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좋은 여자를..."야 그 얘기 하지마!"
김재규는 왜 박정희 뒤통수 '확인사살' 했나
[연재] 5·16쿠데타 50년, 박정희 권력 평가 ①
[오마이뉴스] 김재홍 | 11.10.10 12:57 | 최종 업데이트 11.11.09 12:07
박정희의 독재권력을 공식화한 10·17 유신체제 선포일과 그가 최측근 부하의 총탄에 맞아 숨진 10·26이 곧 다가온다. 더구나 올해는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50년, 그래서 권력을 총구에서 만들어 낸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역사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는 시점이다.
어떤 시인은 4월이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더 잔인한 달은 10월인 것 같다. 우리 현대사를 보면 4월이나 10월은 대학가에 민주화 학생운동이 불붙는 시점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여 동안 토론과 함께 준비의 시간을 갖다가 마침내 폭발하는 것이다. 어두웠던 독재정권 시절을 살면서 우리가 숱하게 겪어 온 계절적 악순환이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1972년, 그 반독재 학생운동의 계절 한복판에 노골적인 독재정권을 세우는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그 1년 전인 1971년 10월 15일 전국 대학가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학생 간부 177명을 체포해 중앙정보부, 군 보안사, 경찰에서 고문 조사한 뒤 전원을 군대로 강제 입영시켰다. 대학에서 모두 제적 처분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학생운동 세력을 '소탕'한 뒤 박정희는 민주화운동의 계절 한복판에 거리낌 없이 유신 쿠데타를 감행했다. 5·16과 함께 두 번째 쿠데타였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권총에 맞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10·26에 대해 김재규 자신은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계엄사 군사재판에서 '민주회복 혁명'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시 군사법정은 그에게 혁명을 일으킨 정치범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란 목적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정치범이나 단순 살인이라면 반드시 극형을 선고하지는 않는 게 상례다. 김재규는 "다수의 희생을 막기 위해 국민이 갈구하는 민주회복 혁명을 했다"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포로 된 장군 심정"이라고 군사법정을 비판했다.
10·26과 관련해 역사적으로 다시 따져 보아야 할 문제가 김재규를 민간 법정이 아니라 군사법정에 세운 것이 타당한지 여부다. 또 사형집행이 상례를 현저하게 벗어나 과도하고 신속하게 진행된 점, 특히 정치범에게 흔히 적용되는 감형이나 사면의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는 점이다.
첫째,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총을 쏜 10월 26일 당일 서울은 계엄령 상태가 아니었다. 부산 마산만 지역 계엄령이었으며 전국적으로 평상 상태였다. 계엄령은 10·26이 일어난 다음날 발동된다. 따라서 평상시에 발생한 10·26사건의 중심인물인 김재규는 헌법상 민간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를 계엄사 군사법정에 세운 것은 소급 적용으로 위헌이었다. 10·26사건 관련자들 중 군사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로 현역 대령인 박흥주 한 사람뿐이었다.
둘째, 김재규에 대한 재판이 대법원에서 확정된 것은 1980년 5월 20일이며, 그로부터 불과 나흘만인 5월 24일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는 전두환의 하나회 세력이 중심인 신군부가 5·18광주항쟁을 살상 진압하고 있을 때였다. 신군부는 5월 27일 광주의 전남도청에 발포, 점령함으로써 진압작전을 마무리했다. 이 격동의 와중에 신군부는 김재규를 처형함으로써 그가 정치범으로서 감형될 기회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10·26과 관련해 중요한 의문 중의 하나는 김재규가 왜 그렇게 박정희를 단호하고 냉혹하게 확인사살 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는 후에 군사법정에서 중정요원들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박정희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것을 알았으면 제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박정희가 사라져야 할 권력자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날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쏜 총알은 딱 두 발이다. 첫 발은 가슴을 관통했으나 치명타가 아니었다. 재차 발사하려 했을 때 김재규의 콜트사 제품 권총은 찰칵 소리만 낼 뿐 불발이었다. 김재규는 고장난 권총을 들고 밖에 나가 박선호가 서 있자 그의 권총과 바꾸어 갖고 다시 방에 들어간다.
박정희는 모 대학 재학 중인 패션모델 정혜선(가명)양의 무릎에 상반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다가가 머리 뒤통수에 권총을 겨눴다. 군사법정 진술과 현장검증에서 확인한 바로는 50cm 이내의 거리였다. 정혜선은 비명을 지르며 실내 화장실로 튀어 들어 피신했고 동석했던 가수 손금자(가명)양은 밖으로 뛰쳐 나갔다. 김재규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최후의 일발을 가격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확인사살이었다.
김재규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박정희와 동향이고 육사 2기 동기생으로 군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핵심 자리를 맡길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 사이에 확인사살이란 인간적 환멸과 증오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김재규의 그런 감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옛말에 "소인은 혁면(革面)하고 군자는 표변(豹變)한다"고 했다. 혁면이란 얼굴, 즉 안면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변덕 부리는 사람을 소인이라 하고 그 변덕의 한 단면을 혁면이라고 묘사했다. 그에 비하면 군자는 말이 없고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한번 마음 먹으면 얼굴 표정 바꾸는 변덕에 그치지 않고 몸 전체를 돌려버리는데 그것이 '표변'에 해당한다.
박정희는 김재규가 자신의 속마음까지 잘 헤아려 주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내치지는 않았다. 일종의 변덕으로 신임을 거두어들이는 혁면이지 아예 인연을 끊어버리는 표변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김재규는 유신 이후 박정희의 무자비한 인권탄압과 함께 "미국 놈들 갈테면 가라고 해" 등의 반미 발언으로 국가안보 위기를 절감했다. 여기서 그는 박정희와의 관계에서 혁면에 그치지 않고 표변하기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박정희가 권력자로서 변덕과 주색에 빠진 사생활 문란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환멸을 느꼈고 그것이 그의 '야수'와 같은 표변을 불러 일으켰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유신독재의 문제와 한미관계의 파탄을 주로 비판하면서 민주회복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비밀스런 마음 속 창고에는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에 대한 환멸감이 쌓여 있었다. 녹음테이프에 담긴 군사법정의 문답내용을 분석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것을 처음 감지한 사람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담당한 변호인이었다. 박선호 담당 변호인인 강신옥 변호사는 그의 사건 가담 동기와 그날의 행적 등을 정리하다가 처음부터 품었던 의문이 풀려감을 느꼈다. 유신체제의 핵심권력자들이 모인 술자리에 동석했다는 여인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바깥에서 술자리 여자를 구해 오는 '채홍사' 역할을 고정적으로 해야 할 만큼 박정희의 주색은 병들어 있었다.
1979년 12월 11일 오후 계엄사 보통군법회의 제4회 공판.
강신옥 변호인 : "피고인이 관리하는 다섯 개의 연회장은 대통령이 혼자 사용하시거나 이번에 사건이 생겼을 때와 같이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정보부장, 이 네 사람이 연회를 가질 때 사용하는 장소라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 "네, 그렇습니다."
변호인 : "… 대통령이 혼자 오실 때는 '소행사'라고 말하고,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중정부장이 올 때는 '대행사'라고 한다는데…."
박선호 : "그렇습니다만, 그 행사 관계는 참고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박선호의 답변은 목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소리가 됐다. 무언가 꺼리는 말투가 역력했다. 강 변호사는 여기서 더 바싹 다그쳤다. 박정희의 부도덕성과 타락상이 부각될 수록 '10·26거사'는 그만한 명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호인 : "아까 검찰관 신문 시 얘기하다 말았는데 당일 몇 시 몇 분에 플라자 호텔에 간 일이 있죠?"
박선호 : "… 네."
변호인 : 거기에 간 것은 그 날 연회를 도와 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군사법정에 긴장이 흐르는 사이 작은 외침이 울려 나왔다.
"야, 그 얘긴 하지마!"
피고인석 맨 앞 줄에 앉아 있던 김재규가 박선호의 답변을 제지하기 위해 소리쳤다. 이에 박선호도 '양심선언'의 기회를 유보하는 태도를 보였다.
박선호 :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변호인 : "그날 플라자 호텔에서 내자 호텔로 간 것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박선호 : "…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변호인 : "피고인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여자 문제를 더 힘들게 하고, 피고인 자신이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괴로워서 김 정보부장에게 수차 '도저히 이 일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고 하소연 하면서 그만두게 해 달라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김 부장이 '궁정동 일은 자네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사의를 만류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 "제가 근무를 몇 번 꺼렸습니다. 그래서 하기 어렵다는 여러 가지 사유를 부장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신임하시고 자꾸 계속 근무를 원하셨습니다."
변호인 : "차 실장은 '돈을 얼마든지 줄 테니까 좋은 여자를 구해 달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돈을 한 푼도 도와주지 않고 하도 말만 많아서 피고인이 경호처장인 정인형한테 '그러면 당신이 골라서 해라'고 했다면서요? 그랬더니 '청와대에서 고른다는 걸 국민이 알게 되면 큰일 난다'며 안된다고 하기에 피고인은 '골라놓은 사람들에게 좋든 싫든 말이나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항의까지 했더니, 그 이후에는 차 실장도 잔소리가 적어졌다는데 그렇습니까?"
박선호 : "…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국가정보기관의 간부로서 대통령의 채홍사라는 오명까지 쓰게 된 박선호는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갔다. 이에 강신옥 변호사는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교도소 접견 때 이미 그에게서 확인한 대통령 박정희의 술과 여자 문제를 공개해 나갔다. <계속>
출처 청와대가 좋은 여자를..."야 그 얘기 하지마!"...김재규는 왜 박정희 뒤통수 '확인사살' 했나
김재규는 왜 박정희 뒤통수 '확인사살' 했나
[연재] 5·16쿠데타 50년, 박정희 권력 평가 ①
[오마이뉴스] 김재홍 | 11.10.10 12:57 | 최종 업데이트 11.11.09 12:07
▲ 독재자 박정희.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어떤 시인은 4월이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더 잔인한 달은 10월인 것 같다. 우리 현대사를 보면 4월이나 10월은 대학가에 민주화 학생운동이 불붙는 시점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여 동안 토론과 함께 준비의 시간을 갖다가 마침내 폭발하는 것이다. 어두웠던 독재정권 시절을 살면서 우리가 숱하게 겪어 온 계절적 악순환이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1972년, 그 반독재 학생운동의 계절 한복판에 노골적인 독재정권을 세우는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그 1년 전인 1971년 10월 15일 전국 대학가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학생 간부 177명을 체포해 중앙정보부, 군 보안사, 경찰에서 고문 조사한 뒤 전원을 군대로 강제 입영시켰다. 대학에서 모두 제적 처분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학생운동 세력을 '소탕'한 뒤 박정희는 민주화운동의 계절 한복판에 거리낌 없이 유신 쿠데타를 감행했다. 5·16과 함께 두 번째 쿠데타였다.
민간법정이 아닌 군사법정에 선 김재규... 타당한가
그로부터 7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권총에 맞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10·26에 대해 김재규 자신은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계엄사 군사재판에서 '민주회복 혁명'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시 군사법정은 그에게 혁명을 일으킨 정치범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란 목적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정치범이나 단순 살인이라면 반드시 극형을 선고하지는 않는 게 상례다. 김재규는 "다수의 희생을 막기 위해 국민이 갈구하는 민주회복 혁명을 했다"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포로 된 장군 심정"이라고 군사법정을 비판했다.
10·26과 관련해 역사적으로 다시 따져 보아야 할 문제가 김재규를 민간 법정이 아니라 군사법정에 세운 것이 타당한지 여부다. 또 사형집행이 상례를 현저하게 벗어나 과도하고 신속하게 진행된 점, 특히 정치범에게 흔히 적용되는 감형이나 사면의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는 점이다.
첫째,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총을 쏜 10월 26일 당일 서울은 계엄령 상태가 아니었다. 부산 마산만 지역 계엄령이었으며 전국적으로 평상 상태였다. 계엄령은 10·26이 일어난 다음날 발동된다. 따라서 평상시에 발생한 10·26사건의 중심인물인 김재규는 헌법상 민간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를 계엄사 군사법정에 세운 것은 소급 적용으로 위헌이었다. 10·26사건 관련자들 중 군사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로 현역 대령인 박흥주 한 사람뿐이었다.
둘째, 김재규에 대한 재판이 대법원에서 확정된 것은 1980년 5월 20일이며, 그로부터 불과 나흘만인 5월 24일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는 전두환의 하나회 세력이 중심인 신군부가 5·18광주항쟁을 살상 진압하고 있을 때였다. 신군부는 5월 27일 광주의 전남도청에 발포, 점령함으로써 진압작전을 마무리했다. 이 격동의 와중에 신군부는 김재규를 처형함으로써 그가 정치범으로서 감형될 기회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왜 김재규는 박정희를 냉혹하게 확인사살 했나
▲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그날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쏜 총알은 딱 두 발이다. 첫 발은 가슴을 관통했으나 치명타가 아니었다. 재차 발사하려 했을 때 김재규의 콜트사 제품 권총은 찰칵 소리만 낼 뿐 불발이었다. 김재규는 고장난 권총을 들고 밖에 나가 박선호가 서 있자 그의 권총과 바꾸어 갖고 다시 방에 들어간다.
박정희는 모 대학 재학 중인 패션모델 정혜선(가명)양의 무릎에 상반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다가가 머리 뒤통수에 권총을 겨눴다. 군사법정 진술과 현장검증에서 확인한 바로는 50cm 이내의 거리였다. 정혜선은 비명을 지르며 실내 화장실로 튀어 들어 피신했고 동석했던 가수 손금자(가명)양은 밖으로 뛰쳐 나갔다. 김재규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최후의 일발을 가격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확인사살이었다.
김재규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박정희와 동향이고 육사 2기 동기생으로 군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핵심 자리를 맡길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 사이에 확인사살이란 인간적 환멸과 증오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김재규의 그런 감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옛말에 "소인은 혁면(革面)하고 군자는 표변(豹變)한다"고 했다. 혁면이란 얼굴, 즉 안면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변덕 부리는 사람을 소인이라 하고 그 변덕의 한 단면을 혁면이라고 묘사했다. 그에 비하면 군자는 말이 없고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한번 마음 먹으면 얼굴 표정 바꾸는 변덕에 그치지 않고 몸 전체를 돌려버리는데 그것이 '표변'에 해당한다.
박정희는 김재규가 자신의 속마음까지 잘 헤아려 주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내치지는 않았다. 일종의 변덕으로 신임을 거두어들이는 혁면이지 아예 인연을 끊어버리는 표변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김재규는 유신 이후 박정희의 무자비한 인권탄압과 함께 "미국 놈들 갈테면 가라고 해" 등의 반미 발언으로 국가안보 위기를 절감했다. 여기서 그는 박정희와의 관계에서 혁면에 그치지 않고 표변하기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박정희가 권력자로서 변덕과 주색에 빠진 사생활 문란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환멸을 느꼈고 그것이 그의 '야수'와 같은 표변을 불러 일으켰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술자리 여자를 구해오던, 그 시절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유신독재의 문제와 한미관계의 파탄을 주로 비판하면서 민주회복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비밀스런 마음 속 창고에는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에 대한 환멸감이 쌓여 있었다. 녹음테이프에 담긴 군사법정의 문답내용을 분석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것을 처음 감지한 사람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담당한 변호인이었다. 박선호 담당 변호인인 강신옥 변호사는 그의 사건 가담 동기와 그날의 행적 등을 정리하다가 처음부터 품었던 의문이 풀려감을 느꼈다. 유신체제의 핵심권력자들이 모인 술자리에 동석했다는 여인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바깥에서 술자리 여자를 구해 오는 '채홍사' 역할을 고정적으로 해야 할 만큼 박정희의 주색은 병들어 있었다.
▲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정희를 처형한 궁정동 현장. 박정희는 김재규 중정부장의 총탄에 죽었지만, 유신정권은 1970년대 내내 각종 위기상황을 겪어야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한 장면. ⓒ MBC
1979년 12월 11일 오후 계엄사 보통군법회의 제4회 공판.
강신옥 변호인 : "피고인이 관리하는 다섯 개의 연회장은 대통령이 혼자 사용하시거나 이번에 사건이 생겼을 때와 같이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정보부장, 이 네 사람이 연회를 가질 때 사용하는 장소라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 "네, 그렇습니다."
변호인 : "… 대통령이 혼자 오실 때는 '소행사'라고 말하고,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중정부장이 올 때는 '대행사'라고 한다는데…."
박선호 : "그렇습니다만, 그 행사 관계는 참고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박선호의 답변은 목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소리가 됐다. 무언가 꺼리는 말투가 역력했다. 강 변호사는 여기서 더 바싹 다그쳤다. 박정희의 부도덕성과 타락상이 부각될 수록 '10·26거사'는 그만한 명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호인 : "아까 검찰관 신문 시 얘기하다 말았는데 당일 몇 시 몇 분에 플라자 호텔에 간 일이 있죠?"
박선호 : "… 네."
변호인 : 거기에 간 것은 그 날 연회를 도와 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군사법정을 울린 김재규의 한 마디..."야, 그 얘긴 하지마!"
군사법정에 긴장이 흐르는 사이 작은 외침이 울려 나왔다.
"야, 그 얘긴 하지마!"
피고인석 맨 앞 줄에 앉아 있던 김재규가 박선호의 답변을 제지하기 위해 소리쳤다. 이에 박선호도 '양심선언'의 기회를 유보하는 태도를 보였다.
박선호 :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변호인 : "그날 플라자 호텔에서 내자 호텔로 간 것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박선호 : "…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변호인 : "피고인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여자 문제를 더 힘들게 하고, 피고인 자신이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괴로워서 김 정보부장에게 수차 '도저히 이 일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고 하소연 하면서 그만두게 해 달라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김 부장이 '궁정동 일은 자네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사의를 만류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 "제가 근무를 몇 번 꺼렸습니다. 그래서 하기 어렵다는 여러 가지 사유를 부장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신임하시고 자꾸 계속 근무를 원하셨습니다."
변호인 : "차 실장은 '돈을 얼마든지 줄 테니까 좋은 여자를 구해 달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돈을 한 푼도 도와주지 않고 하도 말만 많아서 피고인이 경호처장인 정인형한테 '그러면 당신이 골라서 해라'고 했다면서요? 그랬더니 '청와대에서 고른다는 걸 국민이 알게 되면 큰일 난다'며 안된다고 하기에 피고인은 '골라놓은 사람들에게 좋든 싫든 말이나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항의까지 했더니, 그 이후에는 차 실장도 잔소리가 적어졌다는데 그렇습니까?"
박선호 : "…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국가정보기관의 간부로서 대통령의 채홍사라는 오명까지 쓰게 된 박선호는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갔다. 이에 강신옥 변호사는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교도소 접견 때 이미 그에게서 확인한 대통령 박정희의 술과 여자 문제를 공개해 나갔다. <계속>
출처 청와대가 좋은 여자를..."야 그 얘기 하지마!"...김재규는 왜 박정희 뒤통수 '확인사살'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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