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오딧세이] 서양 고지도에는 간도가 우리땅
2008 02/26 | 뉴스메이커 763호
우리 땅 독도를 두고 흔히 서양 고지도를 많이 언급한다. 우리나라 고지도에서는 당연히 독도가 우리 땅으로 그려진 만큼 서양 고지도에서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면 세계적으로 당연히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 강희제 백두산정계비 세워
그렇다면 간도는 어떨까? 근대적인 지도가 만들어지던 18세기의 서양 고지도를 살펴보면, 모든 고지도에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존재한다. 서양 고지도를 증거로 하면 우리나라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선이 아니다. 압록강 너머의 서간도와 두만강 건너의 북간도 일부가 우리 땅이 되는 셈이다. 국제적으로 이 영토 문제가 부각된다면 이들 서양 고지도가 우리나라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자료가 된다.
청나라가 영토에 눈을 뜨고, 자신의 강역을 의도적으로 넓히려 한 것은 강희제 시절이다. 이때 조선을 압박해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1712년의 일이다. 당시 강희제는 청의 강역을 분명히 하기 위해 프랑스 신부에게 의뢰해 지도를 제작하게 한다.
1709년부터 프랑스 신부 레지는 직접 길림과 흑룡강 유역 등을 조사했다. 이 조사를 토대로 서양식 지도인 당빌지도가 만들어졌다. 청나라가 스스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이 지도에서조차 조선과 청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서 있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 선을 ‘레지선’이라고 이름 붙였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프랑스의 여러 고지도에서도 조선과 청의 국경은 레지선과 비슷한 곳에 그어져 있다.
지난해 건설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이 명지대학교에 의뢰해 서양 고지도 400점을 분석한 결과도 마찬가지다. 모든 서양 고지도에 20세기 초까지 간도는 한국 영토로 표기됐다. 외국인들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한국의 영토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간도까지 포함됐던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영토문제 언급 기피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의 고지도는 서양 고지도처럼 간도를 우리 영역 안에 뚜렷하게 포함시키지 않았다. 독도와는 정반대 현상인 것이다. 우리나라 지도가 한결같이 독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하고 19세기 후반 일부 서양 고지도에서 독도에 일본식 표기를 한 반면, 간도는 서양 고지도가 모두 우리 땅으로 표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고지도에는 영역이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는 1636년 병자호란의 깊은 상처가 담겨 있다.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은 그 후 영토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간도를 우리 영역으로 표기한 지도가 청나라에 알려질 경우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우리나라 지도에서조차 간도를 우리 강역에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어떻게 조선 후기의 간도를 조선 땅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냐며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청이 조선에 군신(君臣)관계를 요구했던 역사적 상황을 미뤄 살펴보면 우리나라 고지도에서 왜 그렇게 표시할 수밖에 없었는지 전체 맥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영역을 분명하게 표시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고지도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부분이 그려져 있다. 특히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전도에는 간도지역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두만강 너머에 선춘령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윤관이 고려의 경계선으로 세운 비석도 표기돼 있다. 조선 초부터 선비들은 이 선을 조선의 경계선으로 여겼다. 그리고 대부분 우리나라 지도에서는 백두산 천지에서 북쪽으로 흘러들어가는 혼동강(지금의 송화강)을 표시해놓았다. 우리의 지리적 영역이 이미 이곳까지 뻗쳐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윤호우 기자>
2008 02/26 | 뉴스메이커 763호
우리 땅 독도를 두고 흔히 서양 고지도를 많이 언급한다. 우리나라 고지도에서는 당연히 독도가 우리 땅으로 그려진 만큼 서양 고지도에서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면 세계적으로 당연히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 강희제 백두산정계비 세워
그렇다면 간도는 어떨까? 근대적인 지도가 만들어지던 18세기의 서양 고지도를 살펴보면, 모든 고지도에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존재한다. 서양 고지도를 증거로 하면 우리나라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선이 아니다. 압록강 너머의 서간도와 두만강 건너의 북간도 일부가 우리 땅이 되는 셈이다. 국제적으로 이 영토 문제가 부각된다면 이들 서양 고지도가 우리나라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자료가 된다.
▲ 경희대 혜정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양 고지도. 1745년 키친이 제작한 이 지도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위에 국경선이 그려져 있다. |
청나라가 영토에 눈을 뜨고, 자신의 강역을 의도적으로 넓히려 한 것은 강희제 시절이다. 이때 조선을 압박해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1712년의 일이다. 당시 강희제는 청의 강역을 분명히 하기 위해 프랑스 신부에게 의뢰해 지도를 제작하게 한다.
1709년부터 프랑스 신부 레지는 직접 길림과 흑룡강 유역 등을 조사했다. 이 조사를 토대로 서양식 지도인 당빌지도가 만들어졌다. 청나라가 스스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이 지도에서조차 조선과 청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서 있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 선을 ‘레지선’이라고 이름 붙였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프랑스의 여러 고지도에서도 조선과 청의 국경은 레지선과 비슷한 곳에 그어져 있다.
지난해 건설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이 명지대학교에 의뢰해 서양 고지도 400점을 분석한 결과도 마찬가지다. 모든 서양 고지도에 20세기 초까지 간도는 한국 영토로 표기됐다. 외국인들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한국의 영토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간도까지 포함됐던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영토문제 언급 기피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의 고지도는 서양 고지도처럼 간도를 우리 영역 안에 뚜렷하게 포함시키지 않았다. 독도와는 정반대 현상인 것이다. 우리나라 지도가 한결같이 독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하고 19세기 후반 일부 서양 고지도에서 독도에 일본식 표기를 한 반면, 간도는 서양 고지도가 모두 우리 땅으로 표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고지도에는 영역이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는 1636년 병자호란의 깊은 상처가 담겨 있다.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은 그 후 영토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간도를 우리 영역으로 표기한 지도가 청나라에 알려질 경우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우리나라 지도에서조차 간도를 우리 강역에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어떻게 조선 후기의 간도를 조선 땅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냐며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청이 조선에 군신(君臣)관계를 요구했던 역사적 상황을 미뤄 살펴보면 우리나라 고지도에서 왜 그렇게 표시할 수밖에 없었는지 전체 맥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영역을 분명하게 표시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고지도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부분이 그려져 있다. 특히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전도에는 간도지역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두만강 너머에 선춘령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윤관이 고려의 경계선으로 세운 비석도 표기돼 있다. 조선 초부터 선비들은 이 선을 조선의 경계선으로 여겼다. 그리고 대부분 우리나라 지도에서는 백두산 천지에서 북쪽으로 흘러들어가는 혼동강(지금의 송화강)을 표시해놓았다. 우리의 지리적 영역이 이미 이곳까지 뻗쳐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윤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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