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 전에도 한성호 침몰…요번맹키로 눈뜨고 바라만 봤제”
“해경은 허대기만 허댔지 생존자 구조는 어민들이 했어
그러고도 못 구한 애들 떠올라 술 있어야 잠을 잔다더만”
[한겨레] 진도/최성진 기자 | 등록 : 2014.05.12 01:46 | 수정 : 2014.05.12 08:31
“아이고 징해부러. 헬리콥터가 만날 지붕 위로 왱왱 날아다니니 정신없어서 못 살 것소.”
진도군 조도면 주민 이왕욱(56)씨가 들어서자 아침 공기가 착 가라앉은 ‘바다슈퍼’에 금세 활력이 감돌았다. 이씨는 한바탕 너스레를 떨고는 물을 찾았다. 텔레비전으로 아침 뉴스를 보던 바다슈퍼의 안주인 손충화(66)씨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건네며 이씨를 다독였다. 뉴스는 세월호 침몰사고의 사망자와 실종자 숫자를 전하고 있다. 실종자가 주는 만큼 사망자가 늘 뿐이다.
“그래도 지금은 쬐까 안 나아졌소. 사고 처음에는 더 정신없었제.”
“그게 아니라 해산물을 통 못 팔아묵으니까, 조도 사람은 아주 죽을 맛이어요. 여객선도 제때 안 다니니 섬 아짐들 병원도 못 나와불고, 나도 지금 조도 들어가야 허는디 이러고 안 있소.”
“아자씨는 조도 어디여?”
손씨의 남편 김봉석(69)씨가 끼어들었다. 바다슈퍼가 터 잡고 있는 곳은 진도 임회면 서망항 주차장 바로 앞이다. 서망항을 오가며 어업과 수산물 유통업 등으로 밥을 버는 진도군민한테 바다슈퍼는 요긴한 쉼터다. 항구를 통해 드나드는 어민은 배에서 타고 내릴 때마다 바다슈퍼에 들러 간단한 음식을 안주 삼아 술 한잔씩 걸치곤 했다. 조도에서 톳 양식업을 하는 이씨는 바다슈퍼의 단골손님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가 물을 한 모금 넘긴 뒤 대답했다.
“창리요. 파출소 옆집이어요. 우리 조도 주민은 지금 피해가 말도 못해요. 조도, 관매도 해서 보통 하루 관광객이 버스로 기본 10대씩은 들어오는데, 다 취소돼불고 한 명도 없어요. ‘워째 좀 견딜 만헌가’ 하고 물어보면, 다들 ‘아이고 죽겠습니다’ 그런다니까요.”
“지금 여기 놀러 못 오제. 자식 키우는 사람같으면 올 수가 없제.”
손씨가 다시 이씨를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쉰다. 손씨의 눈빛에 동병상련의 측은함이 담겨 있다. 30분 남짓 바다슈퍼 의자에 주질러앉아 신세한탄을 하던 이씨가 조도로 가는 행정선을 타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그사이 바다슈퍼에 물건을 대는 트럭이 도착했다. 얼굴에 아직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는 청년이 나타나 담배 에쎄 체인지를 찾았다. 손씨가 “에쎄… 뭐?”라고 반문하며 어디론가 물건을 찾아 사라졌다. 5일 오전 8시30분께, ‘서쪽을 바라보는 항구’ 서망항은 이렇게 아침을 열었다.
1700여가구, 3200여명의 주민이 사는 진도군 조도면은 본섬인 하조도를 비롯해 관매도와 대마도, 맹골도, 동·서거차도 등 150여개(무인도 119개 포함)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져 있다. 주민의 대다수가 김·미역·톳 등 해조류를 양식하거나 꽃게·멸치·전복 따위를 잡아 생계를 꾸려간다. 관매도 등을 찾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민박을 치거나 식당을 하는 집도 여럿이다.
세월호는 지난달 16일 오전 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늘어선 맹골도와 서거차도, 대마도, 관매도, 병풍도의 가운데 지점을 지나다 중심을 잃고 기울다 뒤집어져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사고 현장으로 가장 먼저 달려간 이들은 김현호(47)·김준석(40)씨 등 관매도나 대마도 어민이다. 대마도에 사는 김현호씨는 1t짜리 어장관리용 소형 어선을 이끌고 현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가장 많은 생존자를 구해낸 것으로 알려졌다. 각각 약 250명, 1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관매도와 대마도는 사고 해역을 감싼 5개 섬 가운데 그나마 인구가 많은 축에 속했다.
5일 오전 9시 서망항을 떠나 조도 창유항으로 향하던 진도군 행정선 ‘진도아리랑’호에서 이왕욱씨를 다시 만났다. 이씨의 말에 진도아리랑호를 몰던 조도면사무소 소속 김아무개 기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 기관장은 “진도 브이티에스(VTS·해상교통관제센터)에서 사고 소식을 전하는 무전을 받고 달려가봤더니 이미 어민들이 도착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승객 구조는 작은 어선들이 다 했지, 우리는 한 게 없다”고 덧붙였다. 조도면 어민이 구한 생존자는 50명에 가깝다는 게 이씨와 김씨의 설명이다. 날렵한 모습의 진도아리랑호는 출항 15분 만에 창유항에 닿았다.
조도면 주민은 세월호가 바닷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춘 뒤, 실종자 수색과 세월호에서 흘러나온 기름 제거 작업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들한테 세월호 사고는 남의 일이 아니다.
“왜 또 그 뼈아픈 기억을 물어봐.”
7일 저녁 김유기(69) 대마도 대마리 마을이장은 ‘한성호 침몰 사고’에 대해 묻자 소스라쳤다.
쓰디쓴 소주를 목구멍에 털어넣은 김유기 이장은 한성호 사고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사고가 난 1973년, 김 이장은 스물여덟의 청년이었다. 평생을 대마도에서 살아온 그한테 한성호 사고는 “운명을 완전히 바까놓은”, 잊을래야 잊혀지지 않는 참사다.
“그때 나는 우리 대마도 청년회랑 마을 식수난 해결한다고 우물 파다가 그 소식을 들었잖여. 곧바로 곡괭이고 삽이고 다 처박고 완전히 실신이 돼갖고 달려갔지. 우리 쬐깐한 대마도 부락에서 사람이 23명이나 수몰돼버렸응께 오죽하겄어.”
40여년이 지났는데도 김 이장의 기억은 생생했다.
대마도의 이웃 섬 관매도에서 방 다섯개짜리 ‘송림민박’을 혼자 운영하는 장영자(81)씨는 15년째 이명과 갑상선 기능저하, 각종 관절 통증 등으로 고생하고 있다. 5일 늦은 오후 아무도 없는 빈 민박집에서 옛일을 떠올리던 장씨는 “내가 원래 기억이 좋은 사람이여. 그란데 여기저기 수술한다고 전신마취를 7번이나 했더니 정신이 그전보다 없구마잉”이라며 웃었다. 흐릿해진 옛 기억 가운데 유독 ‘또록또록’ 남아 있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관매도 사람 많이 죽었어. 저그 윗집 살던 아줌마가 쌀장시를 했어. 대목잉께 쌀 판다고 애기랑 남편이랑 목포 갔다오다 다 죽어불고, 저쪽에도 아가씨가 하나 죽고, 아짐도 죽고, 쬐깐한 국민학생 여럿 죽고… 죽은 사람이 열에 가찹네.”
장씨는 유일한 민박 손님을 위해 저녁상을 봐주며 틈틈이 한성호와 세월호 선장을 싸잡아 욕했다. 한성호 사고 이후 정부는 선장 김씨와 매표원 이아무개씨, 목포해운국 소속 임검관 조아무개씨 등 7명을 구속했다. 모두 선박회사 쪽 관계자이거나 하급 공무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과했다는 기록은 없다. 구속된 해운국 임검관 3명 가운데 한명이 장씨의 제부(여동생의 남편)다. 직접 담근 쑥 막걸리 한사발을 권하며 장씨가 말했다.
“우리 제부는 원래 그날 임검(현장단속) 나갈 차례가 아니었는데, 하필 그날 누가 근무를 바까달래서 나갔다가 그래돼불었어. 그 일로 모가지 날아가불고, 부잣집에 시집간다고 좋아한 우리 동생만 고생 많이 했제.”
세월호 침몰과 관련한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는 10일 조도면 어민을 대상으로 한 피해보상 대책을 일부 내놓았다. 세월호에서 흘러나온 기름 제거 작업에 참여한 어민한테 방제비를 먼저 지급하겠다는 내용이다. 대책본부는 어민들이 이번 사고로 입은 피해를 추가로 파악해 보상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진도군청에서도 어업이나 수산물 유통업, 숙박업 등에 종사하는 주민의 직간접적 피해를 파악하고 있다. 지난 6일 오후, ‘빠마하러’ 육지 나갈 채비를 하던 송림민박 주인 장씨는 피해보상 이야기가 나오자 시큰둥하게 말했다.
“징헌 일이제. (한성호 사고 때) 죽은 사람 보상금은 50만원씩 나왔는데, 사람이 죽어분께 불쌍한 거지 돈이 문제겠능가. 돈 욕심은 내서 뭐해. 어제 우리 집에 기자가 왔다니까 아랫집 여자는 와서 ‘신문에 내서 보상해주라 하지’ 하길래, 내가 ‘옳지 않은 소리도 한다’고 했어. 지금 나라에 무식한 말로 ‘난’이 일어부렀는데, 돈이고 뭐시고 장사 쪼까 못하면 어때.”
5일 오전 조도면 창유항에서 헤어진 이씨의 말도 그랬다.
이씨가 왼손을 들어 먼바다를 가리켰다. 세월호 사고 지점이 아득했다.
출처 : “41년 전에도 한성호 침몰…요번맹키로 눈뜨고 바라만 봤제”
“해경은 허대기만 허댔지 생존자 구조는 어민들이 했어
그러고도 못 구한 애들 떠올라 술 있어야 잠을 잔다더만”
[한겨레] 진도/최성진 기자 | 등록 : 2014.05.12 01:46 | 수정 : 2014.05.12 08:31
▲ 5일 오후 전남 진도군 임회면 서망항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세월호 침몰 해역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름을 닦고 있다. 진도군 조도면 관매도·대마도 등의 어민들은 세월호 침몰 때 가장 먼저 어선을 몰고 와 가장 많은 승객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월호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삶터인 어장을 망가뜨리고 있지만, 이들은 군말 한마디 없이 기름 제거 작업과 실종자 찾기에 열심이다. 진도/최성진 기자 |
“아이고 징해부러. 헬리콥터가 만날 지붕 위로 왱왱 날아다니니 정신없어서 못 살 것소.”
진도군 조도면 주민 이왕욱(56)씨가 들어서자 아침 공기가 착 가라앉은 ‘바다슈퍼’에 금세 활력이 감돌았다. 이씨는 한바탕 너스레를 떨고는 물을 찾았다. 텔레비전으로 아침 뉴스를 보던 바다슈퍼의 안주인 손충화(66)씨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건네며 이씨를 다독였다. 뉴스는 세월호 침몰사고의 사망자와 실종자 숫자를 전하고 있다. 실종자가 주는 만큼 사망자가 늘 뿐이다.
“그래도 지금은 쬐까 안 나아졌소. 사고 처음에는 더 정신없었제.”
“그게 아니라 해산물을 통 못 팔아묵으니까, 조도 사람은 아주 죽을 맛이어요. 여객선도 제때 안 다니니 섬 아짐들 병원도 못 나와불고, 나도 지금 조도 들어가야 허는디 이러고 안 있소.”
“아자씨는 조도 어디여?”
손씨의 남편 김봉석(69)씨가 끼어들었다. 바다슈퍼가 터 잡고 있는 곳은 진도 임회면 서망항 주차장 바로 앞이다. 서망항을 오가며 어업과 수산물 유통업 등으로 밥을 버는 진도군민한테 바다슈퍼는 요긴한 쉼터다. 항구를 통해 드나드는 어민은 배에서 타고 내릴 때마다 바다슈퍼에 들러 간단한 음식을 안주 삼아 술 한잔씩 걸치곤 했다. 조도에서 톳 양식업을 하는 이씨는 바다슈퍼의 단골손님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가 물을 한 모금 넘긴 뒤 대답했다.
“창리요. 파출소 옆집이어요. 우리 조도 주민은 지금 피해가 말도 못해요. 조도, 관매도 해서 보통 하루 관광객이 버스로 기본 10대씩은 들어오는데, 다 취소돼불고 한 명도 없어요. ‘워째 좀 견딜 만헌가’ 하고 물어보면, 다들 ‘아이고 죽겠습니다’ 그런다니까요.”
“지금 여기 놀러 못 오제. 자식 키우는 사람같으면 올 수가 없제.”
손씨가 다시 이씨를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쉰다. 손씨의 눈빛에 동병상련의 측은함이 담겨 있다. 30분 남짓 바다슈퍼 의자에 주질러앉아 신세한탄을 하던 이씨가 조도로 가는 행정선을 타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그사이 바다슈퍼에 물건을 대는 트럭이 도착했다. 얼굴에 아직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는 청년이 나타나 담배 에쎄 체인지를 찾았다. 손씨가 “에쎄… 뭐?”라고 반문하며 어디론가 물건을 찾아 사라졌다. 5일 오전 8시30분께, ‘서쪽을 바라보는 항구’ 서망항은 이렇게 아침을 열었다.
1700여가구, 3200여명의 주민이 사는 진도군 조도면은 본섬인 하조도를 비롯해 관매도와 대마도, 맹골도, 동·서거차도 등 150여개(무인도 119개 포함)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져 있다. 주민의 대다수가 김·미역·톳 등 해조류를 양식하거나 꽃게·멸치·전복 따위를 잡아 생계를 꾸려간다. 관매도 등을 찾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민박을 치거나 식당을 하는 집도 여럿이다.
▲ 5일 오후 전남 진도군 임회면 서망항에 있는 수협 위탁판매장. 여느 때 같으면 꽃게철이라 손님이 북적여야 하는데, 세월호 사고의 여파로 한산하다. 진도/최성진 기자 |
세월호는 지난달 16일 오전 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늘어선 맹골도와 서거차도, 대마도, 관매도, 병풍도의 가운데 지점을 지나다 중심을 잃고 기울다 뒤집어져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사고 현장으로 가장 먼저 달려간 이들은 김현호(47)·김준석(40)씨 등 관매도나 대마도 어민이다. 대마도에 사는 김현호씨는 1t짜리 어장관리용 소형 어선을 이끌고 현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가장 많은 생존자를 구해낸 것으로 알려졌다. 각각 약 250명, 1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관매도와 대마도는 사고 해역을 감싼 5개 섬 가운데 그나마 인구가 많은 축에 속했다.
“해경은 허대기만 허댔지 생존자 구조는 갸들(김현호·김준석씨 등)이 다 했어. 조도에서 멸치잡이 하는 어민은 애기 때부터 부모 따라다니며 배를 몰아온 사람들이라 바다에서는 거의 도사급이제. (김)현호 갸가 배 모는 거 보면 완전히 기가 막혀부러.”
5일 오전 9시 서망항을 떠나 조도 창유항으로 향하던 진도군 행정선 ‘진도아리랑’호에서 이왕욱씨를 다시 만났다. 이씨의 말에 진도아리랑호를 몰던 조도면사무소 소속 김아무개 기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 기관장은 “진도 브이티에스(VTS·해상교통관제센터)에서 사고 소식을 전하는 무전을 받고 달려가봤더니 이미 어민들이 도착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승객 구조는 작은 어선들이 다 했지, 우리는 한 게 없다”고 덧붙였다. 조도면 어민이 구한 생존자는 50명에 가깝다는 게 이씨와 김씨의 설명이다. 날렵한 모습의 진도아리랑호는 출항 15분 만에 창유항에 닿았다.
조도면 주민은 세월호가 바닷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춘 뒤, 실종자 수색과 세월호에서 흘러나온 기름 제거 작업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들한테 세월호 사고는 남의 일이 아니다.
“왜 또 그 뼈아픈 기억을 물어봐.”
7일 저녁 김유기(69) 대마도 대마리 마을이장은 ‘한성호 침몰 사고’에 대해 묻자 소스라쳤다.
세월호 이전에 조도 앞바다에서는 또다른 정기 여객선 한 척이 침몰했다. 전남 목포와 조도를 오가던 68t급 정기 여객선 한성호다. 세월호가 관매도와 대마도 바로 남쪽에서 사고를 당했다면, 한성호는 거의 비슷한 거리의 북쪽에서 침몰했다. 1973년 1월25일 오후 2시30분께 벌어진 사고다.
그날 한성호는 설 연휴를 앞두고 목포를 떠나 조도로 향했다. 진도군 지산면 심동리 세포부락을 500m 앞둔 지점에서 세찬 파도가 한성호를 덮쳤다. 파도를 맞고 기울어진 한성호는 다시는 중심을 잡지 못했다. 109명의 승선자와 한성호가 그렇게 침몰했다. 이 사고로 죽거나 사라진 희생자가 모두 61명이다. 대부분 명절을 쇠러 진도로 돌아오던 관매도, 대마도 등 조도면 주민이다. 두 섬에서만 30여명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희생자의 상당수는 관매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등에 다니는 어린이다.
“그때도 과적이여 과적! 아주 똑같아, 이번 사고랑.”
쓰디쓴 소주를 목구멍에 털어넣은 김유기 이장은 한성호 사고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사고가 난 1973년, 김 이장은 스물여덟의 청년이었다. 평생을 대마도에서 살아온 그한테 한성호 사고는 “운명을 완전히 바까놓은”, 잊을래야 잊혀지지 않는 참사다.
“그때 나는 우리 대마도 청년회랑 마을 식수난 해결한다고 우물 파다가 그 소식을 들었잖여. 곧바로 곡괭이고 삽이고 다 처박고 완전히 실신이 돼갖고 달려갔지. 우리 쬐깐한 대마도 부락에서 사람이 23명이나 수몰돼버렸응께 오죽하겄어.”
김 이장은 한성호 사고로 장인과 처조카를 잃었다. 마을 주민 처지에서 더 기가 막히는 일은 육지 코앞에서 배가 가라앉았는데도 갇힌 승객을 단 한 명도 건져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사고 직후 당시 박정희 정부는 경찰 등을 중심으로 구조작업반을 꾸렸으나, 침몰 직후 숨진 채 발견된 19명을 뺀 나머지 실종자 42명 가운데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 정부는 정확한 승선자 숫자도 파악하지 못해 연일 허둥댔다. ‘무능한 정부’는 참사와 함께 쓰이는 관용어인가.
“나중에는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서 하루 평균 서네 명씩 죽은 사람 장례를 치르는데, 시체도 못 건졌응께 시신 없는 엉뚱한 장례를 치른 거야. 그때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정도가 아니라 숨이 넘어갈 일이제.”
40여년이 지났는데도 김 이장의 기억은 생생했다.
대마도의 이웃 섬 관매도에서 방 다섯개짜리 ‘송림민박’을 혼자 운영하는 장영자(81)씨는 15년째 이명과 갑상선 기능저하, 각종 관절 통증 등으로 고생하고 있다. 5일 늦은 오후 아무도 없는 빈 민박집에서 옛일을 떠올리던 장씨는 “내가 원래 기억이 좋은 사람이여. 그란데 여기저기 수술한다고 전신마취를 7번이나 했더니 정신이 그전보다 없구마잉”이라며 웃었다. 흐릿해진 옛 기억 가운데 유독 ‘또록또록’ 남아 있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관매도 사람 많이 죽었어. 저그 윗집 살던 아줌마가 쌀장시를 했어. 대목잉께 쌀 판다고 애기랑 남편이랑 목포 갔다오다 다 죽어불고, 저쪽에도 아가씨가 하나 죽고, 아짐도 죽고, 쬐깐한 국민학생 여럿 죽고… 죽은 사람이 열에 가찹네.”
한성호는 목포에서 출발할 때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다. 먼저 과적이다. 사고 당일, 폭풍주의보로 이틀 동안 발이 묶여 있던 한성호는 파도가 가라앉지 않았는데도 출항을 감행했다. 여기에 밀린 승객과 명절 화물까지 무리하게 실었으니 사고 위험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선박회사 ‘한일기선’은 출항 전 관리·감독기관인 목포지방해운국에 승선자를 66명이라고 신고했지만, 실제로 배에 탄 사람은 모두 136명이었다. 한성호의 정원은 86명이었다. 소주 125상자와 보리 50가마, 공사용 목재, 시멘트 등 각종 화물을 적정량(6t)보다 훨씬 많이 실은 사실이 경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한성호는 침몰 지점인 조도 앞바다에 도착하기 전, 마산도와 율도 등 중간 기항지에 일부 승객을 내려줬으나 여전히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뚱거렸다.
문제는 또 있었다. 선박회사는 파도가 들이치는 갑판 위로 승객이 올라오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선실문을 밖에서 잠갔고, 구명장비를 벽장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자격도 없는 갑판원한테 배의 키를 맡겨 사고의 빌미를 제공한 선장 김아무개씨는 배에 물이 차기 시작하자 승객을 버린 채 먼저 탈출했다. 1973년 한성호 이야기다.
“배질도 못하는 넘들이 선장질을 왜 혀서 사람을 죽여부냐고. 배가 침몰당해불면 사람을 먼저 내보내야 살 건데, 요번맹키로 문을 잠가버렸당께. 그랑께 그 안에 갇혀 다 죽어버렸제.”
장씨는 유일한 민박 손님을 위해 저녁상을 봐주며 틈틈이 한성호와 세월호 선장을 싸잡아 욕했다. 한성호 사고 이후 정부는 선장 김씨와 매표원 이아무개씨, 목포해운국 소속 임검관 조아무개씨 등 7명을 구속했다. 모두 선박회사 쪽 관계자이거나 하급 공무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과했다는 기록은 없다. 구속된 해운국 임검관 3명 가운데 한명이 장씨의 제부(여동생의 남편)다. 직접 담근 쑥 막걸리 한사발을 권하며 장씨가 말했다.
“우리 제부는 원래 그날 임검(현장단속) 나갈 차례가 아니었는데, 하필 그날 누가 근무를 바까달래서 나갔다가 그래돼불었어. 그 일로 모가지 날아가불고, 부잣집에 시집간다고 좋아한 우리 동생만 고생 많이 했제.”
세월호 침몰과 관련한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는 10일 조도면 어민을 대상으로 한 피해보상 대책을 일부 내놓았다. 세월호에서 흘러나온 기름 제거 작업에 참여한 어민한테 방제비를 먼저 지급하겠다는 내용이다. 대책본부는 어민들이 이번 사고로 입은 피해를 추가로 파악해 보상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진도군청에서도 어업이나 수산물 유통업, 숙박업 등에 종사하는 주민의 직간접적 피해를 파악하고 있다. 지난 6일 오후, ‘빠마하러’ 육지 나갈 채비를 하던 송림민박 주인 장씨는 피해보상 이야기가 나오자 시큰둥하게 말했다.
“징헌 일이제. (한성호 사고 때) 죽은 사람 보상금은 50만원씩 나왔는데, 사람이 죽어분께 불쌍한 거지 돈이 문제겠능가. 돈 욕심은 내서 뭐해. 어제 우리 집에 기자가 왔다니까 아랫집 여자는 와서 ‘신문에 내서 보상해주라 하지’ 하길래, 내가 ‘옳지 않은 소리도 한다’고 했어. 지금 나라에 무식한 말로 ‘난’이 일어부렀는데, 돈이고 뭐시고 장사 쪼까 못하면 어때.”
5일 오전 조도면 창유항에서 헤어진 이씨의 말도 그랬다.
“김현호라고 구조 가장 많이 한 대마도 젊은 애기는 지금 밤마다 자기가 못 구한 아이들 모습이 떠올라서 소주 반되는 먹어야 겨우 잠을 잠다더만. 어떻게 하겄어. 세월이 약이제. 빨리 저거나 끝나봐야 뭐 어떻게 하겄지.”
이씨가 왼손을 들어 먼바다를 가리켰다. 세월호 사고 지점이 아득했다.
출처 : “41년 전에도 한성호 침몰…요번맹키로 눈뜨고 바라만 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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