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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설날은 구정이 아니다

설날은 구정이 아니다
[경향신문] 엄기자의 잡학사전 | 2015.02.15 09:47


설날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고, 달콤한 휴식에 빠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요.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을 ‘구정’으로 부르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양력 1월 1일을 ‘신정’이라 하고, 이에 대립하여 음력 1월 1일을 ‘구정’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이 말은 한 번쯤 생각해 볼 단어입니다.

왜냐고요? ‘구정’에는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려 한 일본의 교묘한 술책과 정치군인들이 국민들을 산업 현장으로만 내몰려 한 노동착취의 술수가 담긴 말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음력을 써 왔습니다. 그러다가 1895년께 일본의 영향으로 양력을 채택하게 됐지요.

이후 일본은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을 없애려 합니다. 자신들의 통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자기네처럼 양력 1월 1일을 공식 명절로 지정하고, 음력 1월 1일에 설을 지내는 것을 탄압합니다. 설 며칠 전부터 방앗간 영업을 금지하고, 설날에는 학생들의 도시락을 뒤져 제사음식을 싸온 학생은 벌을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양력 1월 1일을 ‘신정’으로, 음력 1월 1일을 ‘구정’으로 여기는 생각이 우리 국민들의 뇌리에도 자연스레 각인됩니다. ‘신정’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바람직한 날로, ‘구정’은 하루빨리 없애야 할 ‘구습’으로요.

여러분은 ‘신세대’로 불리기를 원하나요, 아니면 ‘구세대’로 불리기를 바라나요. 또 집에 신제품이 가득한 것이 좋은가요, 구닥다리가 넘쳐나는 게 좋은가요? 당연히 신세대로 불리기를 바라고 신제품이 좋겠죠. 결국 ‘신정’은 긍정적 개념을, ‘구정’은 부정적 개념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1949년에 양력 1월 1일이 공휴일로 지정되고 1950년부터 대한민국의 ‘신정’이 시작됩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더욱 심해집니다. 우리 생활에 양력이 완전히 정착하면서 설은 쇠서는 안 되는 날로 여기기까지 합니다. 설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되는 것이지요. 일제가 그러했던 것처럼요. 여기에는 노동자들을 일터로만 내몰려는 못된 경제제일주의도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다 설 명절에 관한 국민감정이 악화되자 1980년대 중반 그동안 부정적 이미지로 불리던 ‘구정’을 ‘민속의 날’로 이름을 바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옛 이름 ‘설날’도 찾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3일이 공휴일로 지정됐습니다. 추석과 함께 우리 고유의 최대 명절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이제 ‘신정’과 ‘구정’의 구분이 필요 없게 됐습니다. ‘구정’이 ‘설날’이 됐으니, 더 이상 ‘신정’이 필요 없게 된 것이지요. 아울러 설날은 당연히 음력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굳이 ‘음력설’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습니다.

일본의 설날을 멋진 ‘신정’으로 불러주고, 우리의 설날을 못된 ‘구정’으로 부르는 언어습관은 하루바삐 바로잡혀야 합니다.


출처  설날은 구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