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5월, 잊어서는 안 될 이름들을 다시 기억하며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 | 최종업데이트 2016-05-03 17:41:24
25년 전인 1991년 4월 26일, 강경대 군은 명지대에서 백골단에게 구타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강경대 군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이었지만, 특히 기자와 같은 나이, 같은 학번의 2학년들에게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정신적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 충격의 본질은 “후배가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긴 입시 지옥을 뚫고 대학에 들어온 지 두 달이 채 안된 신입생이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 후배 하나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선배의 죄책감이 90학번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강도로 밀려왔다.
강경대 군이 목숨을 잃은 지 사흘 뒤인 4월 29일, 전남대학교에서 열린 ‘고(故) 강경대 열사 추모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에서 이 학교에 재학 중이던 박승희 양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숨졌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5월 1일 안동대학교 김영균 군이 분신했다. 다시 이틀 뒤인 5월 3일 경원대학교에서 천세용 군이 분신 후 투신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연이어 터진 세 청년들의 죽음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이들은 모두 1971년생이었고, 2학년 (90학번)이었다. 후배를 잃은 90학번들의 마음이 다 이랬을 것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그때를 바라보면 ‘아무리 시대가 어두웠다 한들 목숨을 끊을 것까지야 있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그 시대를 겪었던 대학생들이라면 ‘2학년의 봄’이 주는 남다른 의미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이제는 잊어야 한다”고. 하지만 잊을 수 없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김기설의 유서는 대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런데 이때 이 진실의 흐름에 역행해 끝까지 역사에 저항한 이들이 있었다. 당시 유서대필 사건을 수사했던 검사들이 이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사건 당시 강력부 검사로 수사에 참여했던 곽상도 대구지검 서부지청장(2007년 직책)도 포함됐다. 곽상도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의 명백한 수사결과까지 뒤집는다면 앞으로 모든 국민이 검찰을 신뢰하지 않게 돼 국가체계가 제대로 성립되겠느냐”고 강하게 저항했다. 그런 곽상도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진박 딱지 달고 박근혜 찬양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현 정부 초기에 민정수석을 지내다 20대 총선 때 대구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이런데도 세상이 진짜 바뀌었다고 할 참인가?
유서대필 사건의 총 지위자였던 법무부 장관은 현 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았던 김기춘이었다. 현장에서 사건을 총 지휘했던 강신욱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장은 이후 대법관까지 올랐고 2007년 박근혜 대선 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을 맡았다. 세상이 진짜 바뀌었나? 아니다! 탄압했고, 조작했고, 부정했던 이들은 여전히 이 나라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정작 3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친 강기훈 선생은 오랜 법정 투쟁 끝에 무죄를 입증 받았지만, 간암으로 힘겨운 투병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잊으라고 말하기 전에 잊을 수 있도록 해 달라! 역사의 가해자가 저 높은 자리에서 우리 민중들을 깔아보는 일이라도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출처 [기자수첩] 25년 전 5월, 잊어서는 안 될 이름들을 다시 기억하며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 | 최종업데이트 2016-05-03 17:41:24
기자는 1971년 생, 90학번이다. 이 아무 뜻 없어 보이는 나이와 학번이 기자에게 딱 한번 무거운 의미로 다가온 적이 있었다. 25년 전의 4월과 5월 강경대와 김귀정의 죽음, 그리고 뒤이어 터져 나온 세 명의 90학번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의 죽음이 그것이다.
25년 전인 1991년 4월 26일, 강경대 군은 명지대에서 백골단에게 구타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강경대 군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이었지만, 특히 기자와 같은 나이, 같은 학번의 2학년들에게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정신적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 충격의 본질은 “후배가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긴 입시 지옥을 뚫고 대학에 들어온 지 두 달이 채 안된 신입생이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 후배 하나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선배의 죄책감이 90학번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강도로 밀려왔다.
강경대 군이 목숨을 잃은 지 사흘 뒤인 4월 29일, 전남대학교에서 열린 ‘고(故) 강경대 열사 추모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에서 이 학교에 재학 중이던 박승희 양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숨졌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5월 1일 안동대학교 김영균 군이 분신했다. 다시 이틀 뒤인 5월 3일 경원대학교에서 천세용 군이 분신 후 투신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연이어 터진 세 청년들의 죽음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이들은 모두 1971년생이었고, 2학년 (90학번)이었다. 후배를 잃은 90학번들의 마음이 다 이랬을 것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그때를 바라보면 ‘아무리 시대가 어두웠다 한들 목숨을 끊을 것까지야 있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그 시대를 겪었던 대학생들이라면 ‘2학년의 봄’이 주는 남다른 의미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후에 많은 일이 있었다. 시인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장문의 멍멍이 소리를 늘어놓았고, 박홍 서강대 총장은 “죽음을 선동하는 세력이 있다”며 분신 배후설을 흘렸다. 정원식 총리서리가 밀가루 세례를 맞았고, 전민련 사회부장인 김기설 씨가 분신 후 투신해 목숨을 잃었다.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 선생은 유서대필 혐의로 끝내 옥살이를 했다. 한국판 매카시 정국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이제는 잊어야 한다”고. 하지만 잊을 수 없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김기설의 유서는 대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런데 이때 이 진실의 흐름에 역행해 끝까지 역사에 저항한 이들이 있었다. 당시 유서대필 사건을 수사했던 검사들이 이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사건 당시 강력부 검사로 수사에 참여했던 곽상도 대구지검 서부지청장(2007년 직책)도 포함됐다. 곽상도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의 명백한 수사결과까지 뒤집는다면 앞으로 모든 국민이 검찰을 신뢰하지 않게 돼 국가체계가 제대로 성립되겠느냐”고 강하게 저항했다. 그런 곽상도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진박 딱지 달고 박근혜 찬양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현 정부 초기에 민정수석을 지내다 20대 총선 때 대구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이런데도 세상이 진짜 바뀌었다고 할 참인가?
유서대필 사건의 총 지위자였던 법무부 장관은 현 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았던 김기춘이었다. 현장에서 사건을 총 지휘했던 강신욱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장은 이후 대법관까지 올랐고 2007년 박근혜 대선 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을 맡았다. 세상이 진짜 바뀌었나? 아니다! 탄압했고, 조작했고, 부정했던 이들은 여전히 이 나라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정작 3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친 강기훈 선생은 오랜 법정 투쟁 끝에 무죄를 입증 받았지만, 간암으로 힘겨운 투병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잊으라고 말하기 전에 잊을 수 있도록 해 달라! 역사의 가해자가 저 높은 자리에서 우리 민중들을 깔아보는 일이라도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출처 [기자수첩] 25년 전 5월, 잊어서는 안 될 이름들을 다시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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