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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테러방지법’ 14년

‘미국판 테러방지법’ 14년
시민은 용의자가 됐다
[경향신문] 이인숙 기자 | 입력 : 2016.02.29 15:10:43 | 수정 : 2016.03.01 15:53:24



9·11테러가 일어난 지 2년 반 가까이 지난 년 남짓 지난 2004년 5월, 미국 뉴욕주의 버펄로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스티브 커츠 교수는 부인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지자 응급신고전화인 911에 연락을 했다. 그의 집으로 구급대원과 경찰이 찾아왔다. 바이오 아트(생물학 소재를 이용한 예술)를 하는 커츠의 집은 생물학 실험실을 방불케 했다. 그는 매사추세츠 현대미술관에서 유전자변형(GM)식품에 관한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연방수사국(FBI) 테러 합동대응팀, 국토안보부와 수사당국 관계자들이 커츠의 집에 들이닥쳤다. 중무장한 이들은 커츠의 집 주변에 폴리스 라인을 치고 그의 책과 메모지와 컴퓨터를 이 잡듯 뒤졌다. 커츠는 22시간 동안 영장도 없이 구금됐다. 공중보건이나 안전에 위해가 될 만한 것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는 일주일 뒤에야 자기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생화학 테러 혐의를 벗었음에도 그는 기소됐다. 비병원성 세균을 온라인으로 주문·결제했다는 죄였다. 이 일을 도운 동료 교수까지 함께 기소됐다. 2008년 법원은 커츠 교수의 행위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판결했지만 이미 그는 테러용의자로 낙인 찍혀 극심한 고통을 당한 뒤였다.

2002년 11월 멕시코에서 하와이로 향하던 유람선에 탔던 켈리 퍼거슨이라는 스무 살 여성은 배 안 화장실에 “미국으로 기수를 돌리지 않으면 미국인 승객을 모두 죽일 것”이라는 쪽지 2장을 붙였다. 갑자기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자 남자친구에게 빨리 돌아가기 위해 배를 회항시키려고 벌인 소동이었다. FBI가 급파됐고 대대적인 수사가 벌어졌다.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소동을 벌인 퍼거슨이 치러야 할 대가는 혹독했다.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부모 집에서 전자 발찌를 찬 채 출산한 뒤 교도소에 갇혔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은 ‘애국자법(Patriot Act)’ 때문이었다. 조지 W 부시 정부가 통과시킨 ‘미국판 테러방지법’인 애국자법은 테러 증거가 없어도 징역형을 선고하거나 정황만으로 테러 용의자로 기소할 수 있게 했다. 9·11테러의 공포가 낳은 애국자법은 협박 메모 한 장으로도 징역 2년을 살게 하고 무고한 사람을 생화학 테러범으로 몰았다. 애국자법은 9·11테러가 일어난 뒤 5주 만에 통과됐다. 하원은 찬성 357 대 반대 66, 상원은 찬성 98 대 반대 1로 만장일치에 가까웠다.

2004년 7월 미 법무부는 의회에 보고서 ‘애국자법 적용사례’를 제출했다. 애국자법이 적용된 사례를 정리해 성과를 알리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애국자법이 테러가 아닌 범죄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쓰였는지를 자백하는 보고서이기도 하다.

애국자법은 수사·정보기관이 자국민은 물론 외국인도 도·감청하고 통신기록을 수집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FBI가 법원의 영장 없이도 행정명령인 ‘국가안보레터’를 발송하면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 은행, 신용카드사 등 민간기업이 가입자의 통신기록에 거래기록까지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조사 대상을 구체적으로 특정하거나 왜 그 정보가 필요한지 근거가 없어도 가능했다.

▲ FBI 테러대응팀이 스티브 커츠 교수의 집을 통제하고 수색하는 모습. 버펄로/AP연합뉴스

애국자법은 수사·정보기관을 ‘유혹’했다. 애국자법을 통하면 까다로운 수사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손쉽게 정보를 얻고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수사·정보당국은 대테러법으로 늘어난 권한으로 마약상, 살인전과 4범, 신원도용범, 위조 여권으로 재판 전날 달아난 수배범을 수사하기 위해 민간 인터넷 사업자로부터 정보를 넘겨받았다. 애국자법은 신용카드 피싱 사기범, 아동 포르노 유포자, 자금 세탁범 등을 수사하는 데도 효과적으로 쓰였다.

뉴욕타임스는 이 보고서를 들어 “부시 행정부가 테러리스트에 대항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하던 애국자법이 테러와 상관없는 범죄 수사에 이용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2003년 1월 미 의회 조사기관인 제너럴 어카운팅 오피스의 조사에 따르면 9·11 이후 법무부가 조사한 테러사건 수가 급증했다. 그러나 법무부가 국제테러로 기소한 사건의 75%가 문서위조 같은 일반적인 범죄가 테러로 잘못 기소된 경우였다.

그런 사례 중 한 명이 앤토인 존스다. 나이트클럽 경영자였던 그는 마약 밀매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수사당국은 2012년 GPS로 그의 자동차의 위치를 추적했다. 영장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법정에서 검찰의 이런 수사방식이 논란거리가 됐고, 대법원은 결국 수사과정의 문제를 지적하며 존스가 무죄라고 판결했다. 애국자법을 근거로 용의자 정보추적을 무제한 강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애국자법이 발동된 후 정보수집 제동장치가 사라지면서 정보기관은 불특정 다수의 개인정보 수집에 둔감해졌다. 2005년 11월 비지니스위크에 따르면 FBI는 국가안보레터 수십만 건을 발송해 라스베거스 업계 관련자 1백만여 명의 금융정보를 요구했다. 카지노, 자동차 렌트업체, 물류창고업체 등 라스베거스 산업 종사자와 고객에 대한 광범위한 요구였다. 업자들은 FBI가 요구한 정보를 순순히 내놓든지, 법정까지 가서 끝을 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국가제조업협회(NAM)의 재정담당자 밥 셰플러는 “기업인들도 테러리즘과 전쟁에 협력하기를 원하지만 이런 통제되지 않은 정부권력은 선을 좀 넘은 것 같다”고 말했다. 미 의회에 법의 적용 범위를 줄여 달라고 요구한 NAM, 미상공회의소 등은 대표적인 친정부 단체다.

FBI는 2002년 뉴욕타임스를 해킹한 유명한 해커 애드리안 라모를 수사하면서 라모를 인터뷰한 신문사, 통신사, MSNBC 작가의 취재기록과 관련 정보를 넘길 것을 요구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요구는 FBI가 요구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무부가 거부하면서 일단락됐다.

이 법이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억누르는 데에 악용된 적도 물론 있다. 수전 린다우어라는 여성은 과거 미 의회에서 일했고 뒤에 반전활동가가 됐다. 그는 ‘등록을 하지 않고 외국 정부에 고용된 대리인’이라는 이유로 기소됐다. 이 조항은 대개 외국 스파이를 기소하는 데에 적용되는데, 2003년 이라크 침공에 반대한 린다우어에게 그런 혐의를 덮어씌운 것이다. 재판은 오래 끌었고, 연방정부는 2009년에야 린다우어에 대한 기소를 포기했다.

애국자법은 당국의 권한남용, 인권 침해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됐음에도 2013년 전 국가안보국(NS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의 무차별 도·감청 폭로 전까지 살아남아 지난해 6월 2일에야 폐기됐다.


출처  ‘미국판 테러방지법’ 14년···시민은 용의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