌무공훈장이 추서됐던 11공수 박 상사의 공적으로 “충정작전에 참가하여 5월 24일 폭도의 흉탄에 순직”이라고 적혀 있다.


“전사”로 조작된 사망확인조서
훈장 추서 관련 문건과 일치
지휘부 묵인 속 진행 가능성

조작된 사망확인조서는 이들이 국가유공자가 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군사원호보상법은 원호대상자(현 국가유공자)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전공사확인증 또는 전공상확인증’을 제출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 법은 “군인으로서 전투 또는 공무수행 중 사망한 자”를 ‘전몰군경(전사)’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조작된 사망확인조서로 계엄군은 ‘폭도(광주시민)와 전투 중 사망’한 것이 됐다.

계엄군의 사망 경위 조작은 당시 최고 지휘부의 묵인 아래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특전사령부는 5월 26일 오인사격 사망자들의 사망 원인을 조작해 계엄사령관이던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했다. 조작된 사망확인조서는 바로잡히지 않았다.

석연치 않은 사망기록은 또 있다. 전교사 방위병이던 손모씨는 5월 22일 오후 출근하다가 광주 서구 화정동에서 사망했다. 그는 광주기독병원으로 옮겨졌다. 인근에서는 당시 시민들을 향한 20사단의 발포가 있었다. 시민 사망자로 분류됐던 그는 이후 신원이 확인되면서 ‘전사자’가 됐다. 5월 28일 작성된 전교사의 사망확인조서에는 ‘출근 도중 과격분자가 발사한 총탄에 현장에서 사망’이라고 적혔다.

예비역 대령 출신 ㄱ씨는 “계엄군 간 오인사격 사망자의 사망확인조서를 조작한 것은 최종적으로는 군인들의 국가유공자 등록까지를 염두에 둔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이 같은 사실은 당시 계엄군 최고 지휘부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5·18 당시 계엄군 사망자에 대한 재조사 요청이 있으면 법과 절차에 따라 재심사를 실시할 수 있다”면서도 “지난해 12월 출범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투명하고 객관적인 조사가 진행될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출처  [단독]오인사격 사망 5·18계엄군 ‘시민에 의해 전사’로 조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