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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1975년 사망 당시 육안·손으로만 검안…‘단순 실족사’ 결론

1975년 사망 당시 육안·손으로만 검안…‘단순 실족사’ 결론
‘장준하 의문사’ 조사 어땠나
[한겨레] 권혁철 기자 | 등록 : 2012.08.15 08:26


▲ 장준하 선생이 김구 선생한테서 물려받은 태극기 앞에서 청중과 얘기하고 있다. 이 태극기는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홍구)공원에서 의거를 치르던 날 아침 김구 선생과 함께 식사하고 찍은 사연이 깃든 태극기다. 장 선생은 숨지기 9일 전인 1975년 8월8일 이화여대 박물관에 이 태극기를 기증했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장준하 의문사’ 조사 어땠나

1993년 민주당 조사위 보고서
“우측 귀 뒷부분 원형 함몰 골절
인공적인 물체로 충격 가한 것”

2004년 의문사위 조사
“추락 손상으로 보기 어려우나
골절 생긴 원인 추정도 어렵다
경찰조사 배제…중정 개입 가능성”


장준하 선생이 타살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구체적인 단서가 그의 사후 37년 만에 나왔다. 그의 사인을 둘러싸고 여러 논란이 있었는데도 이렇게 늦게야 단서가 포착된 것은, 1975년 사망 당시 장 선생 주검은 의사의 육안과 손에 의한 검안만 실시된 뒤 매장됐기 때문이다. 사건 당시 장 선생의 부인은 ‘군사독재 아래서 사인이 제대로 밝혀질 리 없다’며 부검에 반대했다.

1993년 9월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내놓은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 조사위원회’ 보고서를 보면, 장 선생 사망 다음날인 75년 8월18일 새벽 1시께 의정부시 외과의원 원장 ㅅ씨가 사고 현장에 의정부지청 당직 검사와 함께 도착해 촉진(손으로 하는 검진) 위주로 장 선생 주검을 검안해 ‘오른쪽 후두부 함몰 골절이 결정적 사인’이란 소견을 제시했다. 당시 검찰은 의사가 추락에 의한 두개골 파열사로 진단했다는 점 등을 들어 장 선생 사인을 단순 실족사로 결론냈다.

이를 두고 2004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는 당시 변사사건 수사가 형식적으로 진행돼 초동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변사기록마저 폐기됐다고 지적했다. 의문사위는 사건 당시 검사가 주검을 검안한 의사로부터 ‘후두부 함몰 골절 등으로 미루어 추락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진술을 들은 뒤 약 5분 만에 현장검증을 마치고, 부검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장 선생 사망 사실을 보고받은 포천경찰서 경찰관들이 사고 현장에 출동했으나, 같은 날 자정께 검사가 도착하기 전까지 목격자 진술, 사망 경위 조사, 현장 감식은 물론이고 현장 사진 촬영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대해 포천경찰서 경찰관들은 ‘현장검증 당시 외부의 지시로 경찰은 사건 조사에서 완전 배제됐고, 중앙정보부 요원이 현장검증 뒤에도 변사사건 기록을 복사해 갔다’고 2004년 의문사위 쪽에 진술했다. 이 때문에 중앙정보부 요원이 사건 조사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의문사위 판단이었다.

1975년 사건 당시 가족 부탁을 받고 검안에 참가했던 조철구 박사는 93년 민주당 조사위에 내놓은 ‘사체 검안 소견서’에서 △머리를 비롯해서 외상을 입기 쉬운 겹간부, 주관절부, 수·족관절부 등 돌출부위의 외상이 전혀 없는 점으로 보아 넘어지거나 구른 흔적이 없고 △후두부 골절 부위가 해부학적으로 추락으로 인해 손상당하기 어려운 부위라고 지적했다.

조 박사의 검안 그림을 살펴본 법의학자 문국진 박사는 ‘장 선생 우측 귀의 뒷부분에 난 정원형 함몰 골절, 피하익혈상, 중앙부 출혈점이란 상처는, 요철상태가 중앙부분이 연필심과 반대편으로 오목한 형태의 인공적 물체를 가지고 직각으로 충격을 가한 것’이라는 의견을 민주당 조사위에 냈다.

민주당 조사 11년 뒤 진상 규명에 나섰던 2004년 의문사위는 “서울대 법의학교실은 법의학적 감정 결과 ‘변사자의 손상으로 보아 자유 낙하하여 추락한 손상으로 보기는 어려우나 후두부 함몰 골절이 생긴 원인은 추정하기 어렵다’고 감정하였다”고 법의학적 감정 결과를 밝혀, 사인을 둘러싼 의혹은 더 벗겨내지 못한 채로 조사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출처 : 1975년 사망 당시 육안·손으로만 검안…‘단순 실족사’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