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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대전MBC 유지은 아나운서가 쏘아올린 작은 공

대전MBC 유지은 아나운서가 쏘아올린 작은 공
[뉴스타파] 조현미 | 2020년 08월 31일 13시 30분


20년 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방송국 아나운서 역할을 맡은 배우 채림 씨가 어린이 유괴 사건을 보도하다 생방송 중에 화가 나 이런 멘트를 한다.

“정말 나쁜 놈들이에요.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담보로 요구하는 행위는 세상에서 제일 파렴치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 이런 일은? 물론 잘 일어나지 않는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든 밖에서든 아나운서가 어떤 사안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외부로 알린다는 것은 지금도 드문 일이기도 하다.

아나운서들은 뉴스 보도를 통해 부당한 일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끊임없이 전달하지만, 정작 시청자들은 그런 소식을 전하는 아나운서들이 어떤 여건에서 일하는지 알기 어렵다.

아나운서가 먼저 나서서 그들이 처한 현실을 세상에 알리기는 쉽지 않다. 특히 방송국에 현직으로 재직 중일 때는 더 그렇다. 그런데 본인이 처한 부당한 현실을 당당하게 세상에 알린 아나운서가 있다. 대전MBC 유지은 아나운서다.

▲ 대전MBC 유지은 아나운서

유지은 아나운서는 대전, 세종, 충남 지역 MBC 시청자들에게는 낯익은 아나운서다. 2014년 5월 대전MBC에 입사한 후 줄곧 메인 뉴스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매일 방송되는 대전MBC 라디오 ‘정오의 희망곡’ 역시 6년째 맡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9월 이후로 시청자들은 대전MBC TV 화면에서는 유 아나운서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지난해 가을 개편으로 뉴스데스크 대전, 세종, 충남 앵커에서 하차했기 때문이다.


기간제법 피해가며 숙련된 인력 사용할 수 있는 ‘무늬만’ 프리랜서

1년 전인 2019년 6월, 대전MBC의 메인 여성 앵커였던 유지은 아나운서는 후배 아나운서와 함께 국가인권위원회에 ‘채용 성차별’로 진정을 넣었다.

대전MBC는 1980년대까지 정규직 아나운서로 여성과 남성을 동시에 채용하거나 번갈아가며 채용했다. 그런데 1997년 이후 채용된 정규직 아나운서는 공교롭게도 모두 남성이었고, 계약직으로 채용한 아나운서는 모두 여성이었다.

그마저도 2014년부터는 여성 아나운서를 계약직도 아닌 프리랜서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2014년에 대전MBC에 프리랜서로 처음 채용된 아나운서가 바로 유지은 아나운서다.

▲ 대전MBC 정규직 아나운서 성별 분포. (출처 : 국가인권위원회 결정문)

유지은 아나운서는 2000년대 들어 대전MBC에서 가장 오래 뉴스를 전한 여성 아나운서였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프리랜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지은 아나운서 이전에 대전MBC에 근무했던 계약직 아나운서들은 계약 기간을 채우자마자 회사를 떠나거나 계약 기간을 채우기 전에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반면 프리랜서는 2년 이상 사용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기간제법을 피해갈 수 있었다. 회사 입장에선 정규직 전환에 대한 부담 없이 숙련된 인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유 아나운서는 편성제작국과 보도국 상급자로부터 업무에 대한 지휘, 감독을 받았다. 대전MBC 외에는 다른 방송국에 출연하지도 않았고 외부 활동은 회사의 통제를 받았다. 책상과 컴퓨터도 제공됐고 정규직과 동일한 출입증도 발급받았다.

아침 뉴스인 뉴스투데이와 저녁 뉴스인 뉴스데스크를 동시에 진행한 적도 있었다. 다른 정규직 아나운서들이 휴가를 가면 ‘대타’를 뛰었는데 정작 본인은 유급 휴가를 한번도 가지 못했다. 재직 6년 동안 일주일 넘게 휴가를 다녀온 것은 딱 한번이었는데 그마저 무급이었다.

유지은 아나운서가 회사를 상대로 대전MBC의 노동자임을 인정해달라는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인권위에 진정을 넣은 것은 회사와의 원만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권위 진정 사건을 담당한 김승현 노무사는 “(인권위에 진정을 넣을 당시만 해도) 회사랑 문제가 없고 방송 활동을 멀쩡히 잘 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와 관계가 너무 나빠지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싶다는 게 유지은 아나운서의 입장이었다”며 “계속 일하고 싶다는 의지가 굉장히 강했다”고 말했다.


인권위 진정 후 프로그램 줄줄이 하차...대전MBC “방송 편성 자율”

하지만 인권위 진정을 넣은 뒤 유지은 아나운서와 후배 아나운서가 마주한 현실은 혹독했다. 유지은 아나운서가 매일 낮 12시에 진행하는 대전MBC ‘정오의 희망곡’은 보이는 라디오로 영상도 함께 방송하고 있었는데, 인권위 진정 3일 만에 중단됐다. 진정 다음달인 2019년 7월에 단행된 라디오 개편에서 유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21시 뉴스’가 폐지됐다.

사측은 뉴스 경쟁력 제고와 52시간 근무제에 대비해 저녁 뉴스를 없애는 추세라는 이유를 들었다. 함께 진정을 넣은 후배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과 ‘15시 뉴스’는 제작비 절감을 이유로 진행자가 정규직 남성 아나운서로 교체됐다.

진정 3개월 뒤인 2019년 9월에 단행된 텔레비전 개편에서는 유 아나운서가 ‘뉴스데스크 대전 세종 충남’에서 하차되고 후배 아나운서도 2개 TV 프로그램에서 하차당했다. 유지은 아나운서의 자리는 인권위 진정 후 새로 채용된 프리랜서 ‘뉴스 진행자’가 대체했다. 결국 후배 아나운서는 주 1회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다 생계유지가 어려워 지난해 10월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저에게 인권위 진정 이후 가장 큰 변화란 뉴스에서 제외된 것이었어요. 가장 충격이었죠. 저는 대전MBC에서 뉴스를 전하면서 자부심이 많았거든요. 아침에 항상 보면서 출근한다고 개인 SNS에 연락주시는 분들고 있고. 한번도 뉴스에서 제외된 적 없이 대전MBC 뉴스를 책임져왔다고 생각하는데 거기서 제외되고 나니까 너무 허탈했어요. 그래서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건 뉴스죠 뉴스.”
- 유지은 대전MBC 아나운서

▲ 국가인권위에 채용 성차별 문제로 진정을 제기한 후 유지은 아나운서는 모든 뉴스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현재 라디오 ‘정오의 희망곡’만 진행하고 있다. 보이는 라디오는 진정 제기 3일 만에 중단됐다. (사진 출처 = 대전MBC)

이제 유지은 아나운서에게 남은 방송은 매일 낮 12시 대전MBC 라디오에서 방송되는 ‘정오의 희망곡’ 하나밖에 없다.

이런 프로그램 개편에 대해 대전MBC 관계자는 “방송 편성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방송법과 방송편성규약에서 보장받고 있는 제작자의 중요한 권리”라며 “프로그램 개편은 제작자들의 정당한 권리고 회사는 개편 과정에 관여할 수 없다”고 해명했다. 다시 말해 방송 제작자들의 자율적인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인권위 “대전MBC 아나운서 직군 채용 성차별” 인정…정규직 전환도 권고

하지만 인권위는 올해 6월 두 아나운서가 출연하는 프로그램 횟수와 보수가 감소한 것은 인권위 진정으로 인한 불이익 처분에 해당한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에게 각각 위로금 500만 원을 지급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대전MBC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인권위는 진정 내용의 핵심인 채용 성차별도 인정했다. 대전MBC가 남성은 정규직 아나운서, 여성은 계약직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채용한 것은 성차별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인권위는 보도자료를 내고 “진정인들의 업무 내용 및 수행 방식은 형태만 프리랜서일 뿐 사실상 근로자로서 남성 정규직 아나운서와 동일한 업무를 수행했다”며 “여성 아나운서를 프리랜서로 전환해 채용할만한 합리적 사유가 없다고 보았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여성 아나운서의 고용형태를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다시 프리랜서로 고용형태를 전환한 것은 여성은 나이가 들면 활용 가치가 떨어진다는 인식에서, 여성 아나운서들을 원하는 기간 동안 사용하면서도 정규직 전환의 책임을 회피하고 손쉽게 계약 해지가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해 성차별적 채용 및 고용 환경을 유지했던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노동자성이 인정되는 두 아나운서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대전MBC는 채용 성차별 관행에 대해서는 시정하겠다면서도 정규직 전환은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대전MBC 관계자는 “관행적으로 정규직을 남성으로 프리랜서를 여성으로 채용해온 것은 제도적 문제에서 비롯되거나 의도된 것은 아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차별적 채용이라는 결정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이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유념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규직 전환 권고에 대해서는 “인권위의 결정이 방송사의 업무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했다”며 “이 부분은 다툼의 소지가 명확히 존재하기 때문에 사법적인 판단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MBC 16개 지역사 전체 여성 아나운서 61%가 계약직‧프리랜서

이번 인권위 조사과정에서 MBC가 인권위에 제출한 16개 지역사 아나운서 고용형태에 따르면 남성은 고용이 불안정한 계약직과 프리랜서가 12.2%에 불과한 데 반해 여성은 61.1%나 됐다. 여성 아나운서를 계약직 또는 프리랜서로 채용하는 관행이 대전MBC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올해 1월 40여개 시민사회, 언론, 노동단체들이 모여 발족한 ‘대전MBC 아나운서 채용성차별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준 목포, 강원영동, 광주, 안동, 여수MBC 등은 여성 아나운서만 프리랜서나 계약직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MBC는 지난 7월 31일 16개 지역사에 인권위의 결정을 수용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강지웅 MBC 기획조정본부장은 “방송통신위원회가 2014년경 MBC 재허가 전제 중 하나로 지역사의 경영 자율성을 침해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린 게 있다”며 지역사의 인사, 채용 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시민사회‧언론‧노동단체 “언론정상화된 MBC, 시청자 기대 저버리지 말아야”

대전MBC 아나운서 채용성차별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는 지난 1월 22일 서울 상암동 MBC 앞에서 발족 기자회견을 열고 “성별을 기준 삼아 채용 등 고용상 성차별을 하고 노동자의 정당한 문제 제기에 인사상 불이익을 준 점은 촛불 혁명 후 언론정상화가 된 공영방송 MBC에게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공대위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을 한국여성노동자회 활동가는 대전MBC가 인권위 권고를 수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공영방송으로서 대전MBC 혹은 MBC가 갖고 있는 사회적 지위와 지지도를 스스로 내팽개치는 처사”라며 “공영방송이라면 콘텐츠의 공영성뿐만 아니라 조직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도 사회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대위는 대전MBC가 인권위의 권고를 전면 수용할 것을 촉구하는 온라인 서명을 벌이고 있다.


출처  방송사비정규직② 대전MBC 유지은 아나운서가 쏘아올린 작은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