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도시 대구, 박정희 품에 안기게 된 이유
[서평] 정운현의 <청년 여정남과 박정희 시대>
[오마이뉴스] 글: 정은균, 편집: 장지혜 | 16.01.10 12:10 | 최종 업데이트 16.01.10 12:10
<청년 여정남과 박정희 시대>는 여정남(1944~1975) 평전이다. 여정남평전편집위원회가 기획하고, <임종국 평전>과 <친일파는 살아 있다> 등을 펴낸 언론인 정운현이 썼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아래서 '사법살인' 당한 여정남의 의로운 삶, 당시 그와 함께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인혁당 사형수 7명이 나오기까지의 제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 전 과정이 실증적으로 서술되었다.
저자를 따라 여정남의 생을 거칠게 요약해 보자.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이 비상계엄 선포와 함께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의 구심에 서 있던 여정남은 이 해 11월에 유신헌법 반대집회로 구속되었다.
1974년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 배포와 함께 서울 시내 각 대학에서 반유신 시위가 펼쳐졌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다. 4월 17일 여정남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이후 6월 8일까지 50일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수차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여정남은 1974년 4월 25일자로 구속되었다. 같은 날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민청학련 사건 및 2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5월 27일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 54명이 정식으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7월 11일 비상보통군법회의 제2심판부는 인혁당 피고인 21명 중 서도원, 하재완 등 7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틀 뒤인 7월 13일에 민청학련 피고인 여정남, 이철, 유인태, 김지하 등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1975년 2월, 인혁당 관련자 8인과 여정남을 제외한 이철, 김지하 등 민청학련 관련자 대부분이 감형되거나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4월 8일 오전 10시 대법원(재판장 민복기)은 인혁당 관련자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4월 9일 민청학련 관련자 중 유일하게 남아 있던 여정남과 인혁당 관련자 7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대법원의 판결과 사형 집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저자에 따르면 사형 집행에 얽힌 법적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시 군법회의법은 사형은 확정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국방부장관이 집행명령을 내리고 그때부터 5일 이내에 집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여정남을 포함한 8명은 사형 확정 바로 다음날 형이 집행되어 재심 청구권마저 박탈당했다고 한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대검찰청에서 발송한 사형수 8인의 '형 선고통지서'가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에 접수된 시점은 4월 8일 오전 2시였다고 한다. 당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대법원 판결 선고보다 8시간이나 빨랐다. 판결 선고 전에 군검찰부에 통지서가 갔으니 정권에 의해 '살인'이 '기획'되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국방부장관이 발부한 '사형집행 명령서'가 서울구치소에 접수된 시각은 4월 8일 오후 2시로 되어 있었는데 누군가 '8'을 '9'로 고쳐 놓았다. 당초의 '8일 오후 2시'는 절차상 불가능한 것이어서 고친 셈인데 만약 고친 대로라면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집행명령서가 오기도 전에 집행을 한 셈이 된다. 엉터리 수사와 날치기 재판에 이어 형 집행조차도 조작과 탈법과 불법으로 얼룩졌다. - 424쪽.
여정남과 인혁당 관련자들의 사형 집행은 '사법살인'이자 '기획살인'이었다. 사형은 일몰 후부터 일출 전까지는 집행이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의 형 집행은 세상이 잠든 새벽 4시 55분부터 4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권력 유지에 눈이 먼 독재 체제의 야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들의 사형 집행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정했다고 한다. 1995년 한 방송국이 사법제도 100주년을 기념해 현직판사 315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인혁당 사건 재판을 두고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런 재판"이라는 응답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 월간지 <세카이世界>의 브라이언 J. 우드워드 객원기자는 "이들 8명은 단순히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사용돼야 할 올바른 단어는 모살謀殺"이라며 "공포에 싸여 신경이 날카로워졌으며, 게다가 빈틈없는 절대적 권력을 가진 박 대통령이 이 8명을 모살한 것"이라고 썼다. '모살謀殺'이란 사전에 미리 계획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들 8인에 대한 형 집행은 단순히 사형수에 대한 사법적 행형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기획 살인'이라는 것이다." - 423쪽
2007년 1월 23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 선고공판이 열렸다.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고,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돼 사형이 집행된 인혁당 사형수 8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사법살인'을 당한 지 32년 만이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 중 사형수 8명은 모두 대구 등 영남 출신이었다. 박정희는 고향이 선산(현 구미)이었다. 그들과 같은 영남 사람으로서 고향 출신 인사들을 왜 그리 많이 죽였을까. 저자는 대구 지역의 현대사에서 그 단서를 찾고 있다.
박정희 정권 초반기까지만 해도 대구는 대표적인 '야당도시'였다.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윤보선과 맞붙은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는 광주·전남에서 52%를, 대구·경북에서 50%를 득표했다. 김대중과 맞붙은 1971년 대선 때는 박정희가 영남에서 71.9%라는 몰표 득표를 했다. 대구와 경북이 박정희 정권의 전략적 근거지가 된 것이 이때부터였다.
저자는 원래 대구의 '야성'이 역사가 깊었다고 주장한다. 일제 때 항일투사들이 가장 많이 배출됐으며 해방정국에서 청년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라다는 이유에서다. 대구가 중심이었던, 1946년 10월 1일 발생한 '10월 항쟁'을 구체적인 근거로 들었다. 당시 노동자와 농민 계층이 일으킨 대도시 민중항쟁으로는 대구가 유일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자신의 고향이 반대 저항 세력의 주요 근거지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결국 극단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인혁계 지도자들을 제거하였다. 저자는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인해 정통 야당도시 대구가 완전히 박정희 정권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대구는 오늘날까지 보수의 상징이자 영남 파벌의 중심지로 전락한 채 '오욕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서른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처참한 고문으로 강요된 허위 자백과 꼭두각시 재판을 거쳐 형장으로 끌려가 '사법살인'을 당한 비극의 주인공 여정남을, 대구와 영남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피해를 입지 않은 자가 피해를 입은 자와 똑같이 분노하는 사회에서만 정의는 실현된다."
'추천사'를 쓴 한승헌 변호사가, "이 귀한 책이 오늘의 집권자를 비롯한 권력자들의 필독서가 되고, 이 나라의 주인된 우리 모두에게 깨달음과 다짐의 경전이 되기를 염원한다"며 쓴 문구다.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솔론의 말이라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정은균 시민기자의 블로그(http://blog.ohmynews.com/saesil/538024)에도 실렸습니다.
출처 야당도시 대구, 박정희 품에 안기게 된 이유
[서평] 정운현의 <청년 여정남과 박정희 시대>
[오마이뉴스] 글: 정은균, 편집: 장지혜 | 16.01.10 12:10 | 최종 업데이트 16.01.10 12:10
<청년 여정남과 박정희 시대>는 여정남(1944~1975) 평전이다. 여정남평전편집위원회가 기획하고, <임종국 평전>과 <친일파는 살아 있다> 등을 펴낸 언론인 정운현이 썼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아래서 '사법살인' 당한 여정남의 의로운 삶, 당시 그와 함께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인혁당 사형수 7명이 나오기까지의 제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 전 과정이 실증적으로 서술되었다.
저자를 따라 여정남의 생을 거칠게 요약해 보자.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이 비상계엄 선포와 함께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의 구심에 서 있던 여정남은 이 해 11월에 유신헌법 반대집회로 구속되었다.
1974년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 배포와 함께 서울 시내 각 대학에서 반유신 시위가 펼쳐졌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다. 4월 17일 여정남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이후 6월 8일까지 50일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수차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여정남은 1974년 4월 25일자로 구속되었다. 같은 날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민청학련 사건 및 2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5월 27일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 54명이 정식으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7월 11일 비상보통군법회의 제2심판부는 인혁당 피고인 21명 중 서도원, 하재완 등 7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틀 뒤인 7월 13일에 민청학련 피고인 여정남, 이철, 유인태, 김지하 등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1975년 2월, 인혁당 관련자 8인과 여정남을 제외한 이철, 김지하 등 민청학련 관련자 대부분이 감형되거나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4월 8일 오전 10시 대법원(재판장 민복기)은 인혁당 관련자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4월 9일 민청학련 관련자 중 유일하게 남아 있던 여정남과 인혁당 관련자 7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대법원의 판결과 사형 집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저자에 따르면 사형 집행에 얽힌 법적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시 군법회의법은 사형은 확정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국방부장관이 집행명령을 내리고 그때부터 5일 이내에 집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여정남을 포함한 8명은 사형 확정 바로 다음날 형이 집행되어 재심 청구권마저 박탈당했다고 한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대검찰청에서 발송한 사형수 8인의 '형 선고통지서'가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에 접수된 시점은 4월 8일 오전 2시였다고 한다. 당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대법원 판결 선고보다 8시간이나 빨랐다. 판결 선고 전에 군검찰부에 통지서가 갔으니 정권에 의해 '살인'이 '기획'되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이 잠든 새벽에 벌어진 ‘사법살인’
▲ 1975년 4월 8일 오전 대법정에서 개정된 민청학련 인혁당 관련사건 피고들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상고심 선고공판 모습. ⓒ 연합뉴스
국방부장관이 발부한 '사형집행 명령서'가 서울구치소에 접수된 시각은 4월 8일 오후 2시로 되어 있었는데 누군가 '8'을 '9'로 고쳐 놓았다. 당초의 '8일 오후 2시'는 절차상 불가능한 것이어서 고친 셈인데 만약 고친 대로라면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집행명령서가 오기도 전에 집행을 한 셈이 된다. 엉터리 수사와 날치기 재판에 이어 형 집행조차도 조작과 탈법과 불법으로 얼룩졌다. - 424쪽.
여정남과 인혁당 관련자들의 사형 집행은 '사법살인'이자 '기획살인'이었다. 사형은 일몰 후부터 일출 전까지는 집행이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의 형 집행은 세상이 잠든 새벽 4시 55분부터 4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권력 유지에 눈이 먼 독재 체제의 야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들의 사형 집행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정했다고 한다. 1995년 한 방송국이 사법제도 100주년을 기념해 현직판사 315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인혁당 사건 재판을 두고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런 재판"이라는 응답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 월간지 <세카이世界>의 브라이언 J. 우드워드 객원기자는 "이들 8명은 단순히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사용돼야 할 올바른 단어는 모살謀殺"이라며 "공포에 싸여 신경이 날카로워졌으며, 게다가 빈틈없는 절대적 권력을 가진 박 대통령이 이 8명을 모살한 것"이라고 썼다. '모살謀殺'이란 사전에 미리 계획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들 8인에 대한 형 집행은 단순히 사형수에 대한 사법적 행형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기획 살인'이라는 것이다." - 423쪽
2007년 1월 23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 선고공판이 열렸다.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고,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돼 사형이 집행된 인혁당 사형수 8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사법살인'을 당한 지 32년 만이었다.
인혁당 사건 관련 사형수 8명, 영남출신
▲ "박근혜 후보 시절엔 사과한다더니..."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고문·고작된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법살인'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지난 2013년 10월 24일 오전 청와대 부근 청운효자동주민센터앞에서 박근혜 면담을 요구하며 '부당이득금 반환청구 소송 취하'를 요구했다. ⓒ 권우성
인혁당 사건 관련자 중 사형수 8명은 모두 대구 등 영남 출신이었다. 박정희는 고향이 선산(현 구미)이었다. 그들과 같은 영남 사람으로서 고향 출신 인사들을 왜 그리 많이 죽였을까. 저자는 대구 지역의 현대사에서 그 단서를 찾고 있다.
박정희 정권 초반기까지만 해도 대구는 대표적인 '야당도시'였다.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윤보선과 맞붙은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는 광주·전남에서 52%를, 대구·경북에서 50%를 득표했다. 김대중과 맞붙은 1971년 대선 때는 박정희가 영남에서 71.9%라는 몰표 득표를 했다. 대구와 경북이 박정희 정권의 전략적 근거지가 된 것이 이때부터였다.
저자는 원래 대구의 '야성'이 역사가 깊었다고 주장한다. 일제 때 항일투사들이 가장 많이 배출됐으며 해방정국에서 청년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라다는 이유에서다. 대구가 중심이었던, 1946년 10월 1일 발생한 '10월 항쟁'을 구체적인 근거로 들었다. 당시 노동자와 농민 계층이 일으킨 대도시 민중항쟁으로는 대구가 유일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자신의 고향이 반대 저항 세력의 주요 근거지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결국 극단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인혁계 지도자들을 제거하였다. 저자는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인해 정통 야당도시 대구가 완전히 박정희 정권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대구는 오늘날까지 보수의 상징이자 영남 파벌의 중심지로 전락한 채 '오욕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서른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처참한 고문으로 강요된 허위 자백과 꼭두각시 재판을 거쳐 형장으로 끌려가 '사법살인'을 당한 비극의 주인공 여정남을, 대구와 영남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피해를 입지 않은 자가 피해를 입은 자와 똑같이 분노하는 사회에서만 정의는 실현된다."
'추천사'를 쓴 한승헌 변호사가, "이 귀한 책이 오늘의 집권자를 비롯한 권력자들의 필독서가 되고, 이 나라의 주인된 우리 모두에게 깨달음과 다짐의 경전이 되기를 염원한다"며 쓴 문구다.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솔론의 말이라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정은균 시민기자의 블로그(http://blog.ohmynews.com/saesil/538024)에도 실렸습니다.
▲ <청년 여정남과 박정희 시대>(여정남평전편집위원회 기획, 정운현 지음 / 다락방 / 2015.12.10. / 495쪽 / 20,000원)
출처 야당도시 대구, 박정희 품에 안기게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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