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휘두르면 큰 화 입는다”던 조윤선, 정작 본인은 왜?
‘문화 정치인’ 조윤선의 몰락
[한겨레] 김종철 선임기자 | 등록 : 2017-02-04 10:04 | 수정 : 2017-02-04 10:12
“정치인의 길을 걸으며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정권마다 문화예술에 대해 편가르기식 지원을 하는 모습을 볼 때였다. 정권에 따라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주체’가 정부냐, 민간이냐로 나뉠 수는 있지만 지원받는 ‘객체’가 달라지는 것은 옳지 않다.”
놀랍게도 이 말을 한 주인공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관련해 구속된 조윤선이다. 18대 국회의원으로 있던 2011년 5월 조윤선은 <서울신문>의 기획기사인 ‘내 정치를 말한다’의 첫번째 인물로 등장했다. 그는 자신이 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이와 같이 썼다. 그는 “나는 달항아리처럼 균형 잡힌 사회를 위해 ‘문화 정치’를 계속할 것이다”라고도 했다.
하지만 문화의 다양성을 강조하던 정치인은 불과 3년 뒤인 2014년 6월부터 자신이 비판해 마지않았던 문화예술계 편가르기 작업을 벌인다. 청와대 정무수석이 된 조윤선은 자신의 전임자인 박준우가 대통령 비서실장인 김기춘의 지시를 받아 만든 블랙리스트를 인계받았다. 그는 이듬해 5월 정무수석을 관둘 때까지 자신의 지휘 아래 있는 국민소통비서관(신동철, 정관주)과 함께 블랙리스트를 업데이트하는 일을 계속했다.
좌파로 낙인찍힌 문화예술계 인사들에 대한 각종 지원은 끊고, 대신 정권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예산을 팍팍 밀어주게 했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영화 <다이빙벨>의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이것이 실패하자 모든 좌석을 예약해서 선점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2016년 9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된 이후에도 블랙리스트를 정부 정책에 적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조윤선은 문화를 생활로 즐겼다. 오페라 보기를 좋아해서 한때 젊은 오피니언 리더들이 중심이 된 오페라 동호회 ‘라 돌체비타’를 만들어 회장을 맡았으며, 월간 <객석>에 ‘오페라가 있는 명화’라는 제목의 칼럼을 2년간 싣기도 했다. 이 글들을 묶어서 2007년 <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라는 책을 냈다. 미술에 대한 사랑도 깊다. 여행 가는 도시마다 꼭 미술관에 들러 미술 작품을 감상할 정도다. 의원 시절 미술책이나 화가의 화집을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로 자주 건넸다. 자연스레 ‘문화를 사랑하는 정치인’으로 인식됐다.
조윤선이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때였다. 대통령 선거에 재도전한 이회창은 그해 9월 중앙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면서 36살의 젊은 변호사 조윤선을 대변인으로 전격 영입했다. 대선에서 이회창이 패배한 뒤 조윤선은 친정인 국내 최대의 로펌 ‘김앤장’에 복귀했다. 1991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조윤선은 사법연수원을 졸업(1994년)한 뒤 곧바로 ‘김앤장’에 들어갔다. 법조계의 삼성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앤장’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다. 웬만해서는 명함도 내밀 수 없다는 ‘김앤장’에는 그보다 먼저 들어온 남편(박성엽·55)이 동료로 일했다. 박성엽도 사법연수원 졸업과 동시에 ‘김앤장’에 들어왔다.
금수저 집안의 김앤장 변호사
36살에 정당 대변인 영입돼
엠비계 거쳐 ‘박근혜 사람’ 변신
일부러 수수한 옷 입는 등
권력자 심기보좌 잘해
“박근혜가 가장 편히 여겨”
오페라 취미 등 문화 사랑
“문화계 차별 반대” 피력도
권력 쥐자 블랙리스트 앞장
조윤선이 자란 가정 환경은 거의 대한민국 상위 1%에 해당한다. 아버지는 유명 농약회사의 부사장까지 지냈으며, 퇴임 뒤에는 골프장 잔디관리 회사를 만들어 성공했다. 어머니는 제약회사에 다니다가 약국을 경영했다. 다복한 가정에서 1녀1남의 맏이로 태어난 조윤선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특히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자랐다.”(<문화가 답이다>, 2011년) 그는 공부도 운동도 잘했다. 초등학교 때는 체조선수를 꿈꾸기도 했으며, 초등학교·중학교 때는 학급 반장을 도맡아 했다.
공부를 잘한 그는 1984년 서울대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1987년 1월 남영동 경찰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서울대 언어학과)과 같은 해였다.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학생과 시민들의 항거가 고조돼가던 격동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른바 강남의 엄친딸이었던 조윤선에게 시대의 아픔은 ‘다른 세계’였다. “386 전체의 (현실) 참여지수를 0부터 10까지 죽 늘어놓는다면 저는 중간보다 조금 덜 참여하는 쪽”(<신동아> 인터뷰, 2009년 8월호)이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영화 보고 공연 보고 책도 읽고 여행 많이 다니고 등산도 하는”(<신동아> 인터뷰) 당시로서는 꿈같은 대학 생활을 보냈다.
대학생 자유 여행이 허용되기 전인 2학년(1985년) 여름방학 때는 친구 2명과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가서 두달간 유럽 각지를 여행했다. 박종철이 충북 영동의 한 마을로 농촌활동(1984년 여름)을 가서 땀을 흘리던 시절이었다. 당시 그에게 낙담을 안겨준 유일한 일은 대학 4학년 때 1차 사법시험에서 낙방한 일이었다. 고등학교(세화여고) 졸업 무렵에 만나 줄곧 사귀었던 오빠 같은 남자친구 박성엽의 권유로 시작한 공부였다.
2003년 ‘김앤장’에 돌아간 조윤선은 변호사 업무를 하는 틈틈이 문화 쪽 경력을 쌓아나갔다. ‘라 돌체비타’를 만들고, <객석>에 오페라 관련 글을 기고한 것도 이때였다. 교제의 폭을 넓혀가던 조윤선에게 도약의 기회가 왔다. 2007년 외국계 은행인 씨티은행은 정치권 경험을 가진 조윤선을 법무본부장 겸 부행장으로 영입했다. 정부와 국회 등을 상대하는 대관 업무를 주로 했다.
언젠가는 정치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던 조윤선에게 기회는 의외로 빨리 왔다. 막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18대 총선(2008년)을 앞두고 그해 3월 조윤선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시 영입을 위해 조윤선을 만났던 여권 인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공천을 앞두고 여성 후보가 모자랐다. 정권 실세들이 모여서 논의하다가 조윤선이 어떠냐는 얘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만났더니 본인도 좋다고 수락을 바로 했다. 처음에 친박의 이혜훈 의원 지역인 서울 서초갑 지역구를 권했는데 본인이 선배인 이 의원을 밀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해서 비례대표로 돌렸다”고 말했다.
국회에 들어온 조윤선의 앞길에는 걸림돌이 없었다. 한나라당 대표 3명(강재섭, 박희태, 정몽준)이 차례로 바뀌었지만, 조윤선은 부동의 대변인으로 최장기 기록을 경신했다. 당시 한나라당을 출입했던 한 기자는 “그는 외모도 예뻤지만, 처신을 잘했다. 자기를 내세우길 잘하는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조윤선은 당 대표 등 주인공보다 자신이 돋보이지 않도록 조신하게 굴었다. 당시 실력자였던 박근혜 의원 주변에서는 나경원 의원과 같이 있으면 박 의원이 조연처럼 보이는데 조 의원과 있으면 주연으로 살아난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조윤선은 박근혜 등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는 튀지 않도록 수수한 옷을 입으려고 애썼다.
조윤선은 2012년 19대 총선 때 서울 종로 지역구에 출마하려고 깃발을 꽂았으나 당이 홍사덕을 전략공천하기로 함에 따라 실패했다. 정치권 들어와서 첫 좌절이었지만, 이번에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처신을 했다. 그는 당의 결정에 깨끗이 승복한다는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 여권의 사실상 후보였던 박근혜는 ‘예쁘고도 착한’ 조윤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해 7월 자신의 경선 캠프 대변인으로 조윤선을 영입했다.
이후 조윤선은 경선 캠프 대변인에 이은 당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 대통령 당선자 대변인으로 직함을 바꿔가면서 박근혜가 2013년 초 청와대에 들어갈 때까지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직함은 대변인이었지만 사실상 후보자를 수행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박근혜의 신데렐라’라는 별명이 붙었다. 당시 선대위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는 “박 대통령은 사람을 매우 가리는데 조윤선에 대해서만은 편안하게 여겼다. 어딜 가든 조윤선을 찾더라”고 말했다. 당시 한 출입기자는 “기자들과 저녁 먹는 자리에서 조윤선이 박근혜 후보의 전화를 자주 받았다. 통화 내용은 내일 행사에 입고 갈 옷 등 패션에 대한 조언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권 출범 뒤 조윤선의 첫번째 직책은 여성가족부 장관이었다. 이즈음 조윤선은 달라졌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는 사석에서 박근혜의 소통 부족 등을 비판적으로 말했지만, 보스와 주파수를 완벽하게 맞추기 시작했다. 그는 여성가족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그 부분은 제가 역사적 관점에서 평가하고 결정 내릴 깊은 공부가 안 돼 있다”고 말했다.
완전한 ‘박근혜 사람’이 된 그는 1년 뒤인 2014년 6월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부름을 받는다. 직책은 장관에서 차관급으로 내려갔지만, 정무수석은 권력자와의 거리가 가까워 훨씬 센 자리다. 하지만 정당이나 국회와의 조율, 정권 운영에 대한 정무적 판단 등 고유의 업무가 그에게 맡겨진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시 청와대로 조윤선을 찾아간 한 전직 의원은 최근 기자에게 “답답해서 몇가지 조언을 했는데 실권이 없는 것 같았다. 김기춘 비서실장의 눈치를 보는 듯한 말을 했다”고 말했다. 조윤선도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정무수석으로 있는 11개월 동안) 전화 통화는 했어도 (대통령을) 독대하지는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국정 운영을 같이 고민하는 참모나 정치적 동지라기보다는 윗사람의 명을 받드는 심부름꾼에 머문 듯하다.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벌인 서울 서초갑에서의 공천 혈투는 조윤선의 변신을 잘 보여주는 예다. 18대 총선 때 선배와 경쟁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던 조윤선은 박근혜계를 이탈한 ‘탈박’ 이혜훈(19대 때는 공천 탈락)의 복귀를 막으려는 친박 그룹의 뜻에 따라 저격수로 나섰다. 청와대에서 조윤선을 만났던 그 전직 의원은 “서초갑 경선에서 지고 난 뒤 ‘진박’ 후보들을 지원하는 유세까지 다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인간성 좋던 예전의 조윤선이 아니더라”고 말했다.
조윤선은 평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파리스의 심판’을 교훈으로 삼았다. 트로이 왕자인 파리스는 헤라(권력)와 아테나(지혜), 아프로디테(미) 등 세명한테서 셋 중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를 가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아프로디테는 답례로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와의 사랑을 파리스에게 준다. 헬레네가 사랑을 따라 트로이로 간 데 대한 복수로 발생한 전쟁으로 트로이는 결국 망한다.
조윤선은 “파리스는 세 여신의 부탁을 받고 우쭐했을 거예요. 자신한테 결정권이 있다는 사실에. 그런데 사실은 파리스가 결정권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제우스신이 여신들의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떠넘겼기 때문이죠. 파리스의 심판이 주는 교훈은, 자신의 권력이 아닌 것을 자신의 것인 양 휘두르다가는 큰 화를 입게 된다는 거예요.”(<신동아>, 앞 인터뷰)
누구보다 명석한 모범생이었던 그가 ‘파리스의 심판’ 교훈을 깜빡 잊었던 걸까. 아니면 권력자들의 눈에 들어 출세의 길만 달려온 비주체적 삶의 귀결일까.
출처 “권력 휘두르면 큰 화 입는다”던 조윤선, 정작 본인은 왜?
‘문화 정치인’ 조윤선의 몰락
[한겨레] 김종철 선임기자 | 등록 : 2017-02-04 10:04 | 수정 : 2017-02-04 10:12
▶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구속된 조윤선(50)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평소 문화를 사랑했습니다. 오페라를 즐기고, 미술 감상이 취미였습니다. 두 딸도 음악과 미술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 발전에 기여하겠다던 그는 놀랍게도 문화계 탄압에 앞장서고 있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요. 우리 사회 상위 1% 집안을 배경으로 엘리트 코스로만 성장해온 조 전 장관의 몰락이 주는 교훈이 뭔지 살펴봤습니다.
▲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설 연휴 마지막날인 지난달 30일 오후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강남구 대치동 박영수 특검 사무실로 소환되고 있다. 신소영 기자
“정치인의 길을 걸으며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정권마다 문화예술에 대해 편가르기식 지원을 하는 모습을 볼 때였다. 정권에 따라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주체’가 정부냐, 민간이냐로 나뉠 수는 있지만 지원받는 ‘객체’가 달라지는 것은 옳지 않다.”
놀랍게도 이 말을 한 주인공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관련해 구속된 조윤선이다. 18대 국회의원으로 있던 2011년 5월 조윤선은 <서울신문>의 기획기사인 ‘내 정치를 말한다’의 첫번째 인물로 등장했다. 그는 자신이 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이와 같이 썼다. 그는 “나는 달항아리처럼 균형 잡힌 사회를 위해 ‘문화 정치’를 계속할 것이다”라고도 했다.
하지만 문화의 다양성을 강조하던 정치인은 불과 3년 뒤인 2014년 6월부터 자신이 비판해 마지않았던 문화예술계 편가르기 작업을 벌인다. 청와대 정무수석이 된 조윤선은 자신의 전임자인 박준우가 대통령 비서실장인 김기춘의 지시를 받아 만든 블랙리스트를 인계받았다. 그는 이듬해 5월 정무수석을 관둘 때까지 자신의 지휘 아래 있는 국민소통비서관(신동철, 정관주)과 함께 블랙리스트를 업데이트하는 일을 계속했다.
좌파로 낙인찍힌 문화예술계 인사들에 대한 각종 지원은 끊고, 대신 정권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예산을 팍팍 밀어주게 했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영화 <다이빙벨>의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이것이 실패하자 모든 좌석을 예약해서 선점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2016년 9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된 이후에도 블랙리스트를 정부 정책에 적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80년대 아픔’과 멀었던 대학생활
조윤선은 문화를 생활로 즐겼다. 오페라 보기를 좋아해서 한때 젊은 오피니언 리더들이 중심이 된 오페라 동호회 ‘라 돌체비타’를 만들어 회장을 맡았으며, 월간 <객석>에 ‘오페라가 있는 명화’라는 제목의 칼럼을 2년간 싣기도 했다. 이 글들을 묶어서 2007년 <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라는 책을 냈다. 미술에 대한 사랑도 깊다. 여행 가는 도시마다 꼭 미술관에 들러 미술 작품을 감상할 정도다. 의원 시절 미술책이나 화가의 화집을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로 자주 건넸다. 자연스레 ‘문화를 사랑하는 정치인’으로 인식됐다.
조윤선이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때였다. 대통령 선거에 재도전한 이회창은 그해 9월 중앙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면서 36살의 젊은 변호사 조윤선을 대변인으로 전격 영입했다. 대선에서 이회창이 패배한 뒤 조윤선은 친정인 국내 최대의 로펌 ‘김앤장’에 복귀했다. 1991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조윤선은 사법연수원을 졸업(1994년)한 뒤 곧바로 ‘김앤장’에 들어갔다. 법조계의 삼성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앤장’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다. 웬만해서는 명함도 내밀 수 없다는 ‘김앤장’에는 그보다 먼저 들어온 남편(박성엽·55)이 동료로 일했다. 박성엽도 사법연수원 졸업과 동시에 ‘김앤장’에 들어왔다.
금수저 집안의 김앤장 변호사
36살에 정당 대변인 영입돼
엠비계 거쳐 ‘박근혜 사람’ 변신
일부러 수수한 옷 입는 등
권력자 심기보좌 잘해
“박근혜가 가장 편히 여겨”
오페라 취미 등 문화 사랑
“문화계 차별 반대” 피력도
권력 쥐자 블랙리스트 앞장
조윤선이 자란 가정 환경은 거의 대한민국 상위 1%에 해당한다. 아버지는 유명 농약회사의 부사장까지 지냈으며, 퇴임 뒤에는 골프장 잔디관리 회사를 만들어 성공했다. 어머니는 제약회사에 다니다가 약국을 경영했다. 다복한 가정에서 1녀1남의 맏이로 태어난 조윤선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특히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자랐다.”(<문화가 답이다>, 2011년) 그는 공부도 운동도 잘했다. 초등학교 때는 체조선수를 꿈꾸기도 했으며, 초등학교·중학교 때는 학급 반장을 도맡아 했다.
공부를 잘한 그는 1984년 서울대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1987년 1월 남영동 경찰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서울대 언어학과)과 같은 해였다.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학생과 시민들의 항거가 고조돼가던 격동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른바 강남의 엄친딸이었던 조윤선에게 시대의 아픔은 ‘다른 세계’였다. “386 전체의 (현실) 참여지수를 0부터 10까지 죽 늘어놓는다면 저는 중간보다 조금 덜 참여하는 쪽”(<신동아> 인터뷰, 2009년 8월호)이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영화 보고 공연 보고 책도 읽고 여행 많이 다니고 등산도 하는”(<신동아> 인터뷰) 당시로서는 꿈같은 대학 생활을 보냈다.
대학생 자유 여행이 허용되기 전인 2학년(1985년) 여름방학 때는 친구 2명과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가서 두달간 유럽 각지를 여행했다. 박종철이 충북 영동의 한 마을로 농촌활동(1984년 여름)을 가서 땀을 흘리던 시절이었다. 당시 그에게 낙담을 안겨준 유일한 일은 대학 4학년 때 1차 사법시험에서 낙방한 일이었다. 고등학교(세화여고) 졸업 무렵에 만나 줄곧 사귀었던 오빠 같은 남자친구 박성엽의 권유로 시작한 공부였다.
“내일은 이런 패션을” 박근혜에게 조언
2003년 ‘김앤장’에 돌아간 조윤선은 변호사 업무를 하는 틈틈이 문화 쪽 경력을 쌓아나갔다. ‘라 돌체비타’를 만들고, <객석>에 오페라 관련 글을 기고한 것도 이때였다. 교제의 폭을 넓혀가던 조윤선에게 도약의 기회가 왔다. 2007년 외국계 은행인 씨티은행은 정치권 경험을 가진 조윤선을 법무본부장 겸 부행장으로 영입했다. 정부와 국회 등을 상대하는 대관 업무를 주로 했다.
▲ 이명박이 2008년 5월 19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와의 정례회동에 앞서 조윤선 당 대변인과 악수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언젠가는 정치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던 조윤선에게 기회는 의외로 빨리 왔다. 막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18대 총선(2008년)을 앞두고 그해 3월 조윤선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시 영입을 위해 조윤선을 만났던 여권 인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공천을 앞두고 여성 후보가 모자랐다. 정권 실세들이 모여서 논의하다가 조윤선이 어떠냐는 얘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만났더니 본인도 좋다고 수락을 바로 했다. 처음에 친박의 이혜훈 의원 지역인 서울 서초갑 지역구를 권했는데 본인이 선배인 이 의원을 밀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해서 비례대표로 돌렸다”고 말했다.
국회에 들어온 조윤선의 앞길에는 걸림돌이 없었다. 한나라당 대표 3명(강재섭, 박희태, 정몽준)이 차례로 바뀌었지만, 조윤선은 부동의 대변인으로 최장기 기록을 경신했다. 당시 한나라당을 출입했던 한 기자는 “그는 외모도 예뻤지만, 처신을 잘했다. 자기를 내세우길 잘하는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조윤선은 당 대표 등 주인공보다 자신이 돋보이지 않도록 조신하게 굴었다. 당시 실력자였던 박근혜 의원 주변에서는 나경원 의원과 같이 있으면 박 의원이 조연처럼 보이는데 조 의원과 있으면 주연으로 살아난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조윤선은 박근혜 등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는 튀지 않도록 수수한 옷을 입으려고 애썼다.
조윤선은 2012년 19대 총선 때 서울 종로 지역구에 출마하려고 깃발을 꽂았으나 당이 홍사덕을 전략공천하기로 함에 따라 실패했다. 정치권 들어와서 첫 좌절이었지만, 이번에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처신을 했다. 그는 당의 결정에 깨끗이 승복한다는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 여권의 사실상 후보였던 박근혜는 ‘예쁘고도 착한’ 조윤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해 7월 자신의 경선 캠프 대변인으로 조윤선을 영입했다.
이후 조윤선은 경선 캠프 대변인에 이은 당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 대통령 당선자 대변인으로 직함을 바꿔가면서 박근혜가 2013년 초 청와대에 들어갈 때까지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직함은 대변인이었지만 사실상 후보자를 수행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박근혜의 신데렐라’라는 별명이 붙었다. 당시 선대위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는 “박 대통령은 사람을 매우 가리는데 조윤선에 대해서만은 편안하게 여겼다. 어딜 가든 조윤선을 찾더라”고 말했다. 당시 한 출입기자는 “기자들과 저녁 먹는 자리에서 조윤선이 박근혜 후보의 전화를 자주 받았다. 통화 내용은 내일 행사에 입고 갈 옷 등 패션에 대한 조언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2012년 12월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 유세를 위해 당사를 나서고 있다. 왼쪽 조윤선 대변인은 박 후보에 비해 수수한 옷을 입고 있다. 오른쪽은 이학재 비서실장. 이정우 선임기자
박근혜 정권 출범 뒤 조윤선의 첫번째 직책은 여성가족부 장관이었다. 이즈음 조윤선은 달라졌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는 사석에서 박근혜의 소통 부족 등을 비판적으로 말했지만, 보스와 주파수를 완벽하게 맞추기 시작했다. 그는 여성가족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그 부분은 제가 역사적 관점에서 평가하고 결정 내릴 깊은 공부가 안 돼 있다”고 말했다.
완전한 ‘박근혜 사람’이 된 그는 1년 뒤인 2014년 6월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부름을 받는다. 직책은 장관에서 차관급으로 내려갔지만, 정무수석은 권력자와의 거리가 가까워 훨씬 센 자리다. 하지만 정당이나 국회와의 조율, 정권 운영에 대한 정무적 판단 등 고유의 업무가 그에게 맡겨진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시 청와대로 조윤선을 찾아간 한 전직 의원은 최근 기자에게 “답답해서 몇가지 조언을 했는데 실권이 없는 것 같았다. 김기춘 비서실장의 눈치를 보는 듯한 말을 했다”고 말했다. 조윤선도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정무수석으로 있는 11개월 동안) 전화 통화는 했어도 (대통령을) 독대하지는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국정 운영을 같이 고민하는 참모나 정치적 동지라기보다는 윗사람의 명을 받드는 심부름꾼에 머문 듯하다.
“인간성 좋던 예전의 조윤선이 아니더라”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벌인 서울 서초갑에서의 공천 혈투는 조윤선의 변신을 잘 보여주는 예다. 18대 총선 때 선배와 경쟁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던 조윤선은 박근혜계를 이탈한 ‘탈박’ 이혜훈(19대 때는 공천 탈락)의 복귀를 막으려는 친박 그룹의 뜻에 따라 저격수로 나섰다. 청와대에서 조윤선을 만났던 그 전직 의원은 “서초갑 경선에서 지고 난 뒤 ‘진박’ 후보들을 지원하는 유세까지 다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인간성 좋던 예전의 조윤선이 아니더라”고 말했다.
조윤선은 평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파리스의 심판’을 교훈으로 삼았다. 트로이 왕자인 파리스는 헤라(권력)와 아테나(지혜), 아프로디테(미) 등 세명한테서 셋 중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를 가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아프로디테는 답례로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와의 사랑을 파리스에게 준다. 헬레네가 사랑을 따라 트로이로 간 데 대한 복수로 발생한 전쟁으로 트로이는 결국 망한다.
조윤선은 “파리스는 세 여신의 부탁을 받고 우쭐했을 거예요. 자신한테 결정권이 있다는 사실에. 그런데 사실은 파리스가 결정권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제우스신이 여신들의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떠넘겼기 때문이죠. 파리스의 심판이 주는 교훈은, 자신의 권력이 아닌 것을 자신의 것인 양 휘두르다가는 큰 화를 입게 된다는 거예요.”(<신동아>, 앞 인터뷰)
누구보다 명석한 모범생이었던 그가 ‘파리스의 심판’ 교훈을 깜빡 잊었던 걸까. 아니면 권력자들의 눈에 들어 출세의 길만 달려온 비주체적 삶의 귀결일까.
출처 “권력 휘두르면 큰 화 입는다”던 조윤선, 정작 본인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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