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박근혜 바로보기] ‘끝끝내 잘했다’고 하는 5·16과 유신
23년전 인터뷰 동영상에서 보여준 아버지 업적 옹호 지금도 변함 없어
[주간경향 995호] 김태훈 기자 | 2012 10/09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의 과거사 인식은 1988년과 2012년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 후보가 1989년 5월 MBC의 시사 프로그램 ‘박경재의 시사토론’(시사토론)에 출연해 대담한 내용의 일부를 담은 동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박 후보의 10월 유신과 5·16 쿠데타 관련 발언을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1990년 박 후보가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육영재단에서 펴낸 <박근혜 인터뷰집>에는 ‘박경재의 시사토론’을 비롯, 1988년과 1989년에 박 후보가 신문·방송·잡지 등에 나와 인터뷰한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다. 이 인터뷰집에는 짧은 동영상 편집본에는 나오지 않은 2시간가량의 인터뷰 전문을 포함해 박 후보의 인터뷰와 관련한 31편의 기사 및 칼럼이 실려 있다. ‘10·26사태 이후 10년만 의 최초 육성 증언’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989년 10월 박 전 대통령의 10주기 추도식을 전후해 박 후보가 이전까지의 침묵을 깨고 공개적인 행보를 시작함에 따라 나온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 박 전 대통령의 10월 유신과 5·16 쿠데타에 대해 박 후보가 언급한 부분이다. 당시 박 후보는 5·16과 유신이 없었다면 북한이 한반도를 공산화해 남한이 존재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럼 5·16이 없다, 더 나아가 유신이 없다고 할 때 과연 그 5·16을 비판하고 매도까지 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데리고 사는 이 땅이, 이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나라가 없어지는 판인데 민주주의를 중단시켰다는 이야기가 어떻게 나올 수가 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시사토론’ 중)
과거 시사프로그램 출연 동영상 화제
박 후보가 당시 유신을 옹호하는 논리는 1972년 유신헌법을 통과시킬 무렵 국제적인 냉전체제에 해빙기가 오면서 미국이 주둔군을 감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데서 출발한다. 냉전이 완화되는 정세 속에서도 북한과 공산권의 군사적 위협은 상존하고 있기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은 “국운을 좌지우지할 중차대한 주변 정세에서 난국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국민일보> 1989년 10월 22일자 중)인 유신을 단행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유신과 자주국방은 떼려야 뗄 수가 없어요. 아버지는 유신을 통해… 자주국방을 달성하려고 하셨던 것이고, 그런 계획이 차질없이 수행되려면 사회적으로 안정이 유지돼야 하고, 사회적인 안정이 유지되려면 강력한 지도체제가 불가피했기 때문에 유신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고 하셨던 것으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시사토론’ 중)
당시 ‘시사토론’에서 박 후보와 대담을 진행했던 박경재 변호사는 날선 질문을 던지며 박 후보가 아버지를 변호하는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박 변호사는 박 후보와의 대담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처음으로 방송 인터뷰에 나왔으니 대강 어느 정도는 답변을 미리 준비했겠지만, (내가) 방송을 진행하면서 대본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주로 애드리브로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박 후보가 평소에 생각하던 본심이 그대로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후보의 ‘본심을 드러낸’ 유신에 대한 옹호는 “(유신이) 그동안 매도됐던 큰 이유는 정치적 이유 때문, 옳다 그르다를 객관적으로 따지지 않고 나쁜 쪽으로만 몰아가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 1989년 12월호)이라는 식의 정치적 의혹 공세로까지 이어졌다. 1989년 박 전 대통령의 10주기 추도식이 있기 전까지 박 후보는 공식적인 추모행사를 열지 못했다고 밝혔다. 전두환 정권은 직전 정권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방침을 펴면서 유신의 흔적을 씻어내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박 후보가 느낀 피해자로서의 인식이 아버지의 행적에 대한 무조건적 옹호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아버지는 자주국방 달성하려 유신 단행”
박 후보는 ‘시사토론’에서 5공 시절의 사회적 분위기를 두고 “10년 동안 왜곡 일변도로 아버지와 아버지가 하신 일을 그저 깎아내리는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만 봐가지고 온통 국민이 아버지를 독재자로서 미워하고 계신데…”라고 말하며 정권의 일방적인 매도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이 폄하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박 전 대통령이 10·26으로 서거하지 않았다면 민주적으로 정권을 이양했을 것이라면서, ‘설령 정권을 이양했더라도 퇴임 후 국민들이 독재의 과오를 그냥 두진 않았을 수 있다’는 대담자의 발언에 대해선 “그렇게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서 일하고 나오신 아버지께, 우리 국민이 그렇게 악인들이에요? 왜 그렇게 저항을 하고 그래요?”라고 답하기도 했다.
박 후보는 과거 박정희 정권에서 중책을 맡았던 인물들이 1987년 직선제 개헌을 맞아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도 유신을 옹호하는 것을 주저하는 데 대해서도 불만이 컸다. 신민주공화당은 60·70년대의 민주공화당을 계승한다고 밝히며 김종필 총재는 “나는 유신잔당이 아니라 유신본당”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 후보는 1989년 1월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그분들이 자기는 이러저러한 소신을 갖고 유신에 참여했다고 정론을 폈더라면 오늘날 유신이 이렇게까지 매도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한편,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는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해요. 정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했던 사람이라면…”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 후보는 “그들이 서로 발뺌을 하고 용기를 못 내는 바람에 지금 와서는 유신이 무슨 커다란 범죄처럼 돼버렸다”며 “당시 유신은 국가사업의 근간을 이루는 이념이며 철학”이었다고 말했다.
그에 비해 박 전 대통령의 과거 행적을 방어하는 논리는 일방적이었다. 박 후보는 ‘5·16 쿠데타가 이후 신군부의 정권 찬탈의 빌미를 만들었다’는 비판을 완강하게 부정했다. 그는 ‘시사토론’에서 “5·16이 말하자면 구국의 혁명”이라면서 군인이 총을 들고 헌정을 중단시킨 점에서 신군부의 정권 찬탈도 5·16과 다르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 “그런 어거지 논리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버지가 하신 것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어거지로 갖다 붙인 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통해 ‘사법살인’을 자행했다는 비판에 대해 최근 박 후보가 “두 개의 판결이 존재한다”고 발언한 것처럼 박 후보에게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인명을 가볍게 보시고 할 분은 절대 아니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사건에 관해서도 박 후보는 박 전 대통령이 “(김형욱씨가) 북쪽하고 연결이 되어서 돈도 많이 받고 또 (남한을) 비난하는 글을 썼는데, 북한 쪽에서는 자기들의 목적은 달성됐고 잘못하면 탄로가 나니까 그 목적을 이룬 후에는 어떻게 한 거 아니겠느냐”는 ‘추측’을 얘기해줬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선 박 전 대통령 생전부터 실종 혹은 암살의 배후에 청와대와 중앙정보부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돠어 왔다.
5·16이 신군부쿠데타 빌미 ‘완강 부정’
박 후보의 주장처럼 냉전의 완화가 한반도 위기를 불러왔고, 유신은 이 위기에 대비한 것이란 견해에 대해 학자들은 의견을 달리했다. 박 후보가 당시의 정치상황을 무리하게 해석한다는 지적이다. 1971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주한미군 감축은 남북간 긴장을 조성한 원인이기보다는 박 전 대통령이 1969년 3선개헌을 강행하며 미국의 민주화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결과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손호철 교수는 “1972년 유신헌법 개정 4개월 전 남북이 합의해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은 냉전시대로선 획기적인 평화 제스처였다. 박 전 대통령이 유신을 앞두고 가장 크게 홍보했던 내용은 자주국방이나 자립경제와 같은 내용이 아니라 통일문제였다. 이전까지 북한과의 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조장해 여론을 틀어쥐고 있던 정권은 유신을 앞두고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 개헌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민 여론을 조종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출처 : [특집| 박근혜 바로보기] ‘끝끝내 잘했다’고 하는 5·16과 유신
23년전 인터뷰 동영상에서 보여준 아버지 업적 옹호 지금도 변함 없어
[주간경향 995호] 김태훈 기자 | 2012 10/09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의 과거사 인식은 1988년과 2012년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 후보가 1989년 5월 MBC의 시사 프로그램 ‘박경재의 시사토론’(시사토론)에 출연해 대담한 내용의 일부를 담은 동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박 후보의 10월 유신과 5·16 쿠데타 관련 발언을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1990년 박 후보가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육영재단에서 펴낸 <박근혜 인터뷰집>에는 ‘박경재의 시사토론’을 비롯, 1988년과 1989년에 박 후보가 신문·방송·잡지 등에 나와 인터뷰한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다. 이 인터뷰집에는 짧은 동영상 편집본에는 나오지 않은 2시간가량의 인터뷰 전문을 포함해 박 후보의 인터뷰와 관련한 31편의 기사 및 칼럼이 실려 있다. ‘10·26사태 이후 10년만 의 최초 육성 증언’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989년 10월 박 전 대통령의 10주기 추도식을 전후해 박 후보가 이전까지의 침묵을 깨고 공개적인 행보를 시작함에 따라 나온 것이다.
▲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제 33차 세계여성단체협의회 세계총회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 박민규 기자 |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 박 전 대통령의 10월 유신과 5·16 쿠데타에 대해 박 후보가 언급한 부분이다. 당시 박 후보는 5·16과 유신이 없었다면 북한이 한반도를 공산화해 남한이 존재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럼 5·16이 없다, 더 나아가 유신이 없다고 할 때 과연 그 5·16을 비판하고 매도까지 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데리고 사는 이 땅이, 이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나라가 없어지는 판인데 민주주의를 중단시켰다는 이야기가 어떻게 나올 수가 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시사토론’ 중)
과거 시사프로그램 출연 동영상 화제
박 후보가 당시 유신을 옹호하는 논리는 1972년 유신헌법을 통과시킬 무렵 국제적인 냉전체제에 해빙기가 오면서 미국이 주둔군을 감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데서 출발한다. 냉전이 완화되는 정세 속에서도 북한과 공산권의 군사적 위협은 상존하고 있기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은 “국운을 좌지우지할 중차대한 주변 정세에서 난국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국민일보> 1989년 10월 22일자 중)인 유신을 단행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유신과 자주국방은 떼려야 뗄 수가 없어요. 아버지는 유신을 통해… 자주국방을 달성하려고 하셨던 것이고, 그런 계획이 차질없이 수행되려면 사회적으로 안정이 유지돼야 하고, 사회적인 안정이 유지되려면 강력한 지도체제가 불가피했기 때문에 유신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고 하셨던 것으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시사토론’ 중)
당시 ‘시사토론’에서 박 후보와 대담을 진행했던 박경재 변호사는 날선 질문을 던지며 박 후보가 아버지를 변호하는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박 변호사는 박 후보와의 대담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처음으로 방송 인터뷰에 나왔으니 대강 어느 정도는 답변을 미리 준비했겠지만, (내가) 방송을 진행하면서 대본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주로 애드리브로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박 후보가 평소에 생각하던 본심이 그대로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1989년 MBC ‘박경재의 시사토론’에 출연한 박근혜 후보의 모습. | 박근혜 인터뷰집 |
박 후보의 ‘본심을 드러낸’ 유신에 대한 옹호는 “(유신이) 그동안 매도됐던 큰 이유는 정치적 이유 때문, 옳다 그르다를 객관적으로 따지지 않고 나쁜 쪽으로만 몰아가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 1989년 12월호)이라는 식의 정치적 의혹 공세로까지 이어졌다. 1989년 박 전 대통령의 10주기 추도식이 있기 전까지 박 후보는 공식적인 추모행사를 열지 못했다고 밝혔다. 전두환 정권은 직전 정권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방침을 펴면서 유신의 흔적을 씻어내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박 후보가 느낀 피해자로서의 인식이 아버지의 행적에 대한 무조건적 옹호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아버지는 자주국방 달성하려 유신 단행”
박 후보는 ‘시사토론’에서 5공 시절의 사회적 분위기를 두고 “10년 동안 왜곡 일변도로 아버지와 아버지가 하신 일을 그저 깎아내리는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만 봐가지고 온통 국민이 아버지를 독재자로서 미워하고 계신데…”라고 말하며 정권의 일방적인 매도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이 폄하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박 전 대통령이 10·26으로 서거하지 않았다면 민주적으로 정권을 이양했을 것이라면서, ‘설령 정권을 이양했더라도 퇴임 후 국민들이 독재의 과오를 그냥 두진 않았을 수 있다’는 대담자의 발언에 대해선 “그렇게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서 일하고 나오신 아버지께, 우리 국민이 그렇게 악인들이에요? 왜 그렇게 저항을 하고 그래요?”라고 답하기도 했다.
박 후보는 과거 박정희 정권에서 중책을 맡았던 인물들이 1987년 직선제 개헌을 맞아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도 유신을 옹호하는 것을 주저하는 데 대해서도 불만이 컸다. 신민주공화당은 60·70년대의 민주공화당을 계승한다고 밝히며 김종필 총재는 “나는 유신잔당이 아니라 유신본당”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 후보는 1989년 1월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그분들이 자기는 이러저러한 소신을 갖고 유신에 참여했다고 정론을 폈더라면 오늘날 유신이 이렇게까지 매도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한편,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는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해요. 정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했던 사람이라면…”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 후보는 “그들이 서로 발뺌을 하고 용기를 못 내는 바람에 지금 와서는 유신이 무슨 커다란 범죄처럼 돼버렸다”며 “당시 유신은 국가사업의 근간을 이루는 이념이며 철학”이었다고 말했다.
그에 비해 박 전 대통령의 과거 행적을 방어하는 논리는 일방적이었다. 박 후보는 ‘5·16 쿠데타가 이후 신군부의 정권 찬탈의 빌미를 만들었다’는 비판을 완강하게 부정했다. 그는 ‘시사토론’에서 “5·16이 말하자면 구국의 혁명”이라면서 군인이 총을 들고 헌정을 중단시킨 점에서 신군부의 정권 찬탈도 5·16과 다르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 “그런 어거지 논리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버지가 하신 것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어거지로 갖다 붙인 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 박근혜 후보가 박정희 전 대통령 생전에 함께 찍은 사진. | 박근혜 인터뷰집 |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통해 ‘사법살인’을 자행했다는 비판에 대해 최근 박 후보가 “두 개의 판결이 존재한다”고 발언한 것처럼 박 후보에게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인명을 가볍게 보시고 할 분은 절대 아니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사건에 관해서도 박 후보는 박 전 대통령이 “(김형욱씨가) 북쪽하고 연결이 되어서 돈도 많이 받고 또 (남한을) 비난하는 글을 썼는데, 북한 쪽에서는 자기들의 목적은 달성됐고 잘못하면 탄로가 나니까 그 목적을 이룬 후에는 어떻게 한 거 아니겠느냐”는 ‘추측’을 얘기해줬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선 박 전 대통령 생전부터 실종 혹은 암살의 배후에 청와대와 중앙정보부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돠어 왔다.
5·16이 신군부쿠데타 빌미 ‘완강 부정’
박 후보의 주장처럼 냉전의 완화가 한반도 위기를 불러왔고, 유신은 이 위기에 대비한 것이란 견해에 대해 학자들은 의견을 달리했다. 박 후보가 당시의 정치상황을 무리하게 해석한다는 지적이다. 1971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주한미군 감축은 남북간 긴장을 조성한 원인이기보다는 박 전 대통령이 1969년 3선개헌을 강행하며 미국의 민주화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결과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손호철 교수는 “1972년 유신헌법 개정 4개월 전 남북이 합의해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은 냉전시대로선 획기적인 평화 제스처였다. 박 전 대통령이 유신을 앞두고 가장 크게 홍보했던 내용은 자주국방이나 자립경제와 같은 내용이 아니라 통일문제였다. 이전까지 북한과의 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조장해 여론을 틀어쥐고 있던 정권은 유신을 앞두고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 개헌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민 여론을 조종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출처 : [특집| 박근혜 바로보기] ‘끝끝내 잘했다’고 하는 5·16과 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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